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에 희생된 인천의 근대 건축물들

[최성호의 사람 사는 건축]
개화항구 인천, 서구식 건축 많아
존스톤 별장·오례당, 최고 가옥 1,2위
일본은행들 인천지점 건물 3개 남아있어
공화춘 등 차이나타운 관련한 건물들도

사라진 건물들

우리나라에 현재 남아있는 근대 건축물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때 지어졌다. 나이 50대인 시민들만 해도 과거 일본이 지은 학교에서 공부했던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서구 문물을 우리가 자주적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식민지화됐기 때문이다. 서양인 주택은 얼마 안 돼 찾아보기 어렵지만 일본인 주택은 적산가옥(敵産家屋)이란 이름으로 남아 7,80년대까지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거주했다. 그리고 관공서, 은행, 학교 등은 최근까지 사용됐다. 그만큼 일제강점기는 우리 생활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1918년직후의 인천 지도.

인천에도 다양한 건축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인천 중구는 과거 조계지였던 곳이니 일본과 중국 건물, 그리고 서양인 건물이 집중적으로 있었다. 일본 제18은행지점(시유형문화유산 제50호)이었던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에 모형 전시돼있는 건축물을 보면 다양한 건축물들이 보인다. 그 중 많은 건물이 사라지고 없다. 한국전쟁 그리고 도시가 개편되면서 건물이 사라져 이젠 몇몇 개만 남았다. 사라진 건물 대부분은 일본인 주거 건물이나 외국인 주거건물이다.

1900년대 인천부 본정의 가로 풍경
1900년대초 일본 영사관

조계지에는 일본, 청, 영국 영사관이 있었다. 일본 영사관은 현 중구청 자리에 있었는데 1933년 인천부청사(현 중구청사)가 지어지면서 자취를 감췄다. 청나라 영사관은 현 화교학교 자리에 있었는데 중일전쟁 발발직후인 1938년 장개석 당시 중국 총사령관이 영사관을 폐쇄토록 하면서 사라졌다. 회의청(會議廳) 건물이 화교학교 내에 남아있을 뿐이다. 영국 영사관은 구 올림포스호텔 자리에 있었다. 영국 영사관은 1884년에 소규모 목조건물로 지어졌던 것을 1900년 초에 확장해 벽돌조로 지어졌다. 영국 영사관은 자국 영사업무 뿐아니라 조계지내 다른 외국인의 영사업무도 담당했다.

인천 존스톤 별장. 사진=인천개방박물관/인천투데이
세창양행 사택. 1950년 인천상륙작전 때 함포에 맞아 소실됐다.

외국인들의 건물들 중에는 존스톤 별장, 알렌 별장, 세창양행 사택, 오례당 등이 있었다. 그들 건물은 일제강점기 때 일종의 랜드마크 역할을 했다. 높은 건물도 없고 응봉산 위에 세워진 서양풍의 건물이었으니 그 역할이 분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건물도 한국전쟁을 거치며 대부분 없어졌는데, 다시 되살아난 것도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인 대불호텔(1887년)이다. 일본인 호리가 지은 이 호텔은 처음에는 일본식 건물로 영업을 시작했다가 옆 대지에 서양식 건물을 신축해 영업을 확장했다. 그러나 1899년 경인선이 부설되면서 경영이 어려워 매각돼 중화루라는 중국음식점으로 쓰이다가 1978년대 헐렸다. 그런데 최근에 복원해 ‘대불호텔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중국인 출신 통역사인 오례당의 집 '오례당'.
대불호텔 전시관. 사진=한국관광공사

남아있는 건물들

침략과 전쟁의 혼란 통에 건물이 살아남는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다. 건물은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여지없이 사라진다. 지금까지 있다는 것은 어쨌든 건물로서의 활용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살아남은 건물 이력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현재 남아있는 인천의 건물들 중 주목해볼 것은 은행건물들이다. 현재 제58은행 인천지점(시유형문화재 제19호), 제18은행 인천지점(시유형문화재 제50호), 제1은행 인천지점(시유형문화재 제7호)이 남았다. 1890년에 개설한 제18은행 인천지점은 나가사키의 지역사람들이 인천에서의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자 상인을 따라와 인천에 지점을 둔 것이다. 오사카에 본점을 둔 제58은행은 인천 전환국에서 주조되는 신화폐와 구화폐의 교환 목적으로 설립된 은행이다. 이외에도 중국계 은행과 러시아 은행, 조선인이 세운 은행이 있었으나 곧 문을 닫았을 만큼 활발하지 못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일본계 은행이 세 곳 남아있을 수 있었다.

일본 제58은행 인천지점은 일본 제58은행이 개화기 인천에 설치한 지점이다. 인천광역시 중구 신포로23번길 69-1에 있다.
일본 제18은행 인천지점은 일본 제18은행이 개화기 인천에 설치한 지점이다. 인천광역시 중구 신포로23번길 77이다.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은 일본 제1은행이 개화기 인천에 설치한 지점으로 근대건축물이다. 소재지는 인천광역시 중구 신포로23번길 89이다.

