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축구연맹(FIFA) 클럽 월드컵이 막을 올렸다. 미국 11개 도시, 12개 경기장에서 6월 14일부터 7월 13일까지 열린다.
이 대회는 FIFA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글로벌한 상업화'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32개팀으로 확대된 FIFA 클럽 월드컵의 역사를 짚어봤다.

#세계 최고의 클럽은 어디일까? 라는 궁금증
세계 축구 역사는 클럽에서부터 시작됐다. 1863년 영국 런던 프리메이슨 테번 펍에서 런던의 축구 클럽과 학교 축구부 관계자들이 모여 축구협회(The Football Association)를 만들었다. 축구와 럭비가 완전히 분리됐다.
1871년 FA컵이 시작됐다. 1888년에는 풋볼리그가 창설됐다. 여기까지 축구의 무대는 잉글랜드 내부로 한정됐다. 사람들의 궁금증은 발전됐다. 잉글랜드 최고 클럽과 스코틀랜드 최고 클럽간의 대결에 관심이 쏠렸다.
1887년 'the Football World Championship'이라는 이름으로 잉글랜드 FA컵 챔피언 애스턴빌라와 스코틀랜드 컵 챔피언 히버니언이 격돌했다. 권역권 밖 팀들간 타이틀이 걸린 첫 맞대결이었다.
대영제국(정확히는 잉글랜드)의 위상이 커지면서 축구도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등에서도 축구가 성행하기 시작했다. 국내 대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이들 나라 역시 다른 클럽팀들과 우열을 가리고 싶어했다. 국가간 클럽 대항전이 나왔다. 1909년 이탈리아에서 '서 토마스 립턴 트로피(The Sir Thomas Lipton Trophy)가 열렸다. 잉글랜드, 이탈리아, 독일, 스위스 클럽이 참가했다. 이 대회는 1911년에도 열렸다.
1904년 창설된 FIFA는 1930년 우루과이에서 첫 월드컵을 개최했다. 4년 주기로 월드컵을 열면서 명실상부 세계 최대 국가대항전을 성공적으로 런칭시켰다. 그러나 FIFA는 늘 국제 클럽 대항전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현대 축구를 받치고 있는 두 축이 바로 국가대표 축구와 클럽 축구이기 때문이었다.
1950년대 몇몇 시도가 있었다. 1951년 브라질 축구협회가 주도해 '코파 리우(Copa Rio)'라는 대회를 만들었다. 브라질의 팔메이라스와 유벤투스가 격돌했다. 이 경기에 20만명의 관중이 몰렸다. 그러나 이는 FIFA의 인증을 받지 못했다. 여기에 유럽 클럽들도 참가를 꺼렸다. 당시만해도 유럽에서 남미로 넘어가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대회는 1952년까지만 열렸다. 1952년부터 1957년사이 베네수엘라에서 '페케냐 코파 델 문도(작은 월드컵)'라는 이름의 대회가 열렸다. 1958년에는 카라카스에서 비슷한 대회가 열렸다. 그러나 대부분 유럽 2팀, 남미 2팀 정도만 참가한 지역 이벤트성 대회에 머물렀다.

#주앙 아벨란제의 아이디어
1958년 10월. 당시 브라질 축구협회장이었던 주앙 아벨란제(추후 그는 FIFA회장이 된다)는 유럽축구연맹(UEFA)과 남미 축구 연맹(CONMEBOL)을 끌어들여 인터컨티넨탈컵을 만들었다. 유럽 챔피언스리그 우승팀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팀을 격돌시켰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다만 FIFA는 이 대회에 관여하지 않았다. UEFA와 CONMEBOL 사이의 연간 친선 경기로 여겼다.
