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의 천국’ 가기 위한 여권 같은 책 [독서일기]
패노니카 드 쾨니그스워터 지음 황덕호 옮김
안목 펴냄
이집트인들은 기원전 3250년경에 ‘이집트 상형문자’로 알려진 문자를 확립했는데, 이 문자의 출현 시기는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설형문자)가 출현한 시기와 일치한다. 문자의 발명과 함께 이야기도 창작되었다. 〈최초의 소설 시누헤 이야기〉(휴머니스트, 2024)를 옮기고 상세한 해설을 단 국내 유일의 이집트 상형문자 연구자 유성환은 이렇게 말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최초의 신화’라는 수식어가 무색하지 않은 〈길가메쉬 서사시〉가 있었다면, 고대 이집트에는 ‘최초의 소설’이라 할 수 있는 〈시누헤 이야기〉가 있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시누헤 이야기〉는 고대 이집트에 문학작품이 처음 출현한 중왕국 시대(기원전 2055~기원전 1650)의 작품으로, 이때 창작된 이야기 네 편 가운데 32점이나 되는 필사본을 남긴 그 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이다. 아멘엠하트 1세(기원전 1985~기원전 1956)의 신하 시누헤는 왕태자 센와세레트 1세의 지방 원정을 수행하던 중, 왕실에서 파견된 전령으로부터 왕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이집트 본토에서 시나이반도를 거쳐 레바논까지 달아난다. 그 이유가 끝내 밝혀지지 않기 때문에, 학자들은 시누헤가 왕실 내의 역학 관계를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왕위 계승을 둘러싼 궁중 암투에서 일신을 지키기 위해 일시 도피한 것으로 추측한다. “어떻게 보면 〈시누헤 이야기〉를 창작한 이름 모를 서기관의 진정한 문학적 재능은 결코 풀릴 수 없는 시누헤의 ‘비밀’을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고대 이집트뿐 아니라 그 시대에는 선왕의 장례를 치르는 사람이 적법한 후계자가 되거나 후계자 쟁탈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다. 〈시누헤 이야기〉를 쓴 작가는 부왕의 서거 소식을 들은 왕태자 센와세레트 1세의 거동을 긴박하게 묘사한다. “그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으며 매는 원정대에게 알리지 않은 채 자신의 종자들만 거느리고 날아올랐다(매는 이집트 왕자를 상징하는 단어).” 근무지를 무단 탈영하여 반평생 동안 이방을 떠돌던 시누헤는 죽음을 앞두고 왕위에 오른 센와세레트 1세에게 사면을 구한다. 영생을 위해서는 반드시 이집트로 귀환해서 이집트식 매장 의례를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이집트인에게 이집트인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이 마지막 대목이 〈시누헤 이야기〉를 당대의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다.
유대계 금융 재벌 가문 로스차일드가의 일원이자 재즈 애호가 겸 후원자였던 패노니카 드 쾨니그스워터는 1961년부터 1966년까지 자신과 스스럼없이 지낸 재즈 뮤지션 약 300명에게 “당신의 소원 세 가지”를 물었다. 〈재즈 거장들의 세 가지 소원〉(안목, 2024)은 그들의 흥미로운 답변과 그녀가 비공식적으로 찍은 재즈 뮤지션의 사진 200여 장이 곁들여진 희귀하고 아름다운 책이다.
가장 먼저 찾아본 기타리스트 케니 버렐의 답변은 이랬다. “①인종적 편견이 없어지는 것 ②물질만능주의적 가치를 더 이상 강조하지 않는 것 ③인본주의적 가치에 대한 개성 있는 표현에게 기회를 주고 독려하는 것.” 고등학교 교장이 쏟아낼 훈시처럼 들리지만, 홀대받은 걸작 〈러브 이즈 디 앤서(Love is the Answer)〉(콩코드 레코드, 1998)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다음은 〈베이스 온 탑(Bass on Top)〉(블루노트 레코드, 1957)이라는 앨범 이름이 암시하듯이 돈과 인기와 음악성의 정상에 있을 때 약물중독으로 33세에 죽은 베이시스트 폴 체임버스의 답변. “①명성 ②재산 ③행복.” 명성과 재산을 얻고 난 뒤 행복으로 가는 최선의 길은 더 많은 마약이었던가.
