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본 거 다 짜깁기한 차" 현대 눈치 보며 만들다 실패한 기아 대형세단

많은 이들의 기대와 관심 속에 기아의 새로운 플래그십 'K9'이 2012년 국내 정식으로 데뷔했습니다. 2009년 신형 에 쿠스 이후 3년 만에 신차 발표회에 정몽구 회장이 직접 나설 만큼 그룹 차원에서도 기대를 건 모델이었죠. 코드명(KH)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차는 '오피러스(GH)의 후속이었고, 차명은 '오피러스' 또는 '엔터프라이즈'라는 이름이 부활할 것으로 예상되기도 했지만, 결국 세단 'K시리즈의 최고봉'을 장식하는 의미의 'K9'으로 지어졌습니다.

오랜 기간 이어져 온 오피러스가 고급차 시장에서 나름의 입지를 구축하긴 했습니다만, 전륜구동이라는 약점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데다 앞서 'K7', 'K5'가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면서 이 'K' 브랜드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이 그 어느 때보다 긍정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체급과 구동 방식까지 바뀐 이 완전히 새로운 플래그십에 굳이 다른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었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확 불어난 체급이었습니다. 전장과 전폭, 전고 등 모든 면에서 오피러스 대비 월등히 커졌고 무엇보다 후륜 구동 구조에서 오는 긴 휠 베이스와 짧은 프론트 오버행으로 안정감을 더한 측면, 휠 하우스를 가득 메우는 멀티 스포크 휠, 날카로운 램프 디자인으로 권위적인 느낌보다는 트렌드에 맞춰 장식을 절제하고 스포티한 분위기를 가미해 드디어 젊은 브랜드 기아의 플래그십다운 생김새로 거듭났죠.

특히 램프는 온통 LED로 채워 미래지향적인 인상을 만들어냈고, 그 중에서도 사이드 미러가 통으로 번쩍이는 것 같은 이 사이드 리피터가 단연 압권이었어요.

다만 묘하게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부분들도 있었습니다. 여러 개의 렌즈가 촘촘히 박힌 헤드램프는 미래지향적인 분위기를 넘어 징그러워 보인다는 반응이 있었고, 동생들과 마찬가지로 아가미를 연상케 하는 펜더 가니쉬를 추가했는데 약간 쌩뚱맞은 느낌도 들었고, 무엇보다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죠.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후륜구동 럭셔리 세단이라는 점에서 BMW를 닮은 것은 좋았지만, 디자인까지 BMW를 빼닮았다는 점이 문제였습니다. 호랑이 코 그릴을 반으로 갈라 키드니 그릴로 만들면 역락 없는 BMW의 모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생김새였죠. 실제로 공개 당시 네티즌들은 물론 국내외 자동차 전문 매체 역시 지나칠 정도로 닮았다며 비난 여론이 일었어요. 가뜩이나 전작 오피러스마저 '카피캣' 논란을 겪었던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쯤 되면 기아 플래그십의 전통 아니냐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습니다.

비아냥을 막는 데는 이중접합 유리가 최고죠. 신속하게 실내로 들어왔는데요. 수평 기조의 실내는 기아의 브랜드 컬러인 붉은색 조명을 메인으로 다양한 전자장비들이 매력을 뽐냈고, 넉넉하고 단정한 고급 세단의 분위기와 함께 고리타분한 기존 국산 고급차와는 완전히 결이 다른 첨단 감각이 물씬 느껴졌습니다. 특히 스웨이드 마감, 아이보리를 넘어 아예 화이트 시트로 꾸며진 실내를 실물로 접했을 때 느낌은 신세계였죠.

가장 먼저 운전자를 반기는 건 국산차 최초의 풀 LCD 클러스터로 12.3인치 대화면 모니터에 주행에 관련된 정보를 화려한 그래픽으로 전달했습니다. 직관적인 스티어링 휠의 버튼 배치로 계기판의 여러가지 기능을 손쉽게 조작할 수도 있었죠.

특히 그룹 최초로 헤드업 디스플레이와 전자식 변속 레버가 마련된 것이 눈에 띄었는데, 지금이야 보편화된 장비지만 당시에는 BMW 등 일부 수입차에서나 보던 물건이었습니다. 여기에 국산차 중 가장 거대한 9.2인치 내비게이션, 도합 17개 스피커의 렉시콘 프리미엄 사운드, 어라운드 뷰, 기아차 최초로 스마트폰으로 원격시동, 온도조절 등을 할 수 있는 텔레매틱스 시스템 'UVO'를 선보인 것도 좋은 구성이었습니다.

고급차의 트레이드마크인 아날로그 시계도 빠짐없이 챙겼고 BMW의 'i-Drive'처럼 하단 콘솔에 마련된 조그 다이얼로 대부분의 기능을 조작할 수 있게 정돈된 분위기를 만들어냈죠.

