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 거닐던 거대한 연못, 집단학살 아픔 서린 물길 만나
벽송사 앞 임천강을 지나면 지리산 능선을 넘는 고갯길이 나온다. 먼저 마주치는 고갯길이 지안재다. S자를 3번 이어놓은 것 같은 구불구불한 길이다. 이 길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들어 있다. 예전에는 우마차만 겨우 통행하던 이곳에 도로가 개통된 것은 2004년이었다. 지안재를 넘으면 다음 고갯길이 지리산의 관문이라는 오도재(吾道岾)이다.
오도재는 '내가 깨우친 고개'라는 뜻이다. 사명대사의 사제인 청매(靑梅)선사가 부근 도솔암에서 '한 소식'했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오도재의 높이는 해발 750m이다. 함양 마천면과 휴천면을 잇는 지안재와 오도재는 남해안의 소금과 해산물이 지리산 능선을 넘어 지리산 북쪽 지역과 내륙으로 가던 길목이었다.
지리산의 차마고도(茶馬古道)인 셈이다. 아니 소금과 농산물이 주로 오간 길이니까 염두고도(鹽豆古道)라는 말이 맞을지 모른다. 중국 운남성 차마고도는 중국의 말과 티베트의 차가 서로 교환되던 실크로드보다도 먼저 생겼다는 해발 4천m의 고갯길이다. 지리산의 염두고도도, 운남성의 차마고도도 사람의 생존 욕구보다 더 높고 험한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변강쇠타령의 주무대였던 마천 = 오도재 부근 함양 등구마을이 유랑생활에 지친 변강쇠와 옹녀가 살았다고 하는 곳이다. 변강쇠와 옹녀는 개성에서 만나 부부가 되어 유랑생활을 계속하다가 지리산 골짜기로 들어온다. <변강쇠전>에는 해피엔딩이 없다. 변강쇠는 장승을 패 와 땔감으로 쓰다가 벌 받아 죽는다. '굶어 죽기 고사하고 우선 얼어 죽을 테니 오늘부터 지게 지고 나무나 하여 옵소' 하는 것이 옹녀의 마지막 당부였다. 변강쇠는 나무하러 가서도 종일 놀다가, 길섶 장승을 보고는 힘들이지 않고 얻는 '불로이득(不勞而得)'이라고 뽑아갔다가 '장승의 동티'를 불러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변강쇠가 죽은 뒤 옹녀는 다시 자취를 감춘다. 변강쇠와 옹녀 이야기가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유랑민들의 밑바닥 삶을 다루고 있다면 장승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장승은 길을 설명하는 이정표이자 마을과 마을의 경계이기도 하다. 변강쇠를 지칭한 장승은 향촌 사회의 기득권이었던 것일까?
2001년 함양 등구마을 주민들은 변강쇠와 옹녀의 묘를 만들고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성묘제를 올렸다. 상석도 없는 초라한 무덤이지만 거적에 말려, 지게로 운반돼 산에 묻혔을 당사자들은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할지 모른다. 판소리 '변강쇠타령'에는 적나라한 성 묘사와 노골적 음담이 가득하다. '변강쇠타령'이 청중 앞에서 공공연하게 불렸던 19세기 조선 사회는 어떤 성 풍속의 사회였을까?
옹녀와 변강쇠는 밑바닥 인생이었다. 살길을 찾다 간 곳이 깊고 깊은 지리산 골짜기 '등구마천'이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지만 '등구마천'은 넓은 지역이다.
함양 마천면 면적은 서울 여의도보다 12배쯤 넓고 옛 마산시에 비교해도 1/3쯤 된다. 퇴직 이후 함양에 사는 부산대 명예교수 김기홍은 <대한민국 소멸보고서>에서 2023년 함양 마천면에서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어린이가 한 명도 없었다고 했다. 마천은 지금 옹녀, 변강쇠 시대보다, 더 사람 찾기가 어려운 지역소멸의 현장이 되었다.
◇명승으로 가치 인정받지 못한 용유담 = 이제 임천강은 지리산 둘레길을 따라 2시 방향의 용유담(龍游潭)으로 향한다. 용이 노닌다는 용유담은 함양군 마천면 임천강 상류에 있는 큰 소(沼)이다. 좌우에는 수십~수백 m 높이의 깎아지른 벼랑이 첩첩 푸른 봉우리를 지탱하며 협곡을 이루고 있고 협곡 사이로 너비 70여m의 물줄기가 흐른다. 지리산 북쪽 계곡의 여러 물줄기가 모여 만든 임천강은, 용유담을 지나면서 이제 엄천(嚴川)으로 불린다.
조선 시대 지리산에 오른 뒤 산문형식으로 남긴 답사기는 100여 편이 넘는데 그 가운데 가장 많은 선비가 택한 코스는 용유담(龍游潭)을 거쳐 백무동 마을에서 천왕봉으로 가는 길이었다. 용유담은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에서 여주인공 고애신이 혼자 총포 술을 연습하다 유진 초이를 만난 장소이기도 하다.
이명박 정부는 2007년, 4대강 사업과 동시에 지리산 댐을 추진했다. 1조 원 가까운 예산을 투입해 50층 빌딩 높이와 비슷한 141m의 댐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댐이 건설되면 용유담이 수몰되는 것은 물론 지리산 칠선계곡과 실상사까지 영향을 받게 된다. 지리산 댐 건설계획은 2018년 문재인정부 때 백지화된다. 하지만 여전히 불씨는 남아 있다. 용유담은 지방자치단체의 반대로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자연문화유산으로 지정받지 못하고 있다.
문화재청이 지정하는 자연문화유산 '명승(名勝)'의 기준은 역사적 가치, 경관적 가치, 학술적 가치, 그 밖의 가치(국제적 가치) 중 하나 이상을 충족할 경우이다.
