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을 욕망하는 성수, 성수를 시기하는 압구정

한겨레21 2024. 10. 7.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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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읽는 경제학]서울 배경으로 풀어낸 현대판 ‘위대한 개츠비’, 심윤경의 소설 ‘위대한 그의 빛’
서울 성동구 서울숲 트리마제(왼쪽). 게티이미지뱅크.

심윤경의 소설 ‘위대한 그의 빛’의 화자는 이규아입니다. 1994년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했으나 경영학에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탈춤 동아리에서 친구들과 어울리고 공연하는 것을 낙으로 삼다가 3학년 때 중퇴했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가 예술경영으로 전공을 바꿔보지만 역시 체질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경영이란 결국 돈과 사람을 움직이는 일인데 그런 일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학비를 보내주던 부모가 송사에 휘말리면서 돌아가신 뒤 남은 재산은 오빠가 독차지하고 지원을 끊자 예술경영도 작파했습니다.

롱아일랜드와 성수동의 공통점

그 후 이십여 년을 뉴욕에서 방황하기도 하고, 레스토랑과 펍에서 일하며 미래에 대한 아무런 기대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친구와 함께 놀러 간 롱아일랜드 끝 이스트햄프턴 와이너리의 와인 맛에 반해 뉴욕시의 식당과 바에 와인을 보급하는 와인 마케팅 전문가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맨해튼을 바라보는’ 롱아일랜드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돌아갈 때가 됐다고 느낍니다.

규아는 어려서 살던 서울 성수동으로 향합니다. 콧구멍을 새카맣게 하는 분진을 날리는 시멘트 공장이 있던 평범한 동네가 초고층 아파트와 유명 업소들이 들어선 핫한 지역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유명 연예인들과 벤처 사업가들이 입주한 럭셔리 아파트로 유명한 T타워 옆에 마당까지 있는 상업용 단독주택을 싸게 임대해서 와인숍 킹스포인트를 열었습니다. 한 기업이 소유한 건물인데 규아의 뉴욕 경험이 ‘품격 있는’ 와인바를 운영할 임차인을 구한다는 조건에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규아는 담쟁이덩굴이 덮인 건물의 아늑한 마당에 야외 테이블 몇 개를 내놓고 인테리어를 자기 손으로 직접 해서 뉴욕 감성의 와인바로 꾸몄습니다. 늦은 밤, 손님과 직원이 다 떠나면 소파에 앉아 밖을 내다보는데, 한강 건너 압구정동 H아파트 한 채에서 흐릿하게 빛나는 독특한 초록색 불빛이 눈에 띕니다. 바로 옆 T타워는 웅장한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밤새 건물 외벽의 조명을 밝혀둡니다. 규아는 문득 성인이 된 이후 자신이 살았던 곳이 ‘맨해튼을 바라보는 롱아일랜드’와 ‘압구정동을 향한 성수동’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서울대 경영학과 동기 중 가장 돈과 가깝지 않은 삶을 살았는데, 시선은 돈에 대한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방향이라 생각하니 좀 우스워집니다.

심윤경 소설가의 ‘위대한 그의 빛’. 사진 문학동네

강을 사이에 두고 배치된 올드 머니와 뉴 머니의 상징

이 공간의 배치가 이 소설의 핵심 구조를 모두 드러냅니다. 작가 심윤경은 팬데믹이 기승을 부려 무작정 도시를 걷는 것으로 위안을 받던 시절 한강 가에서 우연히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와 성수동 주상복합 아파트 트리마제가 한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작가는 어린 시절 서촌에서 자랐고 지금도 그 동네에서 산다고 하니 오십 년 동안 ‘오래된 서울’을 벗어나지 않고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근의 청와대와 경복궁 때문에 일대가 엄격한 고도 제한을 받는 지역이라 온통 고층 아파트 천지인 서울 시내에서 예외적으로 단독주택과 저층의 다세대 주택 위주로 주거지가 형성된 곳입니다. 그래서 부의 상징인 두 아파트가 눈에 더 들어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는 압구정 현대와 성수동 트리마제를 각각 H아파트와 T타워라는 이름으로 소설에 배치하고, 각각을 올드 머니와 뉴 머니의 상징으로 그려냅니다.

