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승행사 끝나고 집에 가는 길, 요즘말로 ‘현타’ 한 번 세게 왔다. 이렇게 내 차가 형편없다고 느낀 건 처음이었다. 그 만큼 5세대 레인지로버는 플랫폼, 파워트레인, 안락함, 소재, 오디오, 온‧오프로드 성능 등 모든 부문에서, 현재 양산차가 추구할 수 있는 최상의 품질을 지니고 나왔다.
글 강준기 기자
사진 랜드로버, 강준기
Since 1970
‘52주년’. 랜드로버의 기함, 레인지로버가 등장한지 올해로 52주년을 맞았다. 50년 간 단 다섯 차례 모델 체인지를 겪을 만큼, 여느 차보다 생애주기가 길다. 그 동안 레인지로버가 쌓은 명성은 남다르다. 강력한 오프로드 성능과 편안한 승차감을 양립한 주행성능이 좋은 예다. 덕분에 소비자는 레인지로버의 맞수로 SUV가 아닌 벤츠 S-클래스 사이에서 저울질 했다.

이번 5세대 레인지로버는 지난 50년 역사에 방점을 찍는 모델이자, 새로운 역사의 첫 장을 쓰는 기념비적인 모델이다. 새로운 MLA-Flex 플랫폼 덕분에, 플러그인 하이브리드뿐 아니라 오는 2024년엔 전기차 버전도 나올 계획이다. 또한, 레인지로버 최초로 3열 시트 갖춘 7인승 모델도 등장했다. 차 내 70개 이상의 모듈은 SOTA 업데이트를 통해 스스로 ‘진화’한다.
①익스테리어 – Cd 0.30에 불과한 공기저항계수


사진으로 5세대의 감동을 모두 전달하긴 어렵다. 그 만큼 실물이 주는 인상은 여느 SUV와 다르다. 언뜻 구형과 큰 차이 없는 외모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 레인지로버 고유의 박시한 스타일을 계승하되, 한층 현대적으로 다듬었다. 가령, 흔한 윈도 몰딩이 없고 도어 손잡이는 표면 안에 감쪽같이 숨었다. 외부에 튀어나온 파츠 하나 없이, 군더더기 없는 매끈한 피부를 완성했다.

그 결과 신형 레인지로버의 공기저항계수는 Cd 0.30에 불과하다. 길이 5m 넘는 거대한 SUV가 페더급처럼 날렵하다. 이처럼 저항이 적은 디자인은 연료효율을 높이는 데 유리하다. 향후 전동화 모델을 투입했을 때 주행거리 늘리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다. 뒷모습은 세로형 LED 테일램프와 ‘RANGE ROVER’ 레터링 하나로 시선을 압도한다. 심플한데, 고급스럽다.

5세대의 차체 길이와 너비, 높이는 각각 5,252×2,003×1,870㎜(롱 휠베이스 기준). 휠베이스는 3,197㎜다. 비슷한 체격의 경쟁모델과 비교하면 어떨까? 메르세데스-벤츠 GLS보다 32㎜ 길고 45㎜ 높다. BMW X7보단 2㎜ 길고 65㎜ 높다. 휠베이스 역시 레인지로버가 가장 넉넉하다. 이처럼 웅장한 체격을 지녔지만, 공기저항계수는 가장 낮다. 그래서 혁신적이다.
②인테리어 – 경쟁상대는 동급 SUV가 아닌 S-클래스