뒷좌석 역시 차급에 어울리게 꾸며졌습니다. 질 좋은 가죽으로 감싼 폭신한 시트와 넉넉한 크기의 헤드레스트는 소비자들의 입맛을 저격했고, 열선 및 통풍 시트, 측면 및 후방 블라인드와 전동 리클라이닝, 독립식 공조장치 등 전작의 호화 사양은 물론 B필러 에어벤트까지 추가로 마련돼 더욱 쾌적한 공간을 제공했습니다. 상석에는 버튼 하나로 편안한 자세를 만들어주는 원터치 릴렉스 모드와 함께 등받이에 공기주머니를 추가해 허리를 편안하게 받칠 수도 있었어요.

또 뒷좌석 승객을 위한 모니터가 1열 뒷부분에 각각 하나씩 마련됐는데, 사실 가격만 비싸고 사용 빈도가 높지 않은 옵션 중 하나지만 럭셔리 세단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죠. 어렸을 때는 왜 이렇게 TV 달린 차들이 멋져 보였는지 모르겠어요. 또 최고급형에는 K7과 오피러스에서 먼저 선보였던 관광버스에서나 보던 대형 무드 조명을 달아 야간 운행 시 색다른 즐거움을 준 것도 신선했죠.

다만 아쉬움도 있었어요. 기아가 하이글로시에 미쳐있던 시절에 나온 차답게 우드그레인 대신 폭넓게 쓰인 하이글로시 패널은 먼지와 스크래치에 취약했고, 버튼의 작동 질감 같은 디테일도 예상했던 것 보다는 좋지 않았습니다. 분명 많은 부분에서 한 차원 진보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곳곳에서 어디선가 본 듯한 디테일을 짜깁기해 만들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은 실내 역시 마찬가지였고, 이중접합 유리도 안에서 나오는 비아냥까지는 막아줄 수 없었어요.

파워트레인은 현대기아차 고급 제품들이 공유하는 V6 3.3L, 3.8L 람다 GDI 가솔린 엔진, 독자 개발한 신형 파워택 8단 자동 변속기가 매칭 됐습니다. 두 가지 모두 앞서 제네시스의 페이스리프트 모델에 적용됐던 사양으로 뛰어난 정숙성과 적당한 힘, 차급을 감안하면 준수한 연비를 제공했습니다. 변속기의 성능이나 신뢰도는 기존에 사다 쓰던 아이신이나 'ZF' 물건에 미치지 못했지만, 독자 개별 후륜구동 변속기, 무엇보다 '8단'이라는 것에 의미가 있었죠.

호기롭게 독일 프리미엄 수입차를 경쟁 모델로 지목한 만큼 일명 '물침대'라고 불리는 한국식 좋은 승차감의 전형이었던 오피러스나 에쿠스와 달리 의외로 단단하게 세팅됐고, 후륜구동에 전자제어 에어서스펜션까지 더해 한 단계 진보한 주행감각을 제공했습니다. 여기에 운전석 시트에 진동 알림 기능을 더한 차선이탈 경보(LDWS)와 후측방 경보(BSD), 차간거리 조절과 완전 정차를 지원하는 어드밴스드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을 적용하는 등 주행안전 및 편의사양도 충실하게 갖췄죠.

다만 어디까지나 국산차로써 발전했을 뿐 오피러스나 K7보다야 훨씬 나았지만, 여전히 '수입차에 비할 바는 아니다'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특히 고속 주행 안정성 부분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어요.

이 밖에 에쿠스와 동급이라는 점을 내세운 것과 달리 8기통 라인업을 배제한 것 역시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습니다. 어차피 최상위 모델로서 판매량이 저조한 것은 자명한 일이었지만, '상징성'의 의미가 있는 8기통 라인업의 부재는 에쿠스와의 판매 간섭, 한마디로 모기업의 눈치를 봤다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어요. 심지어 SUV 모 하비에도 8기통 엔진이 탑재됐었는데 플래그십 K9에 없는 게 말이 안 됐죠.

본 콘텐츠는 해당 유튜브 채널의 이용 허락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2014년에는 많은 비판을 받은 전면부를 의식해 범퍼 및 그릴, 램프 구성 같은 소소한 디테일을 수정하고 옵션 구성을 달리한 연식 변경 모델이 출시됐습니다. 수출 사양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긴 했으나 플래그십 세단이 출시 1년 만에 외관을 변경하는 건 꽤나 이례적인 일인데다 신형 제네시스를 의식해 일반형 썬루프를 파노라마 썬루프로 변경한 것, 전동식 트렁크 등 고급 장비를 기본 적용하면서도 시작 가격을 낮춘 것이 핵심이었지만, 이 미미한 변화만큼이나 판매량의 변화 역시 미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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