은행건물은 다른 건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지어졌기에 오래 살아남았다. 예나 지금이나 자본주의 상징인 은행은 신뢰감을 주기 위해 화려하고 튼튼하게 짓는다. 이 건물들을 보면, 건물을 지은 장인과 함께 집을 지어보고 싶을 정도로 디테일 하나하나에서 정성이 느껴진다. 이 건물은 이젠 은행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제58은행은 한국외식업중앙회 인천중구지부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제1은행은 ‘개항박물관’으로 변신했고, 제18은행은 ‘근대건축전시관’으로 바뀌었다.

다음으로 많이 남은 건물은 창고다. 항구였으니 당연히 창고가 많았을 것이다. 인천은 계속 항구였으니 창고의 효용은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인천항이 대규모 항구로 성장하고 도시가 확장되면서 옛 건물인 이들 창고로서의 가치는 떨어졌다. 제물량로(路)도 옛날엔 갯벌이었으나 매립으로 큰 도로로 확장됐고, 이 때 많은 창고들이 항구에서 멀어졌다. 이런 창고가 목조였다면 세월 탓에 대부분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벽돌로 지어졌고 게다가 평면도 단순해서 다른 용도로 변신하기 쉬웠다. 창고가 바뀌어 하우스맥주 공장이 된 곳도 있지만, 대부분 전시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리고 사무실로 사용하는 곳도 있다.

인천의 '차이나타운'은 여러모로 특별하다. 지금은 인위적으로 치장돼 자연스러운 면이 사라졌지만 어쨌든 중국풍을 느낄 수는 있다. ‘자장면’과 ‘짜장면’ 대결에서 승리한 ‘짜장면’은 나가사키에서 넘어온 짬뽕, 우동과 함께 우리 음식의 일부가 됐다. 차이나타운은 국민음식이 된 짜장면이 이 곳에서 나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역사에서 잊혀져서는 안 될 큰 흔적이다. 차이나타운이 계속 남아있는 것은, 어쩌면 사람의 끈질긴 생존력을 상징하는 예가 아닐까 한다.

청일전쟁 때 잠시 청나라 영사관이 철수했고, 이후 중일전쟁 이후 중국 영사관이 완전히 철수한 이후 화교의 삶은 많이 어려웠을 것이다. 해방 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화교들의 부동산 취득을 금지시켰다. 1999년 IMF외환위기로 투자유치 차원에서 규제가 풀렸지만 이미 화교사회가 무너진 후였다.

의선당

인천시가 차이나타운을 다시 살린 것은 근현대사를 재조명하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시류에 맞춰 차이나타운이 다시 조성됐다. 폐가(廢家) 상태였던 옛날 '공화춘' 건물은 '짜장면 박물관'으로 꾸며지는 등 중국음식점이 많이 들어섰다. 그리고 관음보살, 관우, 마조신 등을 모신 중국 사당인 의선당(義善堂)에서는 중국다움을 느낄 수 있다. 차이나타운은 50대 이상의 중년에게는 옛 추억을, 그리고 젊은 사람들에겐 중국적 흥취를 느끼게 하는 장소라 할 것이다.

개설 초창기의 인천 신포시장.

다음으로 '신포시장'을 빼놓을 수 없다. 신포시장은 건물이 아니라 장소로서 근대 인천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신포시장은 인천 최초의 상설시장으로 개설 시기는 1890년대 말 서울 청파동 사람인 정홍택 형제가 도매시장인 생선전(현 신포동 40번지)과 청나라 사람들이 생선전 동쪽에 푸성귀전을 연 것에서 비롯된다. 푸성귀전은 1933년 일제가 인천부 제2공설시장으로 만들면서 운영권이 일본에게 넘어갔다. 현재 신포시장은 신포만두, 신포 닭강정 등으로 우리 기억에 남았는데 이 가게들 외에도 평일에도 줄을 서는 음식점이 꽤 있다.

눈에 띄는 건물

인천에 지어진 근대 건축물에서 특별히 소개할 건물은 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공화춘, 선광재단 건물, 답동성당이다.

옛 일본 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 옛 일본 우선주식회사(郵船株式會社) 인천지점

일본 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등록문화재 제248호)은 우편기선 미쯔비시 부산지점 인천출장소로 개설된 게 1883년 4월이다. 이어 1885년 공동운수회사가 합병하여 일본우선회사 부산지점 인천출장소로 개편됐다. 다음 해인 1886년 7월 인천지점으로 승격되었다. 청일전쟁(1894년)과 러일전쟁(1904년) 때 이 회사 선박이 병력과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역할을 했다.

이 건물은 1888년에 지어졌는데 인천에서는 가장 오래된 근대건축물이다. 건물 보수하는 중에 지붕트러스에 설치돼있는 상량판이 발견돼 건물 건립연대가 확인됐다. 전면에 포치와 후면부는 나중에 증축된 것이다. 현재 외부에 붙어있는 타일은 인천 중구청 청사의 타일과 같다. 인천중구청은 1960년대 증축을 하면서 벽돌건물이었던 외벽에 타일을 붙였다. 이것으로 볼 때 이 건물 타일도 같은 시기에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공화춘, 짜장면 박물관.

