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N수학] 日 수학자, K-드라마 보고 n차원 별자리 정리 풀었다?

배우 현빈 주연의 드라마 ‘눈의 여왕’을 보고 알게 된 수학 문제를 15년 동안 연구한 일본 수학자가 있습니다. 세키 신이치로 일본 아오야마 가쿠인대학교 교수가 그 주인공인데요. 2006 필즈상 수상자 테렌스 타오 교수의 연구인 ‘그린-타오 정리’가 드라마에 나온 것을 보고 감명받아 공부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최근 그린-타오 정리를 더 큰 수 체계에서 확장한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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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타오 정리
“신이치로, 이 한국 드라마가 수학 천재 이야기인데 같이 볼래?”
2007년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던 세키 신이치로 교수에게 그의 어머니는 드라마 ‘눈의 여왕’을 추천했습니다. 일본에서 큰 인기를 누린 한국 드라마 ‘겨울연가’의 열혈한 팬인 어머니가 같은 작가가 쓴 ‘눈의 여왕’을 보다가 수학을 좋아하는 아들에게 같이 보자고 한 겁니다. 세키 교수는 학창시절 수학 중에서도 수, 특히 소수를 좋아했어요.
드라마의 주인공 한태웅은 수학 천재지만 과거의 상처로 권투 선수가 됐어요. 후에 수학 교수로부터 ‘그린-타오 정리’가 적힌 쪽지를 받고, 복싱장에서 권투 글러브를 자연수 삼아 수열처럼 나열해보다 문제 해결 아이디어를 얻습니다. 밤새 복싱링 바닥에 매직으로 문제를 풀지요. 그 장면을 보고, 세키 교수는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1년 전인 2006년 테렌스 타오 교수가 이 정리로 필즈상을 탔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는데,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이 문제를 푸는 장면이 너무 감동적으로 그려져 저도 한번 이 정리를 공부해 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세키 교수는 그린-타오 정리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린-타오 정리가 담긴 논문을 어딜 가든 들고 다녔어요. 논문 내용을 이해하고자 쉴 때도, 밥 먹을 때도, 카페에서 다른 공부를 하다가도 꺼내 봤지요. 일본 교토대학교 수학과에 입학해서도 그의 ‘그린-타오 정리’ 덕질은 계속됐습니다.

○ 만 10년 만에 이해한 그린-타오 정리
그린-타오 정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연구하는 건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가능했습니다. 대학생 때는 수학의 여러 분야를 두루 공부해야 했고, 대학원 때는 정수론의 다른 분야를 연구했기 때문이에요. 당시 일본에는 그린-타오 정리를 연구하는 교수가 없어 수학계 대표 난제인 ‘리만 가설’에 나오는 제타 함수를 세부 전공으로 선택했거든요. 2017년 2월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연구 주제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되자 본격적으로 그린-타오 정리를 파기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이때 논문을 다시 보니 그 내용을 금세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2017년 10월 일반인을 대상으로 강연하는 ‘매스 파워 이벤트’에서 그린-타오 정리를 설명하기도 했어요. 내용을 이해하니 그린-타오 정리가 증명된 논문에서 추가적으로 제기하는 여러 문제를 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혼자서 연구하기는 쉽지 않았어요.
“그린-타오 정리 관련 문제만 고집해서 풀다 실패하면 분명 이름 없는 수학자로 남을 게 뻔했어요. 그런데 그때 같은 대학원에 있던 겐지 사쿠가와 선배가 그 정도로 오랫동안 열심히 공부했는데 연구를 안 하는 건 아깝지 않냐고 묻더라고요. 그 얘길 들으니 이름 없는 수학자가 되더라도 그린-타오 정리 관련 연구를 하고 싶어졌어요.”
그즈음 해외 연수를 다녀온 미무라 마사토 일본 도호쿠대학교 조교수가 같이 그린-타오 정리 논문에 언급된 문제들을 풀자며 이메일을 보내왔습니다. 2018년 10월 세키 교수는 일주일에 한 번 미무라 교수와 여러 논문에 나온 방법론들을 공부하는 세미나를 진행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세미나에 함께하는 수학자들이 하나둘 늘어났습니다. 세미나에서 방법론을 다 공부하자 세키 교수는 논문에 언급된 문제 중 ‘타오 교수의 별자리 정리’를 일반화하자고 제안했습니다.