1960년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대륙 클럽 대항전이 생겼다. FIFA는 이들을 데리고 인터컨티넨털컵과 합쳐 다대륙 대회를 개최하고자 했다. 그러나 UEFA와 CONMEBOL이 거부했다. 유럽과 남미에게 아시아와 아프리카 축구는 자신들과 겨룰만한 수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1974년 아벨란제가 FIFA 회장이 됐다. 그는 클럽 월드컵 창설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현실화는 어려웠다. 유럽과 남미 그리고 제3세계 간의 입장과 이익이 서로 엇갈렸다. 인터컨티넨털컵도 흔들렸다. 유럽 클럽들의 불참이 잦았다. 우승한다고 해도 명예만 있을 뿐 큰 실익이 없었다. 1980년 일본 자동차회사 도요타가 스폰서로 합류했다. '도요타컵'으로 명명된 인터컨티넨털컵은 일본 도쿄에서 단판 승부로 펼쳐졌다. 도요타는 이 대회에 연간 70만 달러를 투자했다. 참가하는 팀에게도 20만 달러 이상의 상금을 제공했다. 유럽과 남미 클럽에게 큰 돈줄이 됐다. 도요타컵은 2004년까지 지속됐다.

#첫 발걸음 그러나 좌초
그 사이 세계 축구는 점차 글로벌화되고 있었다. 유럽 클럽들도 자신들의 나라, 자신들의 대륙 밖에서 수익을 창출하고자 했다. 남미 클럽도 마찬가지였다. FIFA는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제3세계에서의 성공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축구는 유럽과 남미를 넘어가고 있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 개최도 확정됐다.
1999년 FIFA 총회에서 첫 클럽 월드컵 개최를 결의했다. 2000년 브라질에서 열기로 했다.(1999년 개최 예정이었지만 1년 밀렸다) 유럽과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에서 8개팀이 참가했다. TV 중계권도 잘 팔렸다. 5개 대륙 15개 방송사에 4000만 달러에 중계권을 팔았다. 이를 바탕으로 총상금 2800만 달러 규모의 대회로 런칭했다.
다만 이 대회는 두번째만에 자초됐다. 2001년 스페인에서 12개팀이 참가한 가운데 두번째 대회를 열려고 했다. 그러나 FIFA의 마케팅 파트너인 ISL이 파산했다. ISL은 FIFA와 올림픽 중계권은 물론이고, ATP투어 등에 투자하려다 현금 유동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3억 달러 채무를 감당하지 못하고 최종 파산했다.
ISL의 파산으로 스페인 대회는 멈췄다. 2003년 대회 역시 무산됐다. FIFA는 대응책을 찾았다. UEFA, CONMEBOL 그리고 도요타와 접촉했다. 여러가지 권리들을 나눠가지면서 인터콘티넨털컵과 클럽 월드 챔피언십을 통합키로 했다.
2005년 일본에서 클럽 월드 챔피언십으로 출발했다. 각 대륙 챔피언들이 참가하고, 토너먼트 방식으로 바꿨다. 2006년부터는 클럽월드컵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매년마다 개최됐다. 일본, UAE, 모로코, 카타르, 사우디 아라비아 등에서 개최했다. 포커스는 받았지만 한계는 명확했다. 6~7개팀이 참가하는 대회로는 전세계적인 관심을 받기 어려웠다. 더욱이 시드를 받은 유럽 챔피언과 남미 챔피언은 4강에서 기다리고 다른 대륙 챔피언들이 올라가는 구조는 팬들의 흥미를 끌기 어려웠다. 클럽 월드컵의 대전환이 필요했다.

