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분열되는 아세안, 남중국해 분쟁의 이면[가깝고도 먼 아세안](38)

2024. 10. 11.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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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벌어진 필리핀 거주 베트남인과 필리핀인들의 반중국 시위/qpxmska VTC NEWS


2012년 7월 캄보디아에서 열린 아세안 장관회의에서 아세안 창립 45년 만에 처음으로 공동성명을 발표하지 못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필리핀과 베트남은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영유권 주장과 공격적인 행태를 아세안 공동성명에 포함하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 아세안 의장국인 캄보디아는 “특정 국가 간 영토 분쟁을 아세안 공동성명에 포함하는 것은 아세안의 역할을 벗어난다”며 강력히 반대했다. 아세안 공동성명은 만장일치로만 채택되기 때문에 캄보디아의 반대로 ‘중국의 일방적인 영유권 주장을 규탄’하는 성명은 발표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아세안 통합성에 의문이 제기됐고, 중국의 ‘아세안 분열 작전’이 시작됐다는 분석이 나왔다. 같은 해 7월 20일 미국의 보수 싱크탱크인 국제전략연구소(CSIS)도 논평을 통해 “중국이 캄보디아를 압박해 아세안 내부 분열을 일으키고 있다”고 경고했다. 당시 캄보디아 측이 중국을 규탄하는 아세안 성명서 초안을 중국에 공유했고, 중국이 캄보디아를 압박해 남중국해 문제가 공동성명에 포함되지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파다했다.

2016년 라오스에서 개최된 아세안 장관회의에서도 남중국해 문제는 공동 성명에 포함되지 못했다. 당시 중국과 필리핀이 영유권을 다투고 있던 섬에 대해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는 “중국의 영유권을 인정할 수 없다”며 필리핀 손을 들어줬다. 이에 필리핀과 베트남은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결을 아세안 공동성명에 포함하자고 했다. 하지만 또다시 캄보디아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의장국인 라오스는 캄보디아의 반대를 이유로 공동성명 채택을 부결시키며 사실상 중국 손을 들어주었다. 이에 캄보디아에 이어 라오스도 중국에 포섭됐다는 비난 여론이 일었다. 싱가포르 외교 싱크탱크인 유소프 이샤크 연구소의 탕시우문 아세안 연구센터장은 2016년 6월 싱가포르 언론 CAN에 게재한 칼럼에서 “아세안을 억압하는 중국이 우려스럽다”고 했다. 또한 중국 입장을 두둔하는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아세안을 마비시키는 중국의 트로이 목마”라고 비판했다.

사실 캄보디아와 라오스는 베트남의 영향력 하에 있던 나라들이었다. 캄보디아에서 국민 200만명 이상이 학살당한 ‘킬링필드’ 폴 포트 정권을 몰아내고 훈 센이 38년간 정권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 곳은 베트남이다. 베트남을 도와 미국과 전쟁을 한 라오스 공산당이 정부를 수립할 수 있게 물질적·군사적 지원을 한 곳도 베트남이다. 하지만 중국이 이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빠르게 경제가 성장한 중국은 2000년대 후반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도로, 발전소, 댐 등 인프라 사업에 투자하며 이들을 친중 국가로 포섭해 갔다. 최근 캄보디아는 친중 깃발을 펄럭이며 급기야 베트남과 갈등을 키우고 있다. ‘캄보디아 해군기지의 중국군 주둔’과 ‘푸난 테초(Funan Techo) 건설’ 등으로 두 국가 간 긴장은 심화하고 있다. 이에 더해 지난 9월 20일 캄보디아는 라오스-베트남과 함께하는 CLVDTA(캄보디아-라오스-베트남 개발 삼각지역) 협정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했다. CLVDTA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3개국이 접경지역을 공동 개발하고 인프라 확충을 할 목적으로 1999년 만든 우호 모임이다. 하지만 아버지 훈 센에 이어 캄보디아 총리에 취임한 훈 마넷은 자국 내에 이 협정으로 캄보디아의 영토와 주권을 베트남에 빼앗긴다는 부정적인 여론이 일고 있다며 탈퇴를 선언했다. 중국을 등에 업은 캄보디아가 이제 베트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제 갈 길을 가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아세안을 분열시킬 가장 뜨거운 화염이 인도차이나반도에서 본격적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1967년 8월 8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태국 외무장관 5명이 태국 방콕에 있는 외무부 건물 메인 홀에 모여 아세안 창립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아세안 홈페이지


