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 기자의 영화감]재벌 2세와 결혼한 性노동자… 냉혹한 현실 · 편견에 맞서다
21세기식 ‘매운맛’ 귀여운 여인
무효 만들려는 남편부모에 저항
당당히 ‘꽃뱀’ 취급 모멸감 견뎌
인간으로 인정받으려는 투쟁기
“웃음 뒤 절망에 빠뜨리는 얘기”
매주 영화는 개봉하고, 관객들은 영화관에 갈지 고민합니다. 정보는 쏟아지는데, 어떤 얘길 믿을지 막막한 세상에서 영화 담당 기자가 살포시 영화 큐레이션을 해드립니다. ‘그 영화 보러 가, 말아’란 고민에 시사회에서 먼저 감 잡은 기자가 ‘감’ ‘안 감’으로 답을 제안해봅니다.
숀 베이커 감독의 영화 ‘아노라’(11월 6일 개봉)는 시끌벅적한 스트립 클럽에서 시작해 차 안의 숨죽인 정적으로 끝납니다. 생기발랄한 스트리퍼 아노라(미키 매디슨)는 약해져도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인간 아노라가 됩니다.
그 사이 아노라는 재벌 아들과 결혼했다가, 결혼에 반대하는 부모가 무서워 도망간 남편을 찾고, 모두가 불장난이라며 ‘혼인 무효’를 강요할 때 홀로 결혼을 지키려고 발악합니다. ‘귀여운 여인’식 신데렐라 스토리에 냉혹한 현실을 입히고,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본 한 여성의 인정투쟁기입니다.
◇해피엔딩일 리 없는 21세기판 ‘귀여운 여인’
아노라가 러시아 신흥 재벌(올리가르히) 2세 이반(마르크 예이델시테인)과 눈이 맞아 결혼에 골인하기까지를 담은 전반부는 ‘귀여운 여인’의 21세기 버전이라 할 만합니다. 사회의 ‘밑바닥’으로 여겨지는 성노동자가 돈 많은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나 신분 상승을 이룬다는 신데렐라 판타지가 롤러코스터처럼 휘몰아칩니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대저택과 휘황찬란한 파티, 아노라는 불안할 겨를도 없이 순간의 행복에 몸을 맡깁니다.
‘귀여운 여인’에서 줄리아 로버츠가 맡은 여주인공 비비안이 콜걸(직업여성)이란 사실을 잊게 되는 것처럼, 아노라의 처지는 그리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냥 1990년 영화에 비해 더 어려진 선남선녀의 러브스토리 같아요.
다만 백마 탄 왕자가 백만장자 중년 남성에서 러시아 재벌 아들인 철부지 20대로 바뀌었고, 순한 맛인 ‘귀여운 여인’에 비해 돈과 성을 거래한다는 사실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며, 줄기차게 섹스합니다. 그리고 갈등과 화해라는 로맨틱 코미디의 정통적 경로를 밟지 않고, 단 한 번의 위기 없이 숨 가쁘게 결혼을 향해 달려갑니다.
결정적 차이는 여기에 있죠. ‘귀여운 여인’은 비비안이 에드워드(리처드 기어)에게 프러포즈를 받는 행복의 정점에서 이야기를 끝내는 반면, ‘아노라’는 프러포즈를 받고 결혼한 이후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도파민 충만한 ‘로제타’
결혼한 걸 알게 된 이반의 부모가 이반과 아노라를 떼어놓기 위해 하수인 3인방을 보내면서 아노라의 행복은 모래성처럼 힘없이 무너집니다. 달콤한 판타지 뒤엔 냉혹한 현실이 기다립니다.
결혼을 무효로 돌리려는 이반의 부모와 그들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는 하수인들에게 아노라는 자신이 적법한 아내임을 고래고래 소리쳐야 합니다. 러시아에 있던 부모가 미국으로 온다는 얘기를 들은 남편 이반이 혼자 도망가면서 아노라는 ‘낙동강 오리알’이 되죠. 하수인들에게 저항하는 것도, 이반을 찾아 나서는 것도, 이반의 부모에게 ‘꽃뱀’ 취급받는 모멸감을 견뎌야 하는 것 모두 아노라의 몫입니다.
어떠한 상황에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아노라는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아닌 존중받아 마땅할 인간으로 남아요. 스트립 클럽에서 신나게 일하는 여성들을 보여주며 성노동자는 어둡고 힘들 것이란 편견을 깨부순 영화는 이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란 당연한 진리를 일깨웁니다. 나아가 일할 때의 밝았던 모습이 실은 버티려는 아노라의 안간힘이란 생각이 스칩니다. 우리의 삶 역시 즐거울 때도 있지만, 버티려고 괜찮은 척도 하잖아요. 매 순간 계급 격차와 편견에 맞서 인간으로서 존중받기 위해 투쟁하는 아노라는 사실 우리 모두입니다.
하수인 3인방 중 한 명인 이고르(유리 보리소프)의 호의를 아노라는 싸늘한 냉소로 받습니다. 차 안에서 이고르와 이별할 때 아노라는 꼭꼭 눌러왔던 울음을 터뜨립니다. 쾌락을 사고파는 데만 익숙했지, 진정한 애정을 받을 줄도, 돌려줄 줄도 몰랐던 아노라가 연약한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죠. 황금종려상 선배인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1999)가 떠올랐어요. 사회 소외계층에 대한 윤리적 시선이란 측면에서 ‘아노라’는 도파민 충만한 이 시대의 ‘로제타’입니다.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당시 그레타 거윅 심사위원장은 “우리를 웃게 하다가도 절망에 빠뜨리는 믿을 수 없는 영화”라고 평했습니다. 아노라의 흐느낌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건 그녀가 불쌍해서만은 아닐 겁니다. 우리 모두가 아노라처럼 엉엉 울고 싶은 순간이 있기 때문 아닐까요.
이정우 기자 krust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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