묵직한 도어를 여니, 커다란 사이드스텝이 ‘스르륵’ 우아하게 내려온다. 계단처럼 밟고 실내로 입장. 외모에서 느낀 심플함이 실내에서도 이어진다. 레인지로버 고유의 인테리어 스타일을 계승하되, 더욱 간결하게 구성했다. 특히 중앙 13.1인치 플로팅 디스플레이는 크기도 시원스럽지만, LG전자가 개발한 제품으로 ‘K-친화적’이다. 해상도가 뛰어날 뿐 아니라 모니터 내 UI가 태블릿PC처럼 친숙하다. 인포테인먼트에 약점이 있었던 과거 랜드로버와 비교하면 ‘환골탈태’다. 티맵 내비게이션도 기본으로 들어갔다.
소재의 고급감은 요즘말로 ‘말모말모’다. 이 차엔 흔한 플라스틱 소재 찾는 게 모래알 속 진주 찾기처럼 어렵다. 스티어링 휠과 대시보드, 암레스트, 시트, 도어트림 등 몸이 닿는 모든 곳을 촉감 좋은 최상급 가죽으로 감쌌다. 특히 센터 콘솔의 나무 장식엔 금속을 얇게 깎은 마이크로 메달 인레이를 심었다. 따뜻한 색감의 가죽과 원목의 조화가 환상적이다.


레인지로버는 운전대도 탐나지만, 뒷좌석도 탐나는 자동차다. 무릎 공간을 ‘주먹 몇 개’로 설명하는 건 의미 없다. 광활하고, 안락하다. 가운데 좌석은 버튼을 누르면 ‘스르륵’ 내려와 근사한 팔 받침대로 변한다. 뒷좌석에만 모니터를 세 개 마련했고, ‘핫 스톤’ 마사지 기능과 무릎 및 발 받침대(우측) 등 다양한 기능을 갖췄다. 2열에서 온열 마사지 받으며, 총 35개 스피커로 연주하는 음악 들으며 달리는 상상, 생각만 해도 즐겁다.
현장엔 롱 휠베이스 5인승 모델만 자리했다. 7인승은 아쉽게 확인할 수 없었는데, 랜드로버의 설명에 따르면 3열의 다리공간은 864㎜에 달한다. 구색 갖추기 용 3열은 아니란 뜻이다. 또한, 3열의 착좌 위치를 2열보다 41㎜ 높여, 맨 뒤에 타도 답답하지 않게 설계했다.
③파워트레인 및 섀시 – 구형보다 비틀림 강성 50% 강화

5세대 레인지로버는 랜드로버의 새로운 MLA-Flex 플랫폼을 밑바탕 삼았다. 알루미늄 사용 비율은 80% 이상. 이전 세대보다 무게는 줄이되, 뼈대 비틀림 강성은 50% 높여 33,000Nm/deg에 달한다. 역대 랜드로버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 또한, A‧C‧D필러 안에 3개의 링을 심어 강성을 높였고, 강철로 빚은 벌크헤드는 노면 소음과 진동을 기존보다 24% 낮췄다. 무엇보다 전기 파워트레인까지 아우를 수 있는 골격으로 의미를 갖는다.

국내 시장에 먼저 투입하는 라인업은 가솔린 P530과 디젤 P350 두 가지. 시승차는 P530으로, 기존 V8 가솔린 수퍼차저 엔진 대신 BMW로부터 공급 받은 V8 4.4L 가솔린 트윈터보 엔진을 얹었다. BMW M5와 M8 등에 얹는 강력한 엔진으로, 레인지로버에 걸맞게 몇 가지 수정작업을 거쳤다. 가령, 흡기 라인을 개선해 오프로드 능력에 최적화 했다. 최고출력과 최대토크는 각각 530마력, 76.5㎏‧m. 2.8t(톤)의 거구를 0→시속 100㎞까지 4.6초 만에 가속시킨다. 기존 수퍼차저 엔진과 비교하면 저회전부터 농밀한 토크를 뿜어내, 저속부터 활기차다.
④주행성능 – 의외로 변화가 큰 온로드 주행실력

