[테크&포커스] 134억 유지보수비 활용… 방치됐던 연구시설·장비 살려쓴다
과제기간 중에만 수리비 지원
수천만원대 부담에 기계 방치
'AS비용 적립 가능' 규제 완화
지속성·장비 활용 두토끼 잡아




# 국내 A대학의 박모 교수는 연초만 되면 걱정거리가 있다. 국가 R&D(연구개발) 예산 지원을 받아 구입한 연구장비가 혹 고장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서다. 연구비가 통상 연초에 지급되지 않는 탓에 만약 새해부터 연구장비가 고장나면 수리에 쓸 연구비가 없어 연구에 차질이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는 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2019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연구시설·장비비 통합관리제(이하 통합관리제)'를 소속 대학이 도입하면서부터다. 연구과제 기간 중에 유지·보수비를 적립해 놓으면 과제가 종료된 후라도 연구장비가 고장나거나 점검이 필요할 때 적립한 비용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됐다.
# 국내 B연구원에서 연구장비를 관리하는 이모 팀장은 연구장비가 고장나거나 다른 공간으로 이전 배치해야 할 때면 한숨부터 나온다. 고장 수리와 재배치 과정에서 적지 않은 비용이 드는데, 이를 충당할 마땅한 재원이 기관에 없기 때문이다. 연구장비 소유권이 기관에 있지만, 기관에 배정된 간접비를 갖다 쓰려고 해도 기관 차원에서 쓸 곳이 많다 보니 연구장비 관리에 사용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실정이다. 이 때문에 연구장비의 정기적 유지보수와 고장 시 수리를 받기 위해 장비업체와 장기계약을 맺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B연구원이 A대학과 마찬가지로 지난해 통합관리제를 도입한 후 어려움이 해소됐다. 연구과제의 일정 금액을 적립할 수 있게 돼 이전보다 연구장비 관리·점검을 훨씬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연구장비 활용성·연구자 자율성 한꺼번에 UP
두 사례는 대학과 연구기관에 '연구시설·장비비 통합관리제'가 도입된 이후 달라진 연구현장의 모습이다. 이전보다 연구장비 활용도와 연구자의 연구 자율성이 동시에 높아져 일선 연구자들로부터 높은 호응을 얻고 있다. 이는 양질의 연구성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제도는 과기정통부가 연구과제 기간 중 연구시설·장비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미리 적립해 두고, 연구과제가 종료된 후 △유지·보수 △임차·사용대차 △이전·설치비 등의 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2019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국가연구개발과제 종료 후 유지·보수비를 확보하지 못해 연구시설·장비 활용도가 떨어지거나 방치되는 것을 막는 것이 제도의 취지다.
최근 5년간(2016∼2020년) 3000만원 이상의 국가연구시설·장비 투자 규모는 총 4조262억원(1만8853점)에 달했다. 국가연구개발사업 전체 투자에서 평균 4.7%(연평균 8052억원)이 연구시설·장비에 투입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연구시설·연구장비 투자 규모가 매년 증가하면서 일선 연구현장에서 사용되지 않거나 고장으로 방치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2016년 국가연구시설장비 현장 전수실태조사에 따르면 총 5만6656점의 R&D 연구시설·장비 중 19.4%가 유휴·저활용 장비인 것으로 나타났다. 10대 중 2대꼴로 연구장비가 쓰이지 않거나 고장나 있다는 얘기다.
이런 문제가 벌어진 근본 원인은 R&D 과제가 종료되면 연구장비가 고장 나도 연구비에서 수리비용을 충당할 수 없도록 국가연구개발사업 관리 규정에서 정해놨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과기정통부는 연구 현장과 소통하고 의견을 반영해 특례조항을 신설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연구시설·장비비 통합관리제'다.
연구과제 종료 후에도 적립해 놓은 유지·보수비를 활용할 수 있도록 규제를 개선, 통합관리제 시행 4년차를 맞아 서울대, KAIST,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등 71개 기관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적립된 유지보수비는 134억원(기관 당 약 2억5000만원)에 달했으며, 이 중 29억원이 지출됐다.
◇연구자 '만족도 상승'… 연구 친화적 제도 '진화 중'
달라진 제도가 연구 현장에 미친 효과를 컸다. 연구 현장에서 이 제도를 크게 반긴 것은 연구비 활용에 대한 연구자의 자율성이 높아지면서 연구장비를 더욱 효율적이고 안정적으로 관리·활용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또한 유지보수비 적립 계정을 연구책임자(개인), 공동활용시설(부서), 연구개발기관 등으로 구분해 만들 수 있고 기관 특성이나 과제 성격에 따라 탄력적으로 운영·관리할 수 있도록 자율성을 대폭 부여한 점도 도입기관과 연구자의 만족도로 이어졌다. 다만 계정별 적립한도의 경우 연구기관(10억원), 공동활용시설(7억원), 연구책임자(3억원) 등으로 정해 운영토록 유도하고 있다. 과기정통부는 통합관리제가 현장에 안착하도록 지원을 이어가고 있다. 전담 운영기관인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국가연구시설장비진흥센터(NFEC)를 통해 도입 기관이 유지보수비를 체계적으로 적립·사용하도록 시스템 기능 점검을 지원하고, 정기적인 운영현황 모니터링을 돕고 있다.
제도 도입 희망 기관을 대상으로 방문 교육, 컨설팅도 제공하는 한편 담당자 교육, 워크숍도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특히 연구현장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 규정과 매뉴얼 개정도 계속 해 나가고 있다. 이를 위해 연구과제를 위한 장비뿐 아니라 교육용 장비 등 비R&D 장비도 유지보수비로 쓸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고, 연구지원체계 평가 시 제도 도입 기관에 가점을 부여해 연구현장의 만족도를 높이고 있다.
그 결과 연구장비 담당자의 통합관리제에 대한 만족도가 지난해 4.40점(5점 만점)으로 전년 대비 0.27점 상승했고, 지난해 처음 실시한 연구자의 제도 만족도 점수도 5점 만점에 4.29점으로 나왔다.
과기정통부는 오는 22일부터 10월 19일까지 통합관리제 신규 도입기관을 대상으로 신청을 받아 심의와 현장 점검을 거쳐 12월 지정 기관을 최종 선정할 계획이다.
박진영 과기정통부 연구평가혁신과장은 "통합관리제는 범부처 R&D 정책과 제도를 담당하는 과학기술혁신본부가 연구현장의 애로사항을 듣고 제도를 개선한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이어 "연구자들이 더욱 활발하게 활용할 수 있는 제도로 개선·발전시켜 나가겠다"며 "연구현장의 의견을 반영해 현장 친화적인 정책과 제도를 지속적으로 발굴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준기기자 bongchu@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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