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조 '돈맥' 튼 SK이노베이션, 자회사 내세운 숨은 계산법

/사진=블로터DB·SK이노베이션, 그래픽=이채연 기자

SK이노베이션이 액화천연가스(LNG) 자회사를 앞세워 3조원이 넘는 자금을 끌어모았다. 자회사가 외부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조달하고 이를 모회사에 대여하는 구조로 단기 유동성 보강과 재무구조 개선을 동시에 겨냥한 숨은 계산법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SK이노베이션은 이달 25일 공시를 통해 100% 자회사인 여주에너지서비스와 나래에너지서비스가 각각 1조3500억원, 1조6500억원 규모의 제3자배정 유상증자를 실시했다고 밝혔다. 메리츠금융이 설립한 특수목적법인(SPC) 넥스젠에너지제1·2호가 두 회사가 발행하는 전환우선주(CPS)를 각각 인수하는 방식이다.

메리츠금융은 2030년 4월부터 2035년 10월까지 CPS를 보통주로 전환할 수 있으며 전량 전환 시 각 자회사 지분 50.1%를 확보한다. 다만 SK이노베이션은 메리츠금융이 보유한 CPS 매도를 제안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해 경영권 방어 장치를 마련한 것으로 전해졌다.

눈길을 끄는 점은 자금 흐름이다. 같은날 여주에너지서비스와 나래에너지서비스는 각각 8300억원과 1조5800억원을 모회사 SK이노베이션에 5년 만기 일시상환 조건(이자율 4.6%)으로 대여하겠다고 공시했다. 결과적으로 두 자회사가 외부에서 조달한 3조원 가운데 2조4100억원이 모회사로 흘러 들어가게 됐다. 외부 투자금이 자회사 증자로 유입되고 다시 모회사 차입으로 연결되면서 자회사 차원에서는 자본 확충, 모회사 차원에서는 장기차입금 확보라는 '이중 효과'가 만들어진 셈이다.

SK이노베이션이 이번에 직접 차입 대신 자회사를 경유한 방식을 택한 데는 뚜렷한 이유가 있다. 모회사가 시장에서 직접 대규모 차입에 나설 경우 신용등급 하락과 차입 여력 축소라는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반면 자회사가 외부 투자자에게 증자를 받고 이를 다시 모회사에 대여하는 구조를 활용하면 겉으로는 자회사 재무구조 확충으로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모회사의 유동성 보강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회계상으로는 장기차입으로 잡히지만 외형적으로는 자회사 증자라는 형태를 띠어 재무 안정성을 일정 부분 방어하는 것이다.

이는 SK이노베이션이 세운 중장기 재무 목표와도 맞닿아 있다. 앞서 SK이노베이션은 2030년까지 순차입금을 20조원 미만으로 축소한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단기적으로 유동성 확보가 절실하면서도 장기적으로는 부채 부담을 줄여야 하는 상황에서 자회사 증자를 통한 우회적 조달 방식은 재무 건전성과 자금 조달을 동시에 고려한 '유연한 해법'으로 기능한다.

이번 거래는 자회사 재무구조를 활용해 모회사의 유동성을 확보한 사례지만 SK이노베이션은 자회사의 독립성이 훼손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자회사가 외부에서 자본을 유치해 전사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라며 "경영권이나 운영권에는 변함이 없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공시에서도 발전 자회사의 자금 사용 목적은 채무상환, 발행 비용, 계열사 자금 대여 등으로 구체화됐다.

한편 이번 자금 조달은 SK이노베이션이 올 7월 말 발표한 '연내 8조원 자본 확충' 계획의 연장선상에 있다. 당시 SK이노베이션은 모회사 유상증자(2조원), 영구채 발행(7000억원), SK온 유상증자(2조원), SK아이이테크놀로지 유상증자(3000억원)를 통해 총 5조원을 마련하고 연말까지 3조원을 추가 확보하겠다고 밝혔다.

최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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