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방 한쪽에 늘 자리 잡고 있는 식용유 병. 유통기한을 확인하고 한참 남았으면 안심하고 씁니다. 그런데 유통기한은 봉인된 상태를 기준으로 설정된 날짜입니다. 한 번 개봉한 식용유는 공기와 접촉하는 순간부터 전혀 다른 시계가 돌기 시작합니다. 개봉된 식용유는 공기와 접촉하면서 산화가 진행되고, 시간이 지나면 산패 상태로 변합니다. 유통기한이 1년 남았어도, 뚜껑을 열어 상온에 몇 달 두고 쓴 식용유는 이미 산패가 진행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날짜만 보고 안심하던 습관이, 매번 요리할 때마다 산화 물질을 함께 먹고 있었던 것일 수 있습니다.

산패가 무서운 이유는 그 과정에서 생성되는 산화 물질 때문입니다. 산화 과정에서 생성되는 산화 물질은 체내 염증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식용유 속 불포화지방산이 산소, 빛, 열에 노출되면 과산화물과 알데히드 같은 화합물로 분해되는데, 이 물질들이 세포막을 손상시키고 혈관 내벽에 염증 반응을 일으킵니다. 이 반응이 반복되면 동맥경화 진행 속도가 빨라지고 만성 염증 수치가 올라갑니다. 산패가 진행될수록 특유의 쩐내나 금속성 냄새가 나기 시작하는데, 특유의 쩐내나 금속성 냄새가 난다면 즉시 폐기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런데 냄새가 미세할 때는 알아채지 못한 채 계속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통기한과 소비기한은 다른 개념입니다
유통기한과 소비기한의 차이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유통기한은 제조일로부터 소비자에게 유통·판매가 허용되는 기한으로 영업자 중심의 표시이고, 소비기한은 표시된 보관조건을 지켰을 때 안전하게 섭취할 수 있는 기한으로 소비자 중심의 표시입니다. 통상 유통기한은 품질안전한계기간의 60~70% 시점에서, 소비기한은 80~90% 시점에서 설정됩니다. 중요한 전제는 표시된 보관조건을 지켰을 때라는 것입니다. 냉장·냉동식품을 냉장고에 보관하지 않고 상온에 수 시간 이상 방치하거나, 더운 날씨에 식품을 오랫동안 적재하는 등 통상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방식으로 식품을 취급하면, 유통기한이나 소비기한이 한참 남았더라도 안전성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식용유만 위험한 것이 아닙니다. 다양한 재료가 혼합된 조리 식품, 예를 들어 음식점에서 포장해 온 남은 음식은 각각의 재료가 부패 속도가 달라 세균 번식 환경이 쉽게 형성됩니다. 냉장 보관하더라도 2일 이내 섭취가 권장되며, 3일이 지나면 식중독 위험이 크게 높아집니다. 견과류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지방 함량이 높은 만큼 산패 위험이 크고, 오래된 견과류에서는 페인트나 매니큐어와 비슷한 냄새가 나기도 합니다. 시금치나 케일 같은 잎채소도 상온에 오래 두면 위험군에 속합니다. 모두 유통기한이라는 숫자보다 보관 방식과 시간이 더 결정적인 변수가 되는 식품들입니다.

날짜보다 보관 방식이 먼저입니다
식용유를 안전하게 보관하려면 직사광선을 피하고 서늘하고 어두운 곳에 두는 것이 기본입니다. 개봉 후에는 가급적 3개월 안에 다 쓰는 것을 목표로 하고, 뚜껑을 항상 꼭 닫아 공기 접촉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가스레인지 옆처럼 열에 자주 노출되는 위치에 두는 것은 산패를 앞당기는 가장 흔한 실수입니다. 냄새를 맡아보는 습관도 중요합니다. 평소와 다른 쩐내나 금속성 냄새가 느껴진다면 유통기한이 한참 남았어도 즉시 버려야 합니다. 한 번에 큰 병을 사기보다 작은 용량을 자주 구입해 신선하게 쓰는 것이 산패 위험을 줄이는 현실적인 방법입니다.

유통기한은 안전을 보장하는 절대적인 숫자가 아닙니다. 표시된 보관조건을 지켰을 때만 의미가 있는 조건부 약속입니다. 상온에 오래 둔 식용유, 뚜껑을 자주 열어둔 채 방치한 병, 가스레인지 열기를 매일 받아온 기름. 이 모든 것이 날짜와 무관하게 산패를 앞당깁니다. 오늘 주방에 있는 식용유 병을 열어 냄새를 한번 맡아보십시오. 평소와 다른 냄새가 난다면, 유통기한이 아무리 많이 남았어도 그 병의 역할은 이미 끝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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