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셔로》, 짠 내 가득한 슈퍼히어로의 세계

정덕현 문화 평론가 2026. 1. 3.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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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슈퍼히어로, 서구와는 왜 이렇게 다를까
판타지에 스며든 한국 사회의 치열한 생존 조건

(시사저널=정덕현 문화 평론가)

최근 넷플릭스에 공개된 시리즈 《캐셔로》는 돈이 있어야 초능력도 쓸 수 있는 한국 청춘의 현실을 담아낸 슈퍼히어로물이다. 한국형 슈퍼히어로는 이처럼 서구의 슈퍼히어로들과는 어딘가 다른 결을 보여준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현대사회에서 초능력보다 더 센 게 뭔지 알아? 능력이야."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캐셔로》에서 빌런 조안나(강한나)는 불을 쓰는 초능력자 이화진(조보아)이 공격하려 하자 우산을 쓰며 그렇게 말한다. 마침 내리는 비. 알고 보면 위층에서 조안나의 부하들이 물을 분수처럼 뿌리고 있다. 결국 이화진이 손으로 만들어낸 불은 그 물에 꺼져버리고, 그녀는 끝내 조안나에게 제압당한다.

드라마 《캐셔로》 스틸컷 ⓒ넷플릭스

"초능력보다 더 센 건 '능력'이야"

'초능력보다 센 능력'. 이것은 《캐셔로》가 구축한 한국형 슈퍼히어로물의 독특한 세계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문장이다. '캐셔로'란 돈을 뜻하는 '캐시(cash)'에 '히어로(hero)'를 결합한 제목으로, 짠 내 나는 슈퍼히어로 강상웅(이준호)의 처지를 압축해 설명한다. 그는 엄청난 괴력을 쓰는 초능력을 아버지로부터 유산처럼 물려받았지만, 그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현금이 필요하다. 즉, 초능력을 쓸수록 돈이 빠져나가고, 누군가를 도와줄수록 그는 가난해지는 기막힌 처지의 슈퍼히어로다.

어떻게든 돈을 모아 빚을 내서라도 아파트 한 채를 분양받아 함께 사는 것이 목표인 그의 여자친구 김민숙은 이 사실을 알고 난 뒤 강상웅에게 절대 초능력을 쓰지 말라고 당부한다. 주머니에 현금을 들고 다니지 말라는 것이다. 돈이 없으면 초능력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가 곗돈 3000만원을 쥐여준 날, 강상웅은 눈앞에서 버스가 다리 난간 아래로 떨어질 위기에 처하자 갈등에 빠진다. 돈을 지킬 것인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할 것인가.

《캐셔로》에는 강상웅 외에도 초능력자들을 사냥하는 단체 '범인회'에 맞서는 또 다른 초능력자들이 등장한다. 이들 역시 아무 조건 없이 초능력을 쓸 수는 없다. 변호인(김병철)은 벽을 통과하는 초능력을 지녔지만, 이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술을 마셔야 한다. 그래서 그는 간암 말기 판정을 받게 된다. 방은미(김향기)는 염력을 사용할 수 있지만, 이를 위해 끊임없이 칼로리를 섭취해야 한다. 그래서 늘 빵을 끼고 다닌다.

이들이 초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조건인 돈과 술, 그리고 빵은 사실 능력 위주의 생존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한국 사회의 현실과 맞닿아 있다. 돈이 있어야 아파트 분양이라도 시도해볼 수 있다. 술에라도 취해야 답답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호기로워질 수 있다. 빵이라도 먹어야 당장의 스트레스를 달랠 수 있다. 초능력이라는 판타지를 사용했지만, 그 전제 조건은 너무나도 현실적이다.

드라마 《무빙》 포스터 ⓒ디즈니+

'히어로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슈퍼히어로물'이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능력, 즉 능력(슈퍼)으로 영웅적인(히어로) 액션을 보여주는 장르를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캐셔로》 역시 초능력이 등장하고, 때로는 영웅적인 액션 장면이 펼쳐진다는 점에서 슈퍼히어로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장르가 통상 보여주는 성장 서사나 현실을 훌쩍 뛰어넘는 카타르시스 액션의 느낌과 정서를 떠올려보면, 《캐셔로》는 분명 그 결이 다르다.

굉장한 성장 서사보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일상의 삶이 중심에서 펼쳐지고, 카타르시스 액션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위에는 짠 내 가득한 페이소스가 덧씌워진다. 버스를 끌어올리고, 화재로 무너지는 천장을 두 팔로 들어올리는 괴력을 발휘할 때마다 강상웅의 주머니에서는 돈다발이 빠져나가고, 개평처럼 몇 푼 안 되는 동전이 바닥에 떨어진다. 슈퍼히어로적 쾌감과 지극히 현실적인 청춘의 짠 내가 한 장면 안에서 겹친다. 이쯤 되면 이 작품을 과연 슈퍼히어로물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맞다. 이건 차라리 현실 풍자 코미디에 가깝다.