○ 15년 연구 덕질의 성과! n차원 별자리 정리 증명
세키 교수는 2019년 5월 4명의 교수와 함께 별자리 정리를 n차원까지 확장한 문제 해결에 돌입했습니다. 연구팀은 매주 한 번 도호쿠대 강의실에 모여 본인이 연구한 것을 칠판에 쓰고, ‘이건 틀렸다, 이건 맞았다’며 서로 의견을 나눴습니다.
그러던 2019년 8월 연구팀 일원인 카이 와타루 도호쿠대 교수가 타오 교수가 만든 한 방법론을 이용하면 풀릴 거 같다고 이야기해서 5개월 동안 열중해서 문제를 풀었습니다. 주요 아이디어가 정리되자 논문 작성에만 몰두했지요.
2020년 12월 드디어 n차원에서도 원하는 모양의 별자리를 항상 만들 수 있다는 내용의 논문 초고를 완성했습니다. 이후 다른 수학자가 논문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간결하게 수정해 2022년 4월 인터넷에 공개했습니다. 이 논문은 현재 학술지에 게재 신청을 한 상태로, 수학자들의 검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최영주 포스텍 수학과 교수는 “정수론에서 가장 찾고 싶은 것 중 하나가 소수의 규칙인데 그린-타오 정리 증명으로 그중 하나를 발견한 것”이고, “그런 중요한 정리를 더 큰 수 체계로 확장하는 과정은 복잡한 경우가 있는데 오랫동안 풀리지 않은 것을 보면 쉽지 않은 문제”라고 설명했습니다.

“좋아해서 15년간 한 정리에 푹 빠질 수 있었어요”
Q. 오랜 기간 한 정리에 빠져서 공부할 수 있었던 비결이 궁금해요.
"그린-타오 정리 자체가 수학적으로 굉장해요. 그래서 좋았어요. 좋아하는 걸 하는 데 끈기가 필요하진 않잖아요. 좋아하니까 어려워도 할 수 있었지요.
'그린-타오 정리'라는 책도 썼어요. 책에 논문에서 적지 못한 여러 과정을 적었어요. 제 이야기를 보고 많은 사람이 그린-타오 정리에 빠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썼지요."
Q. 언제부터 수학을 좋아했나요?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서점에서 사이먼 싱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라는 책을 봤어요. ‘마지막 정리가 대체 뭐야?’라는 생각과 함께 제목이 머리에 딱 꽂혔어요. 책을 보니까 식이 알기 쉽게 딱 떨어져서 너무 좋더라고요. 그때부터 수학을 좋아했던 거 같아요.
그땐 수학 성적이 좋지 않을 때라 집 근처에 유명한 수학 학원에서 실력을 쌓았어요. 그 학원에서는 문제를 풀어야만 집에 갈 수 있었는데, 난이도가 높은 A 문제는 1문제였고, 평균 난이도의 B 문제는 10문제였어요. 두 유형 중 하나를 선택해서 다 풀어야 했는데 전 항상 A를 선택했어요. 그걸 계속하다 보니 학교 수학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었어요.
이후 집 근처에 있던 오사카에서 수학 수재들이 모이기로 유명한 기타노고등학교에 들어갔고, 거기서도 수학은 항상 1등을 해서 일본 교토대학교 수학과에 입학했지요."
Q. 수학 공부를 혼자 하는 편인가요?
"아니요. 평소에 사교적이고, 말을 많이 하는 편이라서 수학 문제나 풀이를 가르쳐주는 걸 좋아해요. 공동연구도 제 성격이랑 잘 맞아요. 연구할 때도 말을 많이 하거든요. 수학자와 카페에서 얘기하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잘 모를 정도지요."
Q.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수학에서만큼은 누가 더 잘하고 못하고가 없다고 생각해요. 타오 교수님은 유명한 수학자지만 그분이 발견하지 못한 것을 제가 찾을 수도 있는 거지요. 수학을 좋아한다면 즐기는 마음으로 10년이든 15년이든 계속하는 게 가장 중요한 거 같아요. 포기하지 마세요! 저도 계속해서 소수 미해결 문제를 풀 거예요."
○ 드라마 눈의 여왕 관계자들의 찐 반응은?
세키 교수는 ‘눈의 여왕’ 제작진에게 “드라마 소재로 잘 쓰이지 않는 수학을 이용해 좋은 드라마를 만들어 줘서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는데요. 드라마 제작에 참여한 작가와 수학자들은 세키 교수의 소식을 듣고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요.

