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BO 중계를 보다 보면 어느 팀 팬이든 한 번쯤은 이순철 해설위원의 독설에 등줄기가 서늘해진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아들이 야구선수임에도 본인 기준에 못 미치는 플레이에는 가차 없이 비판하는 일관성 덕분에 '모두까기 인형'이라는 별명을 얻은 해설위원, 그 이순철이 선수 시절에는 해태 왕조의 리드오프이자 정신적 지주였다는 사실을 아는 팬들이 얼마나 될까.
데뷔 첫 시즌에 신인왕과 골든글러브를

이순철은 1984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다. 축구, 핸드볼, 육상까지 병행했던 다재다능한 운동 신경을 가진 선수로, 고교 시절 내야수, 대학 시절 외야수를 소화했고 1983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국가대표로 우승에 기여하며 병역 문제까지 해결했다. 해태에는 3루에 주인이 없었고, 이순철이 그 자리를 맡으며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결과가 예상을 뛰어넘었다. 데뷔 첫 경기 안타, 다음 날 3안타로 시작한 그는 시즌 내내 3할 이상의 타율을 유지하며 리그 1위 67득점, 31도루를 기록했고 데뷔 첫 시즌에 3루수 골든글러브와 신인왕을 동시에 차지했다. 해태 역사상 최초의 신인왕이었고, 무려 2021년 이의리가 등장하기 전까지 36년간 유일한 기록이었다.
외야 전환으로 찾아온 위기, 그리고 극복

화려한 데뷔 이후 시련이 찾아왔다. 1986년 국가대표 3루수 출신 한대화가 OB에서 해태로 이적하면서 이순철은 외야수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외야 경험이 전무했던 건 아니었지만 프로의 타구 속도는 대학 시절과 차원이 달랐고, 그해 88경기에서 외야 실책만 10개를 저지르며 수비가 흔들렸다.
수비 불안은 타격 부진으로 이어졌고 출장 기회도 줄었다. 하지만 이순철은 이 시기를 독특한 방식으로 돌파했다. 등을 돌려 관중석을 보고 있다가 타격음이 들리면 스타트를 끊는 청각 훈련을 반복한 것이다.

처음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당겨치는 타구와 밀어치는 타구의 소리를 분간할 수 있게 됐고, 1988년을 기점으로 완전히 다른 중견수가 됐다. 공의 낙지점을 먼저 찾아 여유롭게 잡아내는 이른바 '라면 수비'의 시초였다.
해태 왕조의 선봉장

수비가 살아나자 타격도 살아났다. 1988년에는 타율 3할 회복에 더해 58도루로 도루왕을 차지했는데, 이는 당시 한 시즌 최다 도루 신기록이었다. 이후 3년 연속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며 통산 5개의 골든글러브와 도루왕 3회를 기록했다.
1992년은 커리어 하이 시즌으로 최다 안타와 도루왕을 석권하는 한편 1번 타자임에도 풍부한 타점을 생산해냈다. 통산 출루율이 타율보다 8푼 이상 높을 정도로 선구안이 뛰어났고, 수비와 주루뿐 아니라 매년 두 자릿수 홈런에 1992년에는 20홈런까지 기록하는 파워까지 갖춘 진정한 올라운드 선수였다.
1996년 우승의 숨은 주역

1993년 이종범이라는 거물 신인이 등장하면서 리드오프 자리를 내줬고, 기량도 서서히 내리막을 탔다. 하지만 1996년 이순철은 선수로서의 기량이 아닌 리더십으로 해태 역사에 또 한 번 이름을 남겼다.
선동열과 김성한이 떠난 해태는 시즌 초 6승 10패로 최하위였고 팀 분위기도 최악이었다. 이때 이순철이 "선동열, 김성한이 없다고 우승 못 하면 우리는 모두 헛깨비가 된다"며 팀을 결집시켰고, 해태는 7월 말 선두로 올라서며 결국 정규 시즌 1위와 한국시리즈 우승을 동시에 달성했다.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결승타를 때린 것도, 우승 세리머니로 유명해진 뱃놀이 퍼포먼스를 주도한 것도 이순철이었다. 13년 해태에서 우승반지만 8개를 쌓은 왕조의 진정한 선봉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