생각해 보면 최근 들어 시각특수효과(VFX) 기술의 발달로 판타지 액션 구현이 더 많이 가능해지면서 등장한 한국형 슈퍼히어로물에는 예외 없이 이 '짠 내'가 스며있다. 강풀 원작의 《무빙》을 떠올려보라. 초능력자들은 자신들을 붙잡아 이용하려는 안기부의 시선을 피해 치킨집이나 돈가스집을 운영하며 살아간다. 자칫 정체가 드러나면 안기부에 끌려가 북한의 초능력자들과 싸워야 하는 처지에 내몰린다(북한 측 초능력자들도 마찬가지다). 초능력자라는 존재에 남북 분단이라는 한반도의 대치 구도를 넣었을 때부터 이들의 짠 내 나는 삶은 예고돼 있었다.

영화 《하이파이브》 포스터 ⓒ(주)NEW

평범 이하의 인물들이 어느 날 초능력자의 장기를 이식받으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영화 《하이파이브》도 크게 다르지 않다. 건물을 뛰어넘을 정도의 괴력을 가진 태권 소녀 완서(이재인)를 지켜주는 존재는 태권도장을 운영하지만 별다른 전투력은 없는 평범한 아빠(오정세)다. 이 작품에서 딸을 향한 부성애는 초능력보다 더 센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드라마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에서는 슈퍼히어로 장르에 대한 현실의 개입이 한층 더 풍자적으로 드러난다. '현대병에 걸린 슈퍼히어로'라는 독특한 설정 아래 예지몽을 꾸지만 불면증에 시달리고, 공중 부양 능력이 있지만 비만으로 날지 못하며, 과거로 돌아갈 수 있지만 트라우마에 갇혀 능력을 쓰지 못하고, 눈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지만 스마트폰 중독으로 그 힘을 잃은 초능력자들이 등장한다.

드라마 《히어로는 아닙니다만》 포스터 ⓒJTBC

초능력이라는 판타지를 덧씌웠지만, 그 실체는 불면증, 비만, 트라우마, 스마트폰 중독 같은 현대인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현실을 풍자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장치에 가깝다. 그래서 이들이 다시 능력을 되찾게 되는 과정 역시 아무런 능력이 없어 보이는 평범한 인물이 이들의 삶에 들어오면서 생기는 변화에서 비롯된다. 평범함이 비범함을 앞서는 이야기인 것이다.

현실의 무게를 잊지 않는 한국형 히어로

그렇다면 왜 한국형 슈퍼히어로들은 이토록 현실의 무게 안에 머물러 있을까. 그건 한국의 대중이 마주한 현실의 무게가 그만큼 크다는 방증이다. 하늘을 날아다니며 지구는 물론 우주까지 구하는 슈퍼히어로의 이야기는, '저 미국의 이야기는 그런가 보다' 하며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이라는 땅에 발을 딛고 선 슈퍼히어로가 그런 서사를 펼친다면, 어딘가 뜬금없고 황당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대중이 슈퍼히어로들에게 원하는 것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지구나 우주를 구하기보다는 우리 동네를 구하는 슈퍼히어로를 원하고, 그중에서도 가족을 구하는 것이 세상을 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오래된 가족주의의 잔상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재난과 사고 앞에서 가족을 잃는 경험을 너무 자주 해온 사회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일상 속에서도 늘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그 결과 한국형 슈퍼히어로들은 남북 분단 상황의 불안을 다룬 《무빙》, 갑자기 들이닥친 강제 철거의 폭력을 표현한 《염력》, 부동산 광풍에 영끌하게 되는 무주택자의 불안을 담은 《캐셔로》, 갖가지 사건들로 인한 심적 트라우마와 스트레스로 생기는 현대병을 그린 《히어로는 아닙니다만》 같은 작품들 속에서 등장한다.

물론 《캐셔로》 같은 작품을 전통적인 슈퍼히어로 장르의 문법으로만 바라본다면 어딘가 김 빠진 사이다 같은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슈퍼히어로물의 외피를 쓴 한국적 현실 풍자 코미디로 바라본다면, 전혀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짠 내는 풀풀 나지만, 그래서 인간적인 맛이 느껴지게 될 것이다. 하늘을 훨훨 날기보다는 땅에 발을 딛고 서있는 초능력자들이 만들어내는 의외의 맛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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