이번 시승은 강원도 홍천 인근 산길부터 차체 절반이 잠기는 도강까지, 온‧오프로드를 넘나들며 진행했다. 통상 미디어 시승행사에 참가하면, 제조사는 해당 차의 특성에 맞게 시승코스를 ‘세팅’한다. 짜릿한 핸들링 강조한 차는 주로 굽잇길이나 서킷, 연비를 강조한 차는 도심에서 진행한다. 그런데 이번 레인지로버는 굽잇길에서 꽤 긴 시간을 보냈다. 와인딩에 자신 있다는 얘기다.
심지어 대열을 이끄는 인스트럭터의 주행 페이스는 과거 재규어 F-페이스 런칭 때가 떠오를 만큼 상당히 빨랐다. 이유가 있었다. 5세대의 온로드 주행성능은 꽤 드라마틱하게 변했다. 고저차가 심한 강원도 산길에서 속도를 과감하게 올려도, 차체 기울어짐이 요즘 말로 ‘1’도 없다. 48V 전자식 안티 롤 컨트롤이, 142.7㎏‧m의 강력한 힘으로 롤을 억제한다. 차체가 완벽히 수평을 유지한 채 코너를 돌아나가는 느낌은 포르쉐 카이엔처럼 민첩하다. 기존에도 전자식 안티 롤 바는 있었는데, 토크 차이가 제법 크다.

덩치에 걸맞지 않은 예리한 움직임엔 후륜 조향 시스템도 한 몫 톡톡히 보탠다. 주행 속도에 따라 뒷바퀴를 최대 7.3°까지 비튼다. 가령, 저속에선 앞바퀴와 반대 방향으로 틀어, 휠베이스가 줄어든 효과를 얻는다. 반대로 고속에선 앞바퀴와 같은 방향으로 돌려 안정감을 높인다. 그 결과, 굽잇길에서 더욱 민첩한 움직임을 만들고, 유턴 시 회전직경은 불과 11m도 안 된다. 길이 5.2m 넘는 거구의 회전직경이 폭스바겐 골프와 비슷하다는 게 새삼 놀랍다.



이러한 변화는 오프로드에서도 도움을 줬다. 차 한 대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좁은 커브길이 대표적이었다. 레인지로버와 비슷한 체격의 후륜조향 없는 SUV는, 후진‧전진 몇 차례 반복해서 통과해야 할 코스를 레인지로버는 ‘한 방’에 클리어 한다. 덕분에 육중한 ‘덩치’를 모는 게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차폭 가늠이 어렵다면, 카메라의 도움을 받아도 좋다. 13.1인치 중앙 디스플레이에 오프로드 주행화면을 띄우면, 좌우 휠 주변 화면을 볼 수 있다. 악명 높은 코엑스 주차장 등을 내려갈 때 활용해도 좋다.

온로드 주행에서 눈에 띄는 또 한 가지는 정숙성이었다. 음악을 재생하지 않으면, 귀가 먹먹할 정도로 조용하다. 두툼한 이중접합 차음유리와 흡음재로 차체를 꽁꽁 감싼 결과다. 여기에 모든 좌석의 헤드레스트 안에 60㎜ 스피커를 심었다. 현장감 넘치는 음악 감상에 도움을 주는 건 물론, 실내에 들어오는 휠 진동과 타이어 소음, 엔진 소음을 모니터링 한 다음 이를 스피커로 희석시킨다. 실내 정숙성은 여느 F-세그먼트 플래그십 세단보다 더 높은 수준이다.
부드러운 디펜더

다음은 오프로드 코스 진입. 맛보기 체험이 아닌, 꽤 근사한 험로 코스를 준비했다. 먼저 홍천 인근 산 정상까지 올라가며, 신형의 등판능력을 살폈다.


