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면허 판결이냐” 미추홀구 전세사기 2심의 후퇴
‘사기 공화국.’ 8월27일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사건 항소심 선고 직후, 피해자들은 2심 판결을 두고 이렇게 표현했다. 2심 재판부의 판단은 주범에게 사기 등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한 1심과 엇갈렸다. 주범(징역 7년)을 포함한 전세사기 일당 10명 모두 대폭 감형됐다. 공범 중 두 명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전세사기 피해’로 인정받은 전세금도 당초 148억여 원에서 68억여 원으로 줄었다.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는 대부분 “나이 어린 사회 초년생, 신혼부부, 76세의 노인 등 경제적으로 곤궁하고 취약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1심 판결문)”이다. 2023년 2월 이후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절망 끝에 사망한 이들이 네 명이다. 또 다른 두 명은 이미 앓고 있던 지병이 악화해 숨졌다. 몇몇 피해자는 전세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살던 집에서 쫓겨났다. 피해자들은 2심 판결을 두고 물었다. “이게 죄가 아니라면, 도대체 뭐가 죄란 말인가.”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주범은 ‘건축왕’이라고 알려진 남헌기씨다. 남씨는 2009년부터 인천 미추홀구 일대에서 소규모 아파트, 빌라 등을 짓고 임대사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자신의 명의를 사용하지 않았다. 여기서 공범들이 등장한다. 남씨는 ‘바지 임대인(명의수탁자)’을 고용해 이들 명의로 소유권보존등기를 마쳤다. 자신의 주택을 중개할 공인중개사도 채용했다. 공범들은 남씨 사무소에서 자금관리 업무를 맡거나, 중개팀에 소속돼 실질적으로 남씨가 운영하는 각각의 공인중개사사무소에서 공인중개사, 중개보조원으로 중개 업무를 맡았다(〈그림 1〉 참조).
남씨 일당은 팀을 나눠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전형적인 방식은 이렇다. 남헌기씨가 고용한 공인중개사 A씨가 피해자에게 ‘바지 임대인’ B씨 명의로 등록된 남씨의 집을 안내한다. 서로 역할을 바꾸는,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바지 임대인이자 공인중개사이기도 한 B씨가 A씨 명의로 등록된 남씨의 집을 중개하는 식이다. 남씨는 이들이 세입자와 전세 계약을 맺으면, 그 돈으로 기존 전세금을 반환하거나 대출이자와 직원 급여를 충당했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임대사업을 확장했고, 2021년에는 수도권 일대에 보유 주택을 2708채까지 늘렸다.
남씨가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상황이 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2018년부터 임차인들과 임대차보증금 반환청구 분쟁을 겪기 시작한 남씨는 2022년 1월 이미 심각한 자금난에 처해 있었다. 이즈음 남씨 소유 건물 8개는 이미 경매에 넘어가 있었다. 남씨는 새로 전세 계약을 하더라도, 전세금을 제때 돌려줄 의사나 능력이 없었다. 그런데도 남씨 일당은 피해자에게 이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고 전세 계약을 맺었다.
남씨 직원인 공인중개사들은 피해자에게 “(바지) 임대인은 건물을 짓고 투자를 하는, 보증금을 충분히 돌려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근저당권이 설정돼 있지만 이자를 잘 납부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만약 근저당권으로 인한 문제가 발생해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경우에는 이를 책임지겠다”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래도 피해자가 계약을 망설이며 전세보증금반환보증 가입을 원하면, “근저당권이 설정된 집을 전문으로 한다. 한 번도 문제가 생긴 적이 없으니 걱정하지 마라. 보증보험 가입할 필요 없이 안전하다”라고 속여 전세 계약을 맺었다. 피해자들 입장에선 남씨의 존재도, 자금난도, (바지) 임대인과 공인중개사 모두 남씨에게 급여를 받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지난해 3월 검찰은 남씨 일당 10명을 사기, 부동산실권리자명의등기에 관한 법률 위반, 공인중개사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했다.
