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쉬었음' 시대, 치열한 '흑백요리사'는 왜 흥행할까

박꽃 이투데이 문화전문기자 2024. 9. 30.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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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꽃의 영화뜰]

[미디어오늘 박꽃 이투데이 문화전문기자]

▲ 넷플릭스 예능 프로그램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스틸컷. 사진= 넷플릭스

※ 주의 :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주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3년 이상 취업하지 않았다' 23만 명. 특별한 구직활동 없이 '그냥 쉬었다' 8만 명.

지난달 통계청 조사 결과다.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청년, 즉 29세까지의 우리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23만 명과 8만 명이 어느 정도 규모인지 쉽게 가늠되지 않는다면, 지난해 출생아 수가 23만 명인 걸 떠올려볼 만하다. 매해 새롭게 태어나는 생명과 동일한 규모의 청년 집단이 졸업 후에도 3년 넘게 일하지 않고 집에 있었다는 얘기다. 적극적으로 취업 시장의 문을 두드렸음에도 실패한 경우도 물론 있겠지만, 별다른 구직 활동 없이 아예 경쟁 바깥으로 물러나 '그냥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는 이들도 전체 중 30%(8만 명)나 된다. 그야말로 '무기력의 시대'라고 정의할 만한 지표다.

그런데 대중문화 콘텐츠의 흥행을 살펴보다 보면, 이런 무기력의 시대를 역설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흥미로운 실마리를 포착하곤 한다. 최근 넷플릭스의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과 같은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얻는 사례는 특히 그렇다. 자의든 타의든 맥없이 꺾여버린 하루를 보내는 젊은 세대가 넘쳐나는 시대에 그 누구보다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요리를 만들며 상대와 경쟁하는 요리인들의 서사가 큰 사랑을 받는다면 어떤 이유 때문일까. 심지어 젊은 세대가 주로 향유하는 1분 전후의 숏폼 콘텐츠로 심사위원 백종원 대표와 안성재 셰프의 출연 장면이 반복 노출되고 수백만 조회수로 큰 호응을 얻고 있다면, 그 모순적인 현상 이면에 어떤 숨은 맥락이 있는지 살펴볼 만한 일이다.

▲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왼쪽)와 안성재 셰프. 사진=넷플릭스 제공

'흑백요리사'의 흥행 요인 중 가장 중요하게 손꼽을만한 건 '수긍할 수 있는 경쟁 방식'을 제시했다는 점일 것이다. 제작진은 첫 번째 대결에서 이미 유명한 반열에 오른 백수저 요리인 20명의 생존권은 보장한 반면, 아직 이름을 알리지 못한 흑수저 요리인 80명은 자신들끼리 경쟁해 한 단계를 살아 올라오도록 설계했다. 이른바 흑수저 결정전이다. 이때 상위 20%가 전체 생산량의 80%를 차지한다는 파레토 법칙이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만큼, 백수저와 흑수저를 2:8 비율로 구성한 대목은 사회 통념을 반영한 현실적인 설계라고 볼 만하다. 백수저들이 “업계에서 당당히 이뤄 놓은 것이 있다”, “몇십년간 열심히 해와서 이 자리를 얻은 것”이라는 자부심을 거리낌 없이 표하는 배경이기도 할 것이다.

인상적인 건 흑수저들의 태도다. “계급이 나뉜 것 같다”, “갈등을 조장하는 것 같다”는 불편함을 솔직히 표하기도 하지만 '규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지금 자리를 떠나도 좋다'는 안내에도 자리를 박차고 나서지는 않는다. 백수저들이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게 좀 불만스럽긴 해도, 자기 이름을 건 식당을 운영하거나 세계적인 요리 대회에서 우승하며 경력을 갈고 닦은 이들의 객관적 성취에 비견해보면 이 정도 차별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전제조건을 수용한 흑수저들은 열과 성을 다해 자신의 자격을 검증해 보이고, 이 과정에서 살아남은 건 고급 요리교육을 받은 이가 아니라 만화책을 보고 중식을 배운 '만찢남'이나 초등학교 급식 만들어온 중년의 '급식대가' 같은 무명의 실력자다.

▲ 넷플릭스 예능 프로그램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스틸컷. 사진=넷플릭스 제공

이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흑백요리사'의 힘은 일단 본게임에 올라설 자격을 인정받은 이들에게는 '계급장 떼고' 대결하는 공정한 게임의 규칙을 보장하기로 결정하는 데 있다. 살아 올라온 흑수저는 자신을 내려다보던 백수저와 1:1로 대결할 기회를 얻고, 심사위원은 백수저의 명성이나 화려한 플레이팅 기술에 현혹되지 않은 채 오직 맛으로만 평가하기 위해 두 눈을 가린 채 시식하게 된다. 결과는 헉 소리가 날 정도로 충격적이다. 50년 경력의 중식 대가인 여경래 셰프를 무찌른 건 홀로 레시피를 개발한 이름 모를 '철가방 요리사'고, 한식 재료를 활용한 음식으로 미슐랭 1스타의 영예를 누려온 조셉 리저우드 셰프에게 패배를 안긴 건 간절함 그 자체로 똘똘 뭉친 청년 '요리하는 돌아이'다. 승리한 흑수저 당사자가 생존의 크나큰 기쁨을 누리는 건 물론이고, 공정한 경쟁으로 서로의 자리가 뒤바뀔 수 있다는 '계급 이동'의 가능성을 목격한 시청자 역시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끼게 된다.

'흑백요리사'는 요리라는 특정한 소재를 활용한 예능 프로그램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다수가 수긍할 수 있는 비교적 공정한 경쟁의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대중문화 콘텐츠로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다.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 업계에서 명성을 쌓고 상위권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맞붙어 싸워야 하는 이들의 삶 속에서 특히 입지가 취약할 수밖에 없는 젊은 세대가 초장부터 지쳐 떨어져 나가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번 흥행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는 시대적 욕망은 분명하다.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의 차별'과 '공정한 경쟁'만 전제된다면 여전히 열성적으로 게임에 뛰어들 플레이어는 많다는 사실이다. 무기력의 시대를 달리 읽어볼 수 있는 접근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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