용유담에는 김종직, 조식 등 많은 사대부가 용유담을 둘러보고 글을 남겼고 조선 후기 화가 김윤겸은 <영남명승기행사경첩(嶺南名勝紀行寫景帖)>에 용유담을 담았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지리산 북쪽 기슭 물이 합쳐져 임천과 용유담이 되어 고을 남쪽에 있는 엄천에 이르는데, 시내를 따라 위아래의 천석(泉石)이 아주 기이하다"고 되어 있다.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한국 최초의 야담집인 <어우야담(於于野談)>의 저자 유몽인(柳夢寅)도 지리산 유람기에서 바위가 떨어져 나간 부분은 '용이 발톱으로 할퀸 곳', 갈라져 골이 깊게 파인 곳은 '용이 뜷고 지나간 곳'으로 표현하였다.
옛사람이 용의 흔적으로 생각했던 바위는 요즘은 돌개구멍, 영어로는 포트홀(Pothole)이라고 부른다. 포트홀은 기반암의 오목한 부분에 들어간 자갈이나 모래가 오랜 세월 물살에 따라 돌며 만들어낸다. 용유담은 강원도 인제 내린천, 경기 가평군 가평천 등 한국에서 몇 되지 않는 침식지형이다. 하지만, 용유담은 지자체 등의 반대로 명승 지정을 받지 못하고 여전히 훼손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73년 전 온 마을을 뒤흔든 총성 = 엄천강은 산청 이재 들녘 앞에서 슬픈 사연이 어린 오봉천을 받아들인다.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 앞을 거쳐온 물길이다. 한국전쟁 당시인 1951년 2월 7일,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는 산청 가현, 방곡마을과 함양 전촌마을, 서주 마을주민 705명을 빨치산과 내통했다며 집단학살한다. 3대대는 민간인을 학살하고서 산청 생초초등학교에 오후 8시 무렵 도착해, 학살한 마을에서 끌고 온 가축을 잡아서 잔치를 벌였다. 다음 날에는 거창군 신원면으로 넘어가 다시 719명의 주민을 학살했다.
희생자 대부분은 어린이와 노인, 부녀자였다. 이 사건은 2월 말에는 임시수도 부산까지 소문이 퍼졌다. 국방부 장관 신성모는 계엄사령부 민사부장이던 김종원에게 국회 조사단의 현지 접근을 막으라고 지시했고, 김종원은 국군 1개 소대를 빨치산으로 위장해 국회 조사단에게 위협사격을 가했다. 5월 들어 진상이 밝혀졌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이들을 계속 싸고돌았다. 5월 9일 부통령 이시영은 자신의 무능함과 자괴감을 담은 성명서를 내고 국회에 사의를 밝혔다. 국회는 사임서를 반려하고 대표들이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해 이시영의 사임을 만류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부통령이 현 정부를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가겠다는데 내가 어떻게 말리느냐"며 거절했다.
정부의 통제를 받던 국내 언론과는 달리, 외신 보도로 여론이 계속 악화하자 이승만은 신성모를 주일 한국대사로 빼돌렸다. 2024년 한국에서 수사 대상인 이종섭 전 국방부장관이 호주대사로 간 것도 다 전례가 있었다.
산청·함양 학살 당사자들은 사형과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다음해 사면을 받고 모두 복권되었다. 국회 조사단에게 위협사격을 지시했던 김종원은 징역 7년 형을 선고받았지만, 이승만에게 곧바로 특별사면을 받고 경찰로 전직해 1954년에는 32세 나이에 경남 경찰국장이 되고 2년 뒤인 56년에는 경찰청장이 된다. 임기상의 <숨어 있는 한국 현대사 2>에 따르면, 경남 경찰국장 재임 시절 참모 회의에서 인플레 때문에 시민들이 고생한다는 보고를 받자 이렇게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수사과장, 당장 나가서 '인플레' 잡아 와"
이승만은, 무식했지만 자신에게는 무한 충성했던 김종원을 이순신 장군급의 애국자로 평가했다. 4.19 혁명 이후 보호막이 사라진 김종원은 1956년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 등의 범죄 혐의로 감옥에 갇혔다가 1964년 사망한다.
'산청·함양 양민학살사건'과 '거창학살사건'은 4.19혁명 이후 진상조사가 이루어지다, 5.16쿠데타로 다시 금기어가 되었다. 5.16쿠데타 이후 군부는 민간인 학살피해자 협의회 주요 간부들을 구속해 이들의 입을 막았다. 유족회 활동이 재개된 것은 1987년 민주항쟁 이후인 1988년 들어서였다. 그 뒤 16년 뒤, 사건 발생을 기점으로 하면 53년 뒤인 2004년에야 추모공원은 조성되었다. 그렇지만, 지금도 유족들은 불안하다. 2023년 윤석열 정부에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된 김경동은 '6·25 전쟁 같은 전시하에서는 재판 등이 이뤄질 수 없으므로 적색분자와 빨갱이를 (재판 없이) 군인과 경찰이 죽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것도 희생자 유족들을 앞에 두고서. 진실화해위 상임위원을 역임한 사회학자 김동춘은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에서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규모를 20~30만 명으로 추정하면서 국군과 경찰, 우익에 의한 학살이 더 많았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진실화해위의 국정원 출신 황인수 조사1국장은 조사관들에게 '집단희생 진실규명을 신청한 유가족들이 돈을 뜯어내려고 거짓말을 한다' 는 식으로 말하고 "현재도 매년 1월 8일 북한 김정은이한테 생일 축하 편지 쓰는 대한민국 국민이 수만 명"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이렇게 다시 퇴행의 역사로 가는 것일까.
/김석환 부산대 석좌교수·전 한국인터넷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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