2심 재판부 판단, 1심과 어떻게 달랐나
2월7일 51차례 공판 끝에 1심 재판부(인천지방법원 형사1단독, 오기두 판사)는 주범인 남씨에게 사기, 공인중개사법 위반 등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법정 최고형이다. 범죄수익 115억여 원의 추징도 선고됐다. 바지 임대인, 공인중개사 등 공범으로 기소된 남씨의 직원 9명도 모두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짧게는 4년, 길게는 13년이다. 1심 끝에 전세사기 피해자로 인정된 세입자는 191명, 피해액은 148억여 원이다(현재까지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사건으로 재판 중인 피해자는 약 700명에 달한다).
6개월 뒤, 2심 재판부(인천지방법원 형사항소1-2부, 재판장 정우영)의 판단은 달랐다. 남씨 형량이 징역 15년에서 7년으로 대폭 줄었다. 공범들도 징역 8개월~1년6개월에 집행유예 2~3년으로 모두 감형됐다. 1심 재판부가 “남씨와 같은 수준으로 전세사기 범행을 주도”했다고 판단한 남씨 사무소 재무이사 전 아무개씨(1심 징역 13년)와 “전세사기 범행 10건에 가담”했다고 판단한 공인중개사 박 아무개씨(1심 징역 6년)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2심 재판부는 남씨가 2022년 1월에야 재정 악화를 알아차렸다고 보고, 그 이후에 발생한 전세 계약만 유죄로 인정했다(〈그림 2〉 참조). 전세 계약 당시 남씨가 전세금을 충분히 돌려줄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이후 자금 사정 악화로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하더라도 사기로 볼 수 없다는 논리다. 그러면서 남씨가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할 정도로 재정 상황이 나빠진 때가 ‘2022년 1월’부터라고 판단했다. 공범의 경우 남씨의 자금 사정을 몰랐고, 몇몇 공범만 2022년 5월27일 중개팀 회의 이후에야 알아차렸을 거라고 봤다.
남씨는 바지 임대인과 공인중개사를 고용한 뒤 이를 속이고 세입자와 전세 계약을 체결했지만, 결과적으로 2022년 1월 이전(공범은 2022년 5월27일 이전) 전세 계약은 아무런 사기 혐의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2심 재판부가 확인한 것처럼, 남씨는 이미 2018년부터 임차인들과 임대차보증금 반환청구 분쟁을 겪기 시작했다. 2021년 초부터는 중개팀 직원들에게 급여나 성과수당을 지급하지 못했고, 2021년 3월부터는 보유 부동산을 담보로 받은 대출이자를 연체했다. 박순남 인천미추홀구 전세사기피해대책위원회(피해자 대책위) 부위원장은 “남씨가 2022년 1월에야 재정 악화를 알아차렸고, 게다가 공범들이 몰랐다는 건 전적으로 피고인의 주장만 받아들인 결과다. 그들이 우리에게 한 게 사기가 아니라면 무엇이 사기라는 건지 전혀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이다”라고 말했다.
2심 재판부는 또 2022년 1월 이후 전세 계약을 갱신했더라도 기존 보증금은 사기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예컨대 2022년 1월 이후 전세 계약을 갱신하면서 전세금을 8000만원에서 8500만원으로 올렸다면, 증액분(500만원)만 전세사기 피해액으로 인정된다. 재판부는 동일한 전세금으로 계약을 갱신한 경우에는 추가로 돈을 받지 않아 사기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봤다. 이에 따라 ‘전세사기 피해’라고 인정받은 전세금이 1심 148억여 원에서 2심 68억여 원으로 줄었다.