“저세상엔 아편이 있을까?”
질문이 이루어진 1960년대가 미·소 냉전에서 비롯한 핵전쟁의 두려움이 컸던 시대이니만큼, 세계 평화와 전쟁 반대를 소원으로 꼽는 답변이 많았다. 또 쾨니그스워터가 주로 만난 재즈 뮤지션이 흑인이었던 만큼, 답변 중에는 인종차별 없는 사회가 자주 나온다. 마일스 데이비스가 꼽은 단 한 가지 소원도 “백인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답변은 일반인의 소원과 다르지 않다. 돈, 여자 친구, 가족의 화목, 혹은 건강. 심심풀이 삼아 했을 어떤 뮤지션들의 답변은 팬을 실망케 하고, 의외의 답변은 그 뮤지션의 음악을 새롭게 들리도록 한다. 재즈의 천국이 있다면 거기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책을 여권처럼 소지해야 한다.
압두라우프 피트랏의 〈심판의 날〉(틈많은책장, 2024)은 동화를 빼고 나면 국내에 최초로 소개되는 우즈베키스탄 문학이다. 현 우즈베키스탄 영토에 귀속된 토후국 부하라에서 태어난 지은이는 고향의 마드라사(전통적인 무슬림 교육기관)에서 공부를 마친 뒤 튀르키예로 건너가 이스탄불 대학에서 4년 동안 공부했다. 1913년 고국으로 귀국한 그는 유학파 젊은이들로 구성된 좌파 개혁집단의 지도자가 되었고, 1921년 부하라 소비에트 공화국의 교육장관이 되었다. 스탈린이 1930년대에 저지른 대숙청 때 희생된 수많은 지식인 중 한 명이었던 그는 반소비에트(러시아) 혐의와 외국 정보기관과 연루되었다는 뻔한 혐의를 뒤집어쓰고 총살되었다.
피트랏은 1923년부터 1927년까지 모스크바에 억류되어 있었는데, 〈심판의 날〉은 모스크바에 소환된 첫해에 쓴 단편소설이다. 아편 중독자인 퍼처미르는 15일 동안 아편을 피우지 못해 병상에서 앓다가 죽게 되는데, 죽음을 앞둔 주인공의 걱정은 한 가지다. “저세상엔 아편이 있을까?” 무덤에서 자고 있던 퍼처미르는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나팔 소리를 듣고 깨어난다. “모든 사람들은 땅에서 일어났다.”
퍼처미르는 죽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깨어나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모습으로 자신의 선행과 악행을 측정하는 광장의 저울대 앞으로 몰려가는 장면을 보면서 웃음을 금치 못한다. 전능하신 신께서는 내가 선인인지 악인이지 다 알고 있을 텐데 “한 사람을 천국으로 보내는 데 그토록 많은 ‘수고’가 필요한 이유”가 어디 있을까. 또 그는 묻는다. “이렇게 많은 사람의 ‘선·악행’을 측정하려면 저울이 한 5~10개가 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위대한 일을 시작할 거면 미리 준비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요?” 이 두 대사에는 작가의 무신론적 견해와 소비에트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이 압축되어 있다. 종교가 약속하는 천국과 이념이 약속하는 지상낙원, 그 어느 것도 소설의 시작 부분에서 퍼처미르가 했던 걱정을 씻어주지 못했다. 작가는 이 소설의 끝을 죽었던 퍼처미르가 꿈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처리했는데, 이건 실수 같다. 퍼처미르는 저승을 탐험하고 이승으로 말짱히 살아 돌아오고는 했던 신화와 민담 속의 트릭스터(규범 파괴자)였으니 말이다.
장정일 (소설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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