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에도 ‘숨 쉴 틈’이 필요하다···전세계도 ‘포용금융’ 실험 중[금융, 사다리를 놓자]

조미덥 기자 2026. 11. 4.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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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60일간 빚독촉 금지, 부채 상담사 전담 지원
호주는 생필품 무이자 지원, 미 고교 금융교육 강화
일본과 이탈리아, 복지 시스템까지 연계
“한국, 취업과 직업 유지 위한 대출 확대 필요”
영국 브리딩스페이스를 운영하는 비영리단체 ‘StepChange Debt Charity’에서 브리딩스페이스 이용 사례를 소개하며 사용한 이미지. StepChange Debt Charity 사이트

포용금융(Financial inclusion)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 주요국도 고민하는 국가적 과제다. 각국은 금융 취약계층의 ‘빚 굴레’에서 빠져나오고,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다양한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영국은 채무자가 최대 60일 동안 빚 독촉에서 벗어나 ‘숨 쉴 틈’을 주고, 부채 상담사를 전담으로 지원해주는가 하면, 호주는 저소득층의 생계에 필요한 물폼과 서비스를 무이자로 이용할 수 있도록 대출을 해준다. 일본과 이탈리아에선 취약계층의 소액 대출시 돈만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사회 복지 시스템에도 연결해준다. 미국은 위기를 사전에 예방코자 금융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한국도 금융 취약계층을 단순히 빚을 탕감하고 대출을 더 해주는 대상에서 보는 데 그치지 않고 부채 부담을 덜고 경제적 자립을 돕는 방향으로 포용금융의 정책적 외연을 넓힐 필요성이 제기된다.

국회가 지난 5월 발간한 ‘주요국의 포용적 금융 정책’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2024년 10월 ‘포용적 금융 국가 전략’을, 영국 정부는 지난해 11월 ‘포용적 금융 전략’을 발표했다. 포용금융을 ‘금융포섭(金融包摂)’으로 부르는 일본은 지난해 금융 취약층의 접근성을 강화하는 ‘금융행정방침’을 내놨다. 어느 나라든 경제 양극화 속에 취약층의 금융 부담을 줄이고 재기를 지원하는 것이 정부의 핵심 과제로 떠오른 것이다.

포용금융 정책은 큰 틀에서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빚을 갚지 못하고 연체에 빠진 채무자를 돕는 채무 조정, 기존 금융권에서 돈을 빌리기 어려운 취약층을 위한 소액 대출, 위기에 빠지지 않도록 사전에 방지하는 금융 교육과 금융 접근성 개선으로 나눌 수 있다.

채무조정 영역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정책은 영국의 ‘브리딩 스페이스’(Breathing space·숨 쉴 공간)라는 제도다. 브리딩 스페이스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 제외)에서 대출과 신용카드 대금, 공과금, 임대료 등이 연체된 개인이 신청할 수 있는 제도다.

대상이 되면 채권자는 최대 60일 동안 이자·연체료·수수료 부과와 재산 압류, 퇴거 통보, 법원 소송 등 강제 추심 절차를 멈춰야 한다. 빚을 갚으라는 독촉도 금지된다. 정책 이름대로 일정 기간 채무자의 ‘숨통’을 틔워주는 것이다.

부채 상담사(Money Adviser)는 자신에게 배정된 채무자가 어떻게 빚을 상환할지 계획을 세워주고 채무 조정도 해준다.

영국엔 정신질환 치료 중인 채무자를 배려하기 위한 특례 제도도 있다. 이들에겐 치료 종료 후 30일이 지날 때까지 이자와 추심을 멈춘다.

영국 정부에 따르면 2021년부터 올해 8월까지 총 41만8723명, 한 해 평균 8만명 이상이 브리딩 스페이스의 도움을 받았다.

영국의 금융·연금 서비스청(Money and Pensions Service)이 공개한 사례를 보면, 영국 남서부에 사는 51세 남성 제러미(Jeremy)는 2021년 양극성 장애(조울증) 증상이 악화하면서 직장을 잃고 주택담보대출 연체로 압류 조치를 당하며 집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브리딩 스페이스 개시 후 압류와 추심이 중단됐다. 그는 치료에 전념할 수 있었고, 증상이 빠르게 호전됐다. 부채 상담사의 도움으로 2만8000파운드(약 5000만원)의 빚 중 1만5000파운드(약 2700만원)를 탕감받았다. 이후 한 자선단체에 정규직으로 취업도 했다.

제레미는 “다시 일하며 평범하게 살 수 있다고 상상도 못했는데, 브리딩 스페이스가 정말 큰 안정감을 줬다”고 말했다.

영국의 한 단체가 ‘브리딩 스페이스’ 제도를 소개하는 영상에서 제도가 개시되면 채권자가 멈춰야 하는 일을 안내하는 장면. 이자와 추심 등이 중단됐다고 돼 있다. 유튜브 화면 캡처

한국에는 법원을 통한 개인회생·개인파산에 이르기 전 신용회복위원회를 통해 연체 중인 채무를 조정하는 제도가 있다. 이재명 정부 들어 보다 적극적인 채무조정을 강조하면서, 올해 상반기 채무조정이 확정된 수가 9만7000건으로 지난해(18만9000건)의 절반을 넘어섰다. 정부는 7년 이상 연체된 5000만원 이하 채권을 정부가 인수해 일괄 소각하는 새도약기금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다만 대부업체 등 채권자가 채무조정을 거부했을 때, 당장 추심에 시달리는 채무자에게 ‘숨통’을 틔워주고 체계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제도는 미비한 상황이다. 브리딩 스페이스 같은 제도 도입을 검토해볼 만한 이유다.