다른 전세사기 재판에 나쁜 선례 될라
“가장 충격적인 건 공인중개사법 위반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점이다.” 김태근 변호사(주택세입자 법률지원센터 세입자114 운영위원장)의 말이다. 남씨 일당은 남씨의 지휘 아래, 공범인 바지 임대인과 공인중개사가 서로 역할을 바꿔가며 전세 계약을 도맡았다. 공인중개사법에 따라, 공인중개사는 중개의뢰인(임차인)과 직접 거래해서는 안 된다. 이에 따라 원심은 남씨 일당에게 공인중개사법 위반죄를 선고했지만, 항소심은 공인중개사가 직접 임대인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김태근 변호사는 “이대로라면 바지 임대인과 공인중개사가 서로 역할을 바꿔가면서, 전세사기를 벌일 수 있는 판을 열어주는 ‘전세사기 면허’ 판결이 될 수밖에 없다. 사실상 경제적 이익 공동체인 바지 임대인과 공인중개사의 거래 행위에 대해 공인중개사법 위반죄로 처벌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전세사기를 막을 방법은 없다”라고 말했다.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재판에 절박하게 임했다. 이 재판이 또 다른 전세사기 재판에 선례가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심을 맡았던 오기두 전 판사는 선고 뒤 “사기죄 처벌 한도가 징역 15년에 그쳐 악질적인 전세사기 범죄를 예방하는 데 부족하다”라고 지적하고, 입법부에 법정 최고형 형량을 높일 것을 제안했다. 박순남 부위원장은 “우리한테는 남씨 일당이 엄중하게 처벌받아서 다시는 이런 사기가 벌어지지 않게 하는 게 무척이나 중요했다. 그런데 2심 판결로 지난 2년간의 처절했던 싸움이 완전히 원점으로 돌아갔다”라고 말했다.
2심 선고 당일, 가해자의 지인들은 감형을 축하하는 꽃을 들고 왔다. 피해자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판결이 앞으로 세입자들에게 끼칠 여파를 우려한다. 박순남 부위원장은 “건물주, 공인중개사, 바지 임대인. 최소 3명만 있으면 전세사기를 칠 수 있고, 그게 불법이 아니라고 한다. 사실상 ‘누구라도 이런 사기 행각을 벌여도 된다’는 지침을 준 판결이다”라고 말했다.
실제 현장에서는 최근 법원 판결이 전세사기 가해자들에게 ‘그래도 된다’는 메시지를 준다는 평가가 나왔다. 그중 한 사례다. 3월12일 대법원은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이중 사기’를 벌인 임대인이 무죄라고 판단했다. 상황은 이렇다. 임대인은 새로 전세 계약을 맺고, 기존 세입자에게 “이체 한도가 부족해 오늘 전세금 전액(1억2000만원)을 반환할 수는 없고, 3일 후에 나머지 7000만원을 보내겠다. 현관문 비밀번호는 공인중개사에게 알려달라”고 속였다. 처음부터 보증금을 반환할 의사나 능력은 없었다. 기존 세입자가 비밀번호를 알려주자마자 새로운 세입자에게 집을 넘겼지만, 남은 전세금 중 5000만원은 돌려주지 않았다.
전세금 5000만원을 돌려받지 못한 피해자는 대항력과 우선변제권까지 잃게 됐다. 원심은 피해자가 주택을 점유할 권리가 있는데도 임대인에게 속아 비밀번호를 알려줬다(점유권을 넘겼다)는 이유로 사기죄를 인정했지만,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재물을 점유하면서 향유하는 사용·수익권은 사기죄에서 보호하는 재산상의 이익에 포함되지 않는다”라는 법리를 근거로 사기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혁 변호사(민변 민생경제위원회)는 이 판결 이후, 이중으로 전세 계약을 맺고도 ‘나몰라라’ 하는 임대인이 늘었다고 했다. 임대인 입장에서는 그 집의 사용·수익권이 (기존 세입자와 신규 세입자 중) 누구에게 가든 처벌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한 집을 두고 기존 세입자와 신규 세입자가 다퉈야 한다. “대법원은 피해자가 사용·수익권을 반환했지만 채권(이 경우 전세금을 돌려받을 권리)이 남아 있으니, 사기죄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 같다. 그런데 임차인에게 대항력과 우선변제권은, 집이 경매에 넘어갔을 때 선순위로 보증금을 받을 수 있는 권리다. 대법원이 임차인 보호에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미추홀구 전세사기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8월29일 인천지검은 항소심에 불복해 상고했다. 인천지검 관계자는 “보증금을 상환할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계약을 갱신한 경우에도 사기죄가 성립하고, 공범들도 2022년 5월 이전부터 보증금 반환이 어렵다는 걸 알았다. 항소심 재판부가 법리를 오해했다”라고 말했다. 피해자 대책위는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국가와 사법부가 더 이상 피해자들을 죽음으로 등 떠밀지 말아야 한다. 대법원은 잘못된 원심을 파기환송해, 희대의 전세사기범 남헌기 일당을 엄벌에 처해야 한다”라고 촉구했다.
이은기 기자 yieun@sisain.co.kr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