H아파트에는 규아와 동갑내기인 외사촌 유연지가 살고 있습니다. 미인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연지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 단지에 살았고 이 단지에 사는 이웃 이광채를 만나 결혼했고 신혼살림도 이 단지에 꾸렸습니다. 연지와 광채의 삶에서 H아파트를 떼어놓은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연지는 서울의 명문 사립 여자대학교 출신이고 광채는 규아와 서울대 경영학과 동기입니다. 규아의 외삼촌인 연지 아빠는 규아가 아는 한 집안에서 가장 부자였습니다. 광채네는 친가와 외가가 모두 일제 시대 때부터 광업과 각종 사업으로 부를 쌓았기 때문에 부자인 규아 외삼촌이 보기에 자신과 비교가 안 되는 정말 부잣집입니다.

규아의 와인숍이 T타워에 붙어 있어 사람들은 그곳에 거주하는 유명인들이 킹스포인트에 들르는지 궁금해하지만, 사실 규아는 이들을 잘 알아보지 못합니다. T타워에 사는 제일 인기 있는 K-팝 스타가 비티에스(BTS) 멤버라면, 가장 유명하고 성공한 사업가는 펜트하우스 주민 제이 강입니다. 서울대 생명과학부를 졸업한 제이 강은 암 치료 유전자 에클버그를 발견하고 에클바이오를 창업했으나 국내에서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자 하버드 대학으로 떠납니다. 실리콘밸리의 투자자들은 피 몇 방울로 27종의 암 진단을 가능하게 하는 에클바이오의 암 진단 키트에 열광했습니다. 제이 강이 영리하게 시대의 유행인 크립토커런시(암호화폐) 에클코인을 출시하면서 에클바이오는 단순한 바이오 스타트업을 넘어서서 ‘생체기술 기반 블록체인 아이티(IT) 기업’으로 탈바꿈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에클바이오는 10억달러 가치로 나스닥 상장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압구정 부자가 성수동을 보며 떠올린 것

압구정동 H아파트 주민 광채는 강 건너 보이는 T타워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80억원이나 하는 H아파트에 사는 자신의 부에 뿌듯하면서도 천문학적인 재산을 일군 T타워 연예인들과 사업가들을 생각하면 배알이 꼴립니다. 그는 압구정동 주민들이야말로 오래전부터 한국의 발전을 이끌어온 ‘근본 있는’ 사람들인 반면 T타워는 겉만 번드르르한 얼치기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고 자위하지만 입맛은 씁니다. 올드 머니가 뉴 머니를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이 강이 킹스포인트에서 프라이빗 파티를 하겠다고 연락해 오고, 규아, 연지, 제이 강의 얽히고설킨 인연이 드러나면서 소설은 급물살을 탑니다. 이 부분은 소설을 읽을 분들을 위해서 아껴두겠습니다. 많은 분이 ‘올드머니와 뉴머니, 강(바다) 건너 건물을 바라보는 시각’ 등에서 눈치채셨겠지만 이 소설은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한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의 현대판입니다. 두 작품의 구성이 빼닮았지만 심윤경이 그린 2020년대 서울에 사는 인물들의 생생한 묘사로 ‘위대한 그의 빛’은 개츠비의 단순한 흉내를 훌쩍 뛰어넘는 생명감을 갖습니다. 광채는 내가 실제로 접한 현실의 몇몇 올드 머니 인물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고, 제이 강의 모습은 최근 미국과 한국에서 말썽을 일으킨 테라노스의 엘리자베스 홈스, 테라의 권도형, 에프티엑스(FTX)의 샘 뱅크먼프리드를 연상시킵니다.

신현호 이코노미스트·‘나는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말한다’ 저자

심윤경 소설가. 한겨레 자료사진

심윤경 ‘위대한 그의 빛’은?

심윤경은 1972년생 작가입니다. 서울대에서 분자생물학으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은 뒤 직장 생활을 하다 전업한 소설가입니다. 과학자 출신 소설가 하면 떠오르는 과학소설을 쓴 것도 아니라 약간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입니다. 2002년 ‘나의 아름다운 정원’이 한겨레문학상에 당선되면서 데뷔했고 여러 편의 소설, 동화와 에세이를 냈습니다. ‘위대한 그의 빛’은 2024년 문학동네에서 출간됐습니다.

*일반인이 경제현상에 쉽게 다가가고 동시에 경제와 금융 종사자가 소설에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소설 속에서 경제를 발견하는 연재입니다. 2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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