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소 화장품 전성시대 2010년대까지만 해도 대기업 2곳이 90% 가까이 점유하던 화장품 수출시장에서 중소기업(인디브랜드)들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올 상반기 화장품 수출시장에서 인디브랜드 비중은 68.7%에 이른다. 중소기업의 기적이다. 올리브영 등 드럭스토어의 부상과 소셜미디어를 통한 글로벌 마케팅, 비중국 시장 진출 등이 맞물린 덕분이다. 대기업도 인디브랜드를 인수하며 트렌드에 적극 대응하고 나섰다.
2일 오전, 서울 중구 명동의 올리브영 명동타운점은 이른 시간임에도 쇼핑 삼매경인 외국인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매장에는 일본, 동남아시아 등지의 외국인 손님이 90% 이상이었다. 친구와 함께 한국을 찾은 일본인 히나키씨는 “요즘 일본에서 가장 인기 많은 달바 미스트를 구매하기 위해 왔다”며 한국 화장품과 영양제가 가득 담긴 쇼핑백을 내보였다. 매장의 한 직원은 “최근 외국인 문의가 가장 많은 파운데이션 제품은 힌스의 블루 쿠션”이라며 “과거에는 판매량이 많은 제품을 무조건 구매했는데, 지금은 한국인도 잘 모르는 제품을 제품번호까지 외워와 찾곤 한다”고 설명했다.
아모레퍼시픽 등 대기업이 인수 나서
아모레퍼시픽·LG생활건강이 이끌었던 한국 화장품시장(K-뷰티)에 달바·넘버즈인 등 낯선 이름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전성기를 맞고 있다. 고급스러운 디자인과 한방 원료로 외국인을 사로잡았던 과거와 달리 기초·색조 등 특정 기능을 위주로 개발하는 인디브랜드(신생 중소업체)가 K-뷰티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올 상반기 대기업의 화장품 수출액은 지난해 상반기보다 23% 역성장했으나 중견기업은 16.3%, 중소기업은 30.8% 증가하면서 상반기 기준 역대 최고 실적을 기록했다. 뷰티업계의 한 관계자는 “중소기업계 상황이 좋지 않은데 뷰티 업체들은 딴판”이라고 전했다.
과거에도 중소 브랜드는 심심찮게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대기업에 밀려 사라지기 일쑤였다. 그랬던 중소 브랜드가 호황을 맞이한 건 유통 채널이 온라인·드럭스토어로 집중되면서 인지도가 낮은 제품도 쉽게 시장에 침투할 수 있게 된 영향이 컸다. 전국 1000여 개의 드럭스토어 유통망을 확보해 매장 없이도 오프라인 판매가 가능해졌고, 자체 세일 등으로 고객을 유인하게 된 때문이다.
이해니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인디브랜드는 고정비가 많이 드는 점포 출점 대신 올리브영 같은 드럭스토어 입점을 선택해 접근성, 인지도를 올리고 있다”며 “높은 수수료를 감수하고서라도 올리브영에 입점했던 것이 성장에 큰 역할을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올리브영 운영사인 CJ올리브영 측은 “지난해 연 매출 100억 이상 브랜드 중 절반(51%)이 국내 인디브랜드였다”며 “8~9월 세일기간에도 넘버즈인, 바이오던스, VT 등 입점한 지 5년도 안 된 신생 브랜드가 외국인 구매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고 밝혔다.
드럭스토어를 통해 점차 인지도를 쌓던 인디브랜드는 인스타그램 릴스나 유튜브 쇼츠, 틱톡 등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해외에 이름을 알리면서 수출 물꼬을 텄다. 대기업 브랜드처럼 현지 유통망을 구축하거나 고액의 전광판 광고에 힘을 쏟는 대신, SNS 인플루언서를 통해 브랜드 인지도를 쌓아 충성 고객을 확보한다는 전략이 먹힌 것이다. 이 덕에 마스크팩을 만들어 파는 바이오던스는 아마존 뷰티 마스크팩 부문 1위를 달리고 있다. 바이오던스는 2021년 뒤늦게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홍보 영상 등이 틱톡과 같은 SNS에서 1400만 회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며 북미와 일본 마스크팩 시장을 장악했다.
트렌드 주기 빨라 ‘반짝 인기’ 우려도
K-뷰티 주요 수출국이던 중국 대신 미국이나 동남아 등 틈새시장을 확보한 것도 주요했다. 2010년대 중국 보따리상이 주를 이루던 화장품 수출은 코로나19 이후 아마존 등 플랫폼을 통한 개인 역직구 형식으로 변화했는데, 이러한 시장 변화에 인디브랜드가 발 빠르게 대응한 것이다. 약 200개의 인디브랜드의 기업 간 거래(B2B)를 중개하는 실리콘투 관계자는 “중국에서의 중간 벤더 유통은 지속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 비중국으로 시선을 돌린 것이 시장에 먹혔다”며 “최근에는 미국을 넘어 유럽, 중동까지 새로운 시장을 계속 발굴하고 있다”고 전했다. 올해 7000억원대의 매출을 전망하는 실리콘투는 연중 주가가 450% 상승해 상반기 국내 증시에서 가장 높은 주가 상승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렇다 보니 인디브랜드의 몸값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최근에는 아모레퍼시픽 등 대형사가 인디브랜드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아모레퍼시픽은 지난해 더마 개발·판매사인 코스알엑스 지분을 추가 인수하면서 자회사로 편입시켰다. 그 사이 매출액이 300% 이상 성장하며 모기업의 부진을 상쇄하고 있다. 대형사들은 인디브랜드가 인수 후에도 브랜드 고유의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독립경영을 보장하고 있다. LG생활건강은 지난해 색조 전문 브랜드 힌스 개발·판매사 비바웨이브를 인수하며 “독립경영 체제를 통해 브랜드 고유 특성을 발전시키겠다”고 밝힌 바 있다. 영 뷰티 브랜드 어뮤즈를 인수한 신세계인터내셔날도 “고급 고가 라인에 치중된 브랜드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하기 위해 인수를 결정했다”며 “젊은 감각으로 빠르게 제품을 개발하는 게 인디 브랜드의 강점이다 보니 대기업 시스템 대신 독립경영을 존중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일각에선 뷰티 트렌드가 자주 바뀌는 만큼 인디브랜드의 인기 또한 ‘반짝’ 유행으로 끝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하지만 시장에선 4분기 미국의 블랙프라이데이와 연말 특수, 신규 시장 개척 덕에 당분간 인디브랜드 인기가 지속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박종현 다올투자증권 연구원은 “글로벌 소비 약세에 저가 제품이 인기를 끌게 되면서 국내 중저가 브랜드들이 혜택을 받고 있다”며 “(주 타겟인) 북미 시장을 중심으로 가성비 인디브랜드 제품들이 견조한 성장세를 이어나갈 전망”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