- 공화춘(共和春, 등록문화재 제246호) : 짜장면박물관

짜장면 박물관으로 탈바꿈한 공화춘(共和春)은 중국 산동출신인 우희광(于希光, 1886~1949)이 산동회관이란 이름으로 음식점을 하다가 1913년 개명해 지금까지 이른 것이다. 상호를 공화춘으로 한 것은 손문(孫文)이 1912년 아시아에서 최초로 공화국인 중화민국을 세운 것을 기념하기 위해 ‘共和國的春天到了(광화국적춘천도료, 공화국의 봄이 왔다는 뜻)라고 한 말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공화춘은 짜장면을 개발한 곳으로 알려졌으나, 당시 인천에 있는 중국음식점은 모두 짜장면을 만들었다고 한다.

공화춘은 1917년 현 위치의 땅을 매입하고 영업을 했지만 우희광은 지분으로 참여했다가 본격적으로 이곳에서 공화춘이란 이름으로 영업을 한 것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로 다른 사람의 지분을 매입한 이후로 보고 있다. 이후 우희광의 아들인 우홍장(1917~1993)이 이어받아 사업을 이어갔지만 현 중구청에 있던 인천시청과 미군부대가 이전하면서 영업이 위축돼 1983년 영업을 중단하였고, 우희광은 대만으로 이주했다. 이후 창고로 사용되다가 2012년 짜장면 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건물은 조적조인데 1909년경 지어진 것으로, 후면부는 1940년대 증축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건물은 동원과 서원이 벽을 공유하며 각각이 별도 입구가 있는 건물이었다. 이런 모습이 외관에서 나타난다. 앞에서 보면 입구가 둘인 것이 명확히 보인다. 두 건물 모두 중앙계단을 통해 2층을 올라가도록 했는데 1968년 동원 1층은 주거용으로 2층은 행사장 홀로 개조하면서 계단을 폐쇄했다. 외부에는 타일을 붙였으나 현재는 이를 제거한 상태이고, 동원의 중앙계단을 복원하는 대신 서원 입구를 폐쇄하고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없애면서 둘을 터서 전시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닛센 빌당, 현 선광문화재단 빌딩

- 닛센(日鮮)빌딩, 현 선광(鮮光)문화재단 빌딩

닛센해운회사는 일제강점기인 1925년 설립된 회사로서, 일본식 3층 건물을 사용하다가 1932년에 이 빌딩을 신축하고 이전했다. 철근콘크리트조 4층으로 1층은 거친돌로 마감하고 2층부터는 약간 뒤로 물리는 근대 모더니즘 양식으로 계획했다. 1층 거친돌과 상층부의 매끈한 타일의 대비가 눈을 끈다. 현재 국내에 있는 민간이 세운 근대건축물 중에서 업무용 4층 건축물은 흔하지 않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현재 이 건물 1층은 신축 당시 모습으로 추정되나 상층부 외벽마감이 처음부터 타일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고 한다. 건물은 입구부분이 1934년에 지어진 고베(神戶)의 스미토모(住友)빌딩과 비슷하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 건물이 더 먼저 지어진 것으로 보면 연관성은 없어 보인다. 개인적으로 인천에 남아 있는 근대건축물 중에 이 건물이 가장 건축적으로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인천 답동성당

- 답동성당(사적 287호)

현 답동성당은 두 번째 지어진 것이다. 처음은 고딕식 첨탑을 가진 성당으로 코스트 신부의 설계로 1897년에 완공됐다. 현재 성당은 1937년 다시 지은 것이다. 1933년 신자가 1,500명으로 늘어남에 따라 1935년 성당 증축을 시작하여 1937년 완공했다. 답동성당은 비잔틴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혼합된 형식이다.

답동성당은 프와넬 신부(Poisnel, 1855~1925)의 설계로 1914년에 완공된 전주 전동성당과 유사하다. 전동성당을 모티브로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전동성당이 화려한 반면에 답동성당은 장식들이 많이 생략됐고 첨탑 높이가 더 높아 날씬해 보인다. 원래는 마루바닥이었으나 1974년에는 내부 마루를 걷어내고 인조석 물갈기로 고쳤다. 이때 의자가 놓이는 부분을 한단 높여 놓았다. 1981년에 사적 287호로 지정됐다.

전주 전동성당. 출처=나무위키

답동성당은 건축과정이 흥미롭다. 1935년 증축공사를 할 때 기존 건물은 놔두고 외곽에 다시 벽돌로 벽을 쌓는 방식을 채택했다고 한다. 이렇게 한 것은 증축기간동안 기존 성당을 사용하려는 의도였다. 이런 증축 방법이 가능했던 것은 기존 성당보다 증축성당이 크기 때문에 외벽 공사할 수 있는 공간 확보가 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해체 수리 정도를 해야 어떤 방식으로 공사를 진행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인 최성호는 오랫동안 한옥과 한국문화를 공부해온 건축설계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건축사다. 또 K 리그를 초창기부터 열심히 지켜보며 축구 공부를 한 매니아다. 블로그도 운영하고 있다. 필자의 블로그 주소는 https://blog.naver.com/seongho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