#상업화에만 혈안! 인판티노, 클럽 월드컵을 선택하다
2016년 잔니 인판티노가 FIFA 회장이 됐다. 그는 FIFA의 글로벌화와 상업화에 초점을 맞췄다. FIFA 월드컵을 32개국 체제에서 48개국 체제로 바꿨다. 하나의 돈줄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의 본선 출전을 위한 조치였다. 다만 중국은 48개국 체제로 펼쳐지는 이번 2026년 북중미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인판티노는 클럽 월드컵으로 눈을 돌렸다. 클럽월드컵을 32개팀 체제로 운영하겠다는 제안을 던졌다. 2021년부터 4년마다, FIFA 월드컵이 열리기 한 해 전 6월에 열겠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방송사 중계권 및 스폰서 수익을 극대화하겠다는 것이 인판티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인판티노의 구상은 잠시 멈췄다. 첫 대회는 2021년 중국에서 열려고 했지만 코로나 19 판데믹으로 인해 대회를 취소할 수 밖에 없었다. 판데믹이 끝나고 2022년 12월 인판티노는 2025년 대회가 32개팀 체제로 열릴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중국 대신 사우디 아라비아라는 큰 스폰서를 찾았다. 이를 바탕으로 총 상금 규모만 10억 달러에 이르렀다. 참고로 2022년 카타르월드컵 총상금은 4억 4000만 달러였다.
#우려의 시선
FIFA 상업화의 최고치 자리에 있는 2025년 클럽 월드컵의 첫 시작은 나쁘지 않다. 영국의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중계 플랫폼인 DAZN은 FIFA에 1조 4890억원을 지불하며 독점 중계권을 샀다. 전세계에 무료 생중계에 나섰다. DAZN의 공급망을 바탕으로 클럽월드컵은 전세계로 송출되기 시작했다. 미국 내에서도 관심도가 조금씩 오르고 있다.
그러나 우려섞인 시선도 많이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선수들의 혹사 논란이다. 유럽 시즌이 끝난 후, 그것도 더위가 시작되는 6월 중순부터 미국에서 열리는 대회이다. 유럽 팀들의 경우 휴식을 제대로 가지지도 못하고 한달 간의 대회에 나서야 한다. 대회가 끝나고도 한 달 정도밖에 쉬지 못하고 다음 시즌을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다. 한 시즌에 80경기 가까이 치러야 하는 경우도 있다. 때문에 대회 시작 전 레알 마드리드나 맨시티, 첼시 등에서 보이콧 관련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여기에 FIFA의 권위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인판티노가 FIFA를 접수한 후 너무나도 많은 대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클럽 월드컵은 클럽 대항전이기는 하지만 이와 동시에 FIFA 인터컨티넨탈컵도 런칭했다. 결국 비슷한 성격의 대회들이 난립함으로 FIFA 주관 대회의 권위와 희소성에 금이 가고 있다는 걱정들이 앞서고 있다.

#한국의 도전 역사는?
클럽 월드컵의 시작은 2000년 브라질 대회부터이다. 한국이 이 대회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2005년 일본 대회에서였다. 당시 심판진에 김대영 심판이 부심으로 참가했다. 클럽월드컵 첫 출전 한국인(심판)이었다. 한국 클럽의 최초 출전은 2006년 일본 대회에서 전북이었다. 전북은 2006년 ACL 우승팀 자격으로 클럽 월드컵에 진출했다. 멕시코의 클럽 아메리타와의 8강전(1라운드)에서 0대1로 졌다. 그러나 오클랜드시티(뉴질랜드)와의 5위 결정전에서 전북은 3대0으로 승리했다. 이현승이 전반 17분 첫 골을 넣었다. 클럽 월드컵 사상 최초 한국인 득점 선수가 됐다.
2008년 일본 대회에서는 박지성이 맨유 소속으로 참가했다. 그는 결승전에 선발출전했다. 한국인 최초로 클럽 월드컵 결승전에서 출전한 선수가 됐다. 맨유는 결승전에서 에콰도르의 LDU 키토를 1대0으로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2009년 UAE 대회에서는 포항이 AFC 대표로 출전했다. 포항은 4강까지 진출했다. 아르헨티나의 에스투디안데에게 1대2로 졌지만 새로운 역사를 썼다. 포항은 3-4위전에서 멕시코의 아틀란테를 물리치고 3위를 차지했다. 포항의 데니우손은 이 대회에서 4골을 넣으며 대회 득점왕이 되기도 했다.