아세안 분열 촉진


중국도 아세안 10개국을 동시에 상대하기는 버겁다. 이에 따라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직접적으로 영토 분쟁을 겪고 있는 2개국(필리핀·베트남),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소극적인 2개국(말레이시아·브루나이), 그리고 영토 분쟁과 무관한 나머지 6개국으로 분리해서 대응하고 있다. 중국은 주로 두 번째와 세 번째 그룹 국가의 일대일로 인프라 사업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남중국해 문제에서 아세안의 단일한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막고 있다. 특히 중국은 라오스-태국-말레이시아-싱가포르를 잇는 고속철도 사업에 적극적이다. 표면적으로는 내륙국가들의 물류망 개선을 지원하는 것이지만 중국 기업들의 아세안 진출을 쉽게 해 아세안에서의 경제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것이 목적이다. 또한 중국과 아세안 고속철도 연계에서는 믈라카해협의 봉쇄 가능성에 대비해 육로 운송망을 확보하려는 전략적 이유도 엿보인다. 중국이 수입하는 원유와 천연가스의 85%는 이 믈라카해협으로 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육로 운송망 확장을 통해 아세안 국가들의 남중국해에 관한 관심과 중요도를 축소하려는 의도도 있어 보인다.

반면 최근 필리핀에 대한 중국의 강경한 태도는 남중국해 긴장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2023년부터 중국 해경은 물대포를 사용해 필리핀 해경을 공격했으며, 2024년 6월에는 중국 해경이 도끼와 칼로 필리핀 해군을 공격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필리핀 해군의 손가락이 절단되면서 필리핀 각지에서 대대적인 반중 시위가 벌어지고, 필리핀 상원의장은 방송에서 중국산 제품 불매운동을 촉구하기도 했다. 필리핀 정부는 자국 내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온라인 도박장을 단속하고 중국인 스파이가 신분을 속여 필리핀 지방도시의 시장이 됐다는 의혹을 제기해 반중 정서를 고조시켰다. 여기에 발맞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024년 4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과 ‘글로벌 인프라 파트너십(PGI)’을 발표하며 중국의 일대일로에 대응하는 인프라 지원 계획을 밝혔다.

도전받는 아세안 중심성


아세안 지역 내에서 발생하는 정치, 경제, 안보 이슈 등 주요 문제를 아세안이 중심이 돼 해결하는 것이 ‘아세안 중심성(ASEAN Centrality)’의 핵심이다. 아세안은 미국, 중국, 인도, 일본 등 아시아·태평양의 강대국과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강대국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설립됐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의 갈등 속에 어느 한쪽 편을 들도록 강요받으면서 아세안의 설립 취지가 퇴색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메콩 협력체와 같은 기구를 통해 아세안 내에서 중재 역할을 할 수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이다. 2011년에 출범한 한-메콩 협력체를 통해 한국은 메콩강 유역 5개국(캄보디아·미얀마·라오스·태국·베트남)과의 협력을 강화해 메콩강 문제를 평화롭게 풀어나갈 기회를 맞았다. 특히 2019년 11월 한국이 주최한 한-메콩 정상회의는 큰 기대를 모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그 흐름이 끊겼다. 아세안이 내부 분열을 극복하고, 미국과 중국 모두에 휘둘리지 않고, 본래의 중립적 모습을 회복하기를 바라며 한국이 그 촉진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다시 한번 기대해본다.

호찌민 | 유영국 <베트남 라이징>·<왜 베트남 시장인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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