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희 선생에 관한 작은 기억 한 토막[노원명 에세이]

노원명 기자(wmnoh@mk.co.kr) 2024. 9. 22.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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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필자와 인터뷰 하던 당시의 남재희
“노형, 충청도 사람들이 왜 말이 느린지 아시우? 삼국시대 때 일인데 충청도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번갈아 차지한 땅이었거든. 어제오늘 주인이 다른 거야. 누가 와서 “너 고구려여?” 혹은 “너 신라여?”하고 물으면 답변을 잘해야 해. 까딱하면 죽으니까. 그러니 답변이 한도 없이 늘어지는 거지. 충청도 사람들이 속에 있는 얘기를 안 하는 기원이 그래.”

지난 추석 연휴 때 남재희 선생의 작고 소식을 듣고 작은 일화가 떠올랐다. 2017년 여름, 남 선생이 저녁을 청해와 서울 프레스센터 중식당에서 한번 뵌 적이 있다. 충청도 출신인 선생께서 느린 충청도말의 기원에 대해 우스개를 했던 기억이 난다. “어디서 한번 들어본 것 같군요”하고 대꾸했더니 선생은 “그거 내 이론이여. 내가 처음 말해서 퍼진 거여” 하신다. ‘그거 내가 처음 썼다’는 ‘그 친구 내 기사 때문에 유명해졌다’와 더불어 기자들이 별 양심의 가책 없이 쓰는 말로 일종의 직업병이다. 귀담아듣지 말고 재미있게 들으면 된다. 그러나 상대는 남재희다. 문주(文酒) 편력이 반세기가 훌쩍 넘어서는 전설의 논객. 그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충청도 말투의 기원에 대해 나는 앞으로도 ‘by 남재희’ 크레딧을 달아 계속 전파하고 다닐 것이다.

남선생이 내게 저녁을 청했던 것은 그 전에 한면짜리 인터뷰가 나갔기 때문이다. 나는 내심 ‘잘썼다’는 칭찬을 기대했으나 기사에 대한 언급은 없었고 사진 위주로 편집된 앙코르와트 영문 안내서 한권을 편집국으로 보내왔다. 대단한 장서가였던 그는 생전에 장서 중 1만여권을 후배들에게 뿌린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1만권 중 한권의 수혜자가 되는 영광을 베푼 셈이다. 그런데 왜 앙코르와트였을까. 공부에는 영 취미가 없어 보이니 사진이나 감상하라는 뜻이었을까.

내가 남선생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2002년 그가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에 ‘남재희 회고-문주 40년’을 연재할 때였다. 우연히 그 글을 읽고 반해 버렸다. 술과 인물이 주제이므로 웬만하면 재밌을수 밖에 없지만 저만큼 재미있게 쓸 사람은 남재희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인물편력은 거의 발자크급이어서 진영과 출세의 크기를 가리지 않는다. 일국의 대통령에서 실패한 진보 혁명가, 망명객, 가난한 문인, 술집 주인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배역이 등장하는 인간희극을 논픽션으로 쓴 글이 문주 40년이다.

남선생 글의 힘은 추종을 허락하지 않는 교유와 경험의 폭에서 나오는 것이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문장이 좋다. 나는 그의 교유를 추종할 자신은 애당초 없었고 다만 그 문장을 흉내 내 보려는 시도는 한 적이 있다. 일종의 사숙(私淑)인 셈인데 예전의 도리로 치면 그것도 사제의 연이다. 따르는 것은 자유이나 성취는 천품의 한계에 구속되는 것. 대붕을 우러르는 연작의 슬픔은 겪었으되 그래도 약간의 발전이 있었다면 선생을 사숙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1934년생인 그는 내 선친과 동갑이었고 내 첫 직장의 선배이기도 했다. 그가 1958년 입사, 내가 1999년 입사이니 무려 41년 차이다. 2017년의 인터뷰는 그 오랜 존경 혹은 팬심이 작동한 결과였다. ‘인터뷰 한번 했으면 한다’고 문자를 넣었더니 ‘나를? 뭐 하러? 굳이 하시겠다면 프레스센터로 오시우’한다. 그때 선생은 이미 83세 고령이었다. 인터뷰 전에 사진 촬영을 위해 자리를 옮기는데 송구한 마음이 들 정도로 거동이 불편해 보였다. 문주 반세기의 전설적 문객과 술한잔 하기는 글렀구나 실망했는데 기사가 나간 후 ‘한잔하자’고 연락이 온 것이다. 내 청춘의 어느 시점, 어느 여인과의 기억을 되돌려도 남선생을 뵈러 가던 택시 안에서 느꼈던 흥분과 긴장에 비할 설렘은 없었다.

연태고량주 중간치를 시켰는데 선생은 많이 드시지 못했고 선생의 청주고 후배인 MBN 정운갑 선배와 내가 주로 비웠다. 더 이상 고기를 씹지 못하는 사자 앞에서 늑대가 까부는 상상을 하고 혼자 웃었다. 그게 벌써 7년 전이다. 그 후로 한두 번의 문자 교환이 있었을 뿐이다. 불과 한 번의 인터뷰, 한 번의 저녁을 했을 뿐이지만 내 기자 인생에서 선생은 중요한 사람이었다. 인터뷰를 하면서 그의 문장 비결을 물었다. 대답이 이랬다.

“내 친구 이어령은 천재적으로 글을 잘 쓴다. 섬광 같은 아이디어를 유려한 필체로 참 쉽게도 풀어낸다. 고은의 시도 대단하다. 이들에 비하면 나는 글을 쓴다고 말하기 어렵지. 다만 저널리스트의 글은 미문이 아니라 논리가 견고해야 한다. 내가 평생 모은 책이 7만권쯤 된다. 영문잡지 타임을 대학 입학 후 지금까지 평생 읽었고 뉴욕타임스를 매일 정독한다. 논리가 견고하려면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남재희도 천재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나면 선생의 글을 다시 다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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