2010년에는 성남이 출전했다. 신태용 감독이 이끌던 성남은 아랍에미리트의 알 와다를 4대1로 완파했다. 4강전에서 인테르 밀란에게 0대3으로 졌다. 3-4위전에서 브라질의 인테르나시오날에게 2대4로 지며 4위에 올랐다. 2011년 대회에는 ACL 챔피언이었던 알 사드의 일원으로 이정수가 참가했다. 또한 개최국(일본) 챔피언 자격으로 나선 가시와 레이솔에 뛰고 있던 박동혁이 있었다. 참고로 가시와에는 북한 국적의 안영학도 있었다. 안영학은 클럽월드컵에서 뒨 최초의 북한 국적 선수가 됐다.
2012년에는 울산이 ACL 우승팀 자격으로 참가했다. 울산은 8강에서 멕시코의 몬테레이에게 패배했다. 이어 5-6위 결정전에서도 산프레체 히로시마에 2대3으로 졌다. 산프레체에는 황석호가 뛰기도 했다.
2013년 대회에서는 김영권이 있었다. 김영권은 ACL 우승을 차지했던 광저우 헝다 소속으로 출전했다. 2014년에는 특이한 이력의 한국인이 있었다. 오세아니아 대표로 나선 오클랜드 시티에 한국인 미드필더 김대욱이 있었다. 2014년 대회에 참가한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김대욱은 2015년 대회에도 오클랜드시티 소속으로 클럽 월드컵에 참가했다. 2015년 대회에서는 김영권이 다시 한 번 광저우 소속으로 참가했다.
2016년 대회도 일본에서 열렸다. 여기에는 한국팀이 복귀했다. ACL 우승을 차지한 전북이 돌아왔다. 전북은 2라운드에서 클럽 아메리카에게 1대2로 지고 말았다. 그러나 5-6위 결정전에서 남아공의 선다운스에게 4대1로 이겼다. 이 대회에는 오클랜드시티 소속의 김대욱이 다시 한 번 출전했다. 김대욱은 가시마 안트라스와의 1라운드 경기에서 골까지 넣었다. 한편 가시마에는 황석호가 있었다. 그의 소속팀 가시마는 대회 결승전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황석호는 결승전에 출전하지는 못했다. 2017년 대회 UAE 대회에는 또 김대욱이 있었다. 역시 오클랜드 시티 소속으로 출전했다.
2018년 대회에서는 전북에서 가시마로 이적한 권순태가 출전했다. 2019년 대회에서는 장현수(알 힐랄)와 남태희(알 사드)가 출전하며 한국인 선수의 계보를 이었다. 2020년 대회에는 울산이 다시 한 번 도전장을 던졌다. 그러나 울산은 UANL(멕시코)과의 첫 경기에서 1대2로 졌다. 이어 5위 결정전에서도 알 두하일에게 1대3으로 지며 씁쓸하게 귀국했다. 2021년에는 알 힐랄의 장현수가 유일한 한국인 출전 선수였다. 장현수는 2022년 대회에도 알 힐랄의 일원으로 출전했다.
2023년 대회에는 한국인 선수가 없었다.
클럽월드컵이라는 명칭은 2023년까지만 이어졌다. 그리고 2025년 이번 대회가 쓰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4년 주기로 클럽 월드컵이 열리게 된다. 각 대륙 챔피언들만 나서는 대회는 FIFA 인터콘티넨탈컵으로 바뀐다.
2025년 클럽 월드컵에는 울산과 함께 김민재(바이에른 뮌헨), 이강인(PSG), 김기희(시애틀 사운더스) 박용우(알 아인)가 출전한다. 이강인은 1차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전에서 교체출전해 페널티킥으로 골을 넣었다. 김민재는 부상으로 출전이 어려워보인다. 김기희는 보타포고와의 1차전에 선발 출전했지만 하프타임에 교체아웃됐다. 울산과 알 아인은 아직 경기를 시작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