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결국 ‘나의 마음’을 찍는 것이다
세렌디피티(serendipity)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우연히 얻은 좋은 경험이나 성과'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다. 최근 필자는 서울지하철 충무로역 인근 보위옥에서 사진 전시회를 열었던 철학자 허경에게 "어떻게 사진을 찍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크라프트베르크의 말처럼 내가 카메라로 사진을 찍지만, 카메라가 시키는 대로 내가 사진을 찍는 것이기도 하다. 특정 거리, 특정 관점에서 특정 장면이 나오도록 말이다. 결국 모든 사진은 자기 마음을 찍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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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사진작가의 말을 곱씹어보니 최근 그리고 있던 '포토그라피 시리즈'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나의 마음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창의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과 함께 20년 전부터 그림을 그려왔다. 최근에는 '그리드에 점찍기'와 '네모에 담긴 동그라미' 등을 그리고 있다.
시간이 흐른 뒤 이 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작가노트를 썼다. 참고로 자기 그림에 대해 글을 쓸 때는 마치 다른 사람의 그림을 보듯이 써야 한다. 특히 예술가에게는 이 같은 훈련이 필요하다. 남의 글을 인용하듯이 작가노트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진, 구르스키에 대한 오마주'는 제목에서부터 사진이라는 매체와 라캉의 실재계, 상상계, 상징계 이론 사이의 긴밀한 연관성을 암시한다. 이는 단순한 오마주를 넘어 구르스키의 사진적 언어를 김재준 특유의 추상회화적 조형 어법으로 재해석하는 지적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상상계는 인간이 대상을 인식하는 주관적 영역이고, 상징계는 언어와 사회적 규범의 세계를 가리키며, 실재계는 인간의 인식 밖에 있는 무의식적 세계로 예술이 끊임없이 포착하려 하지만 결코 온전히 재현할 수 없는 무언가다. 캔버스를 카메라라 상상하고, 상징계 도구라고 의미를 부여해봤다. 캔버스의 백색 표면을 인화지로 여기니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사회과학적 설명도 가능해졌다.
사진 작업의 세 단계
"구르스키와 김재준의 작품은 모두 사진이라는 매체가 단순히 가시적 현실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들의 작업은 우리 사회를 형성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 구조와 시스템을 포착하고 있다. 세계화와 자본주의의 거대한 메커니즘 속에서 개인은 시스템의 미세한 입자로 축소돼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진다. 이는 현대미술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진은 어떻게 찍어야 할까. 사진 작업 방식에 대한 하나의 접근 방식을 소개한다. 다음 세 단계를 거쳐 사진을 촬영하면 이전과 다른 경험과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첫 번째 단계는 '생각 많이 하기'다. 카메라의 노출, 심도, 구도 같은 기본 원칙과 사진의 대상, 사진에 대한 철학 등 지적 체험을 축적하는 단계다. 철학, 문학, 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깊이 있는 경험을 통해 새로운 시각을 가져야 한다. 구체적인 철학적 개념이나 미적 이론을 사진에 직접적으로 사용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그 과정을 통해 내면적 인식을 확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두 번째 단계는 '아무 생각 없이 사진 찍기'다. 이는 즉흥성과 우연성을 강조한 방식이다. 의도적인 계획이나 콘셉트에 얽매이지 않고 그 순간의 직관을 따르는 방식으로 사진을 촬영하면 된다.
세 번째 단계는 '다시 생각하기'다. 사진을 찍고 관련 내용을 잊어버릴 정도로 오랜 시간을 보낸 후 다시 그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진들 사이의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 토대로 작가노트나 평론을 써도 좋다.
예술 창작 과정은 지적 생각과 감각적 무심함의 상호작용이다. '생각 많음'과 '생각 없음'이 교차하면서 예술적 완성도가 높아지고, 이를 통해 창작의 생명력이 지속된다. 이 과정은 생각 많음으로 시작해 생각 없음이 그 안에 끼워지고 다시 생각 많음이 등장하는, 마치 샌드위치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유사하다.
김재준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대 경상대학장, 국민대 도서관장과 박물관장, 한국예술경영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민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김재준 국민대 국제통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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