랜드로버 라인업 중 가장 강력한 오프로드 성능을 갖춘 디펜더와 비교하면 딱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비슷한 능력 갖추되, 더 ‘부드럽다’. 통상 험로를 주행하면, 실내 탑승객은 흔들리는 차체 안에서 노면 충격을 견디느라 정신없다. 이는 에어 서스펜션 갖춘 디펜더 110이나 디스커버리도 마찬가지. 그런데 레인지로버의 실내는 안락하고 포근한 상태를 유지한다. 네 바퀴는 커다란 흙더미를 넘느라 분주할지언정, 탑승객은 고요한 주행품질을 느끼며 싱겁게(?) 오프로딩을 즐길 수 있다. 아마 2억짜리 레인지로버로 이런 험로에 올 운전자는 없겠지만, 소비자는 이러한 상징적 가치에 지갑을 연다.


레인지로버의 가치가 가장 빛났던 순간은 정상에서 ‘테일게이트 이벤트 스위트’ 기능 펼쳤을 때. 트렁크에 지리한 간이 좌석에 앉아, 산 아래 풍경을 넋 놓고 바라봤다. 건장한 성인 남성 둘이 앉아도 버틸 만큼 튼튼한데, 타고 내리기 쉽게 리어 서스펜션의 높낮이를 트렁크 내 버튼으로 손쉽게 조절할 수 있다. 사랑스러운 노래 틀고 샴페인까지 준비하면, 가정의 평화가 찾아오리.
900㎜까지 도강 가능한 레인지로버

이번 오프로드는 도강 코스가 다양하게 있었다. 특히 마지막 코스 앞에선, 자이로드롭 대기할 때처럼 꽤 두려웠다(?). 진행을 도와주시는 분의 가슴 높이까지 올 정도로 물이 깊었다. 설상가상 한 동안 잠잠했던 비도 세차게 내렸다. 우선 주행 모드는 오프로드 2→‘도강’ 모드에 두고 코스에 천천히 진입했다.

참고로 4단계 높이 조절이 가능한 레인지로버의 에어 서스펜션은 승객이 타고 내릴 땐 차체를 50㎜ 낮추고, 고속 주행할 땐 16㎜ 낮춰 안정감을 높인다. 반대로 험로에선 기본 75㎜에 추가로 60㎜ 더 높인다. 최대 도강깊이는 900㎜에 달하는데, ‘도강’ 모드가 별도로 있다는 게 흥미롭다. 접지력이 부족한 험로에서는 ‘액티브 락킹 리어 디퍼렌셜’이 노면 상황에 따라 앞뒤 차축에 락(Lock)을 걸어, 한쪽 바퀴가 헛돌아도 반대쪽 바퀴로 장애물을 꿀떡 삼킨다.

도강을 하던 중, 창문 넘어 물 높이를 보니 이미 도어 절반까지 차올랐다. 실내 중앙 디스플레이에서는 실시간으로 물의 높이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900㎜~1m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갔다. 재미있는 건, 차의 절반이 물에 잠겼음에도 불구하고 실내에 물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엔진 흡기구의 위치를 높인 결과, 침수 없이 수월하게 코스를 통과할 수 있었다. 지난 수도권 폭우 사태 때, 각종 미디어에서 “타이어가 1/3 이상 물에 잠길 경우 과감하게 차를 버려야 한다”고 보도했는데, 한 가지 예외를 빼먹었다.
⑤총평

4세대 레인지로버가 10년 가까이 이어가면서, 그 동안 비슷한 체격(혹은 가격)의 다양한 럭셔리 대형 SUV가 맞수로 등장했다. 메르세데스-마이바흐 GLS, BMW X7, 벤틀리 벤테이가 등이 좋은 예다. 진짜 사막의 롤스로이스, 컬리넌도 빼놓을 수 없지. 그래서 레인지로버의 위상은 예년만 못했다. 반면, 이번 5세대는 온‧오프로드 성능, 소재 품질, 감성 품질, 오디오 성능, 헤리티지까지 다시 한 번 경쟁 모델과의 격차를 벌렸다. 게다가 약점이었던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은 LG전자가 개발한 피비 프로로 거듭나며, 편의성뿐 아니라 안정성도 올라갔다. 시승차인 P530 오토바이오그래피의 가격은 2억3,130만 원.
<제원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