● 눈의 여왕 작가 | 윤은경
제가 쓴 드라마가 일본의 한 고등학생의 마음을 울려서, 그 문제를 더 깊이 있게 이해하고 확장해서 풀었다고 하니 세상에 조금이나마 이바지한 느낌이 들었어요. 정말 감동적이었고, 작가로서 보람찼어요.
‘눈의 여왕’은 수학자를 동경하는 마음에서 나온 드라마예요. 책상에 앉아 문제를 푸는 수학자의 연구 모습은 단조로워 보이지만 그 연구 내용은 아주 심오하잖아요. 수학을 이해하려고 그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과정이 멋있게 느껴졌고, 드라마에서 한번 표현해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겨울연가’부터 함께 드라마를 집필한 김은희 작가와 이 드라마를 집필하게 됐어요.
그런데 제가 수학을 잘 모르니 김정한 교수님과 박부성 교수님의 자문을 받았습니다. 그린-타오 정리는 김정한 교수님이 알려주셨어요. 김 교수님은 1997년도에 필즈상 못지 않게 권위 있는 상인 풀커슨상을 받았는데, 그걸 드라마에 쓰고 싶었어요. 그래서 주인공이 교수님처럼 미해결 난제를 풀고 풀커슨상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더니 그린-타오 정리를 소개해 주셨죠.
● 자문 | 박부성, 경남대학교 수학교육과 교수
드라마를 자문할 당시 저는 수학 연구 외에도 퍼즐을 만들거나 수학책을 쓰는 데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대중에게 소위 괴짜로 묘사되던 수학자 이미지를 조금 바꿔보자는 생각으로 자문에 참여했지요.
세키 교수의 소식은 2021년 2월 KAIST 수리과학과가 주관한 온라인 강연을 보다가 알게 됐어요. 세키 교수와 공동연구한 카이 교수가 이 논문의 내용을 설명했는데, 거기서 눈의 여왕 이야기와 함께 세키 교수 일화를 소개한 거예요. 드라마의 자문을 맡았던 한 사람으로서 너무 기뻤어요.
수학 문제를 좋아하고, 몰입하는 측면에서 수학자들이 약간 덕후스러운 면모가 있잖아요. 세키 교수도 재밌어 보인 정리를 매일 들고 다니는 측면에서 덕후의 면모를 보였고요. ‘덕후의 승리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15여 년 넘게 공부해서 성과를 낸 것, 정말 멋있습니다.
● 자문 | 김정한, 고등과학원 계산과학부 교수
그린-타오 정리를 제가 추천을 했다고요? 자문을 한 지 오래돼서 그런지 기억이 안 나네요. 현빈 배우의 사인을 받았던 것만 기억나네요. 허허허.
저는 이 소식이 정말 기쁘긴 한데 한국 드라마가 이 수학자를 만들었다는 식으로 잘못 전달될 여지가 있는 점은 경계하고 싶어요. 세키 교수의 노력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연구를 하는 계기는 어디서나 올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꾸준하게 공부한 끈기와 그 노력, 결과에 있어요. 세키 교수가 15년간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한 것에 박수를 쳐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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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인하 기자 cowni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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