소액대출의 경우 한국은 공공기관인 서민금융진흥원(서금원) 주도로 서금원이 보증을 서고 은행 등 금융사가 대출하는 햇살론, 서금원이 지역의 민간 기관을 통해 생계자금을 지원하는 미소금융, 서금원이 직접 대출을 맡는 불법사금융예방대출 등 다양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재원은 정부와 기업, 금융사 등의 출원으로 마련한다.

해외사례를 보면 소액대출을 해도 ‘다른 방식’으로 운영하는 곳들도 있다.

호주에는 비영리단체 ‘굿 셰퍼드’가 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아 무이자 대출(NILS·No Interest Loans Scheme) 제도를 시행한다. 컴퓨터·휴대전화 등 생활용품, 차 수리, 병원비, 교육비와 자격증 취득, 주택 임차 보증금, 자연재해 복구, 승용차·스쿠터 등 필수 이동수단이 대상이다.

신청자에게 돈을 주지 않고, 해당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에 지급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지급된 돈이 엉뚱한 곳에 쓰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제어 장치다.

호주 비영리단체 ‘굿 셰퍼드’가 시행하는 취약층 대상 무이자 대출(NILS·No Interest Loans Scheme)을 안내하는 이미지. 굿 셰퍼드 제공

영국은 취약층에게 주는 복지급여(국가연금, 저소득층 지원급여, 실업급여 등)를 담보로 쓸 수 있게 하고 있다. 비영리기관인 지역 신용협동조합(credit union)이 취약층에게 소액대출을 했는데, 연체된다면 복지급여 중 일부를 공제받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채무자는 이자를 낮출 수 있고, 대출기관은 건전성 악화 위험을 막을 수 있다. 단, 채무자가 받는 복지급여가 너무 줄지 않게 제한을 두고, 대출기관이 사전에 충분히 안내를 하도록 했다.

일본은 정부가 직접 세금을 재원으로 소액대출제도를 운영한다. 대상·용도를 명확히 규정하고 액수를 세분화한 것이 특징이다.

생활복지자금 대출은 긴급 생활비에 1인 가구는 월 15만엔, 2인 이상은 월 20만엔, 임대차 계약엔 40만엔, 취직·이직을 위한 비용엔 60만엔이 상한이다. 병 간호가 필요한 고령 가구에 대한 부동산 담보 대출 규정도 따로 두고 있다.

일본은 또 보증인이 있으면 무이자로 대출을 해주고 있다.

소액대출 신청자에게 다른 복지 서비스를 연결해주는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

한재준 인하대 파이낸스경영학과 교수가 지난 9월 발표한 ‘글로벌 서민금융의 제도적 발전과 시사점’에 따르면, 이탈리아에서는 서민금융을 이용하려면 반드시 ‘멘토’를 만나야 한다. 멘토는 채무자에게 필요한 재무 상담과 복지 지원, 직업 훈련을 연결해준다. 일본은 대출 신청과 상담 과정에 지역 사회복지협의회가 관여하고, 대출만으로 어려움이 해결되지 않는 가구에 복지 서비스를 연결한다.

최근엔 각국이 국민을 대상으로 한 금융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미국은 금융문해력교육위원회(FLEC)를 만들어 금융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2024년 기준 총 25개 주에서 금융이해력 교과목을 수강해야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금융 교육 웹사이트(MyMoney.gov)를 만들고, 결혼·이혼, 출산, 주택 구매, 취업·퇴직 등 인생의 주요 사건 별로 필요한 재무 전략을 정리해 영어와 스페인어로 제공하고 있다.

호주 정부도 미국과 비슷하게 인생의 단계별 필요한 재무 전략을 소개하는 ‘Money Managed’라는 플랫폼을 만들었는데, 모바일 앱에서 질문과 답변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해 젊은 층의 접근 편의성을 높였다.

한국보다 먼저 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에는 노인의 금융 이용을 원활히 하는 정책이 많다. 각 지역의 우체국에 은행 창구와 자동화 기기를 설치하거나 은행이 노인 고객에게 인지 능력이 저하됐을 때를 대비해 미리 친족 등을 법정대리인으로 지정하는 후견제를 안내하도록 한 것이 대표적이다.

한 교수는 “미국과 유럽은 자생적으로 포용금융을 하던 민간단체를 정부가 활용하는 형태로 제도가 발전했다”며 “한국이 외국 제도를 받아들일 때 이렇게 배경이 다른 점을 감안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은 소액대출 용도에서 생활비 비중이 높은데, 상환 능력이 없는 사람의 생활비는 보조금으로 주고, 취업이나 직업 유지를 위한 대출을 좀 더 과감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국민들의 금융 교육을 위해 만든 웹사이트(‘MyMoney.gov’)에 출생, 진학, 결혼, 주택 구입, 갑작스런 사고, 실업 등 인생의 주요 사건별로 어떤 재무 전략이 필요한지 안내돼 있다. MyMoney.gov 웹사이트 화면 캡처

조미덥 기자 zorr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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