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리포트] 미래 밥상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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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센스] 아이가 한글을 배울 무렵이면 집집마다 벽에 포스터가 붙곤 했다. 가나다 표 옆에는 늘 채소와 과일 그림이 빼곡한 포스터가 짝꿍처럼 함께였다. 오이, 가지, 상추, 토마토. 그림 아래 적힌 이름은 단순하다. 하지만 이름 하나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세계가 있는 법. 상추라고 다 같은 상추는 아니다. 잎의 모양과 색깔은 물론 맛과 식감, 더위와 병충해를 견디는 힘까지 품종마다 제각각이다. 우리가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는 농산물 뒤에는 무궁무진한 품종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우리가 먹는 농산물이 처음부터 지금의 모습이었던 것은 아니다. 농부가 작물을 기른다면, 그 시작인 씨앗을 개발하는 사람도 있다. 바로 육종가다. 서로 다른 장점을 지닌 작물을 교배하고, 여러 세대에 걸쳐 원하는 특성을 골라내 새로운 품종을 만든다. 이 과정에 10년 안팎의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누군가는 한여름 땡볕에도 속이 단단하게 차는 배추를, 누군가는 베어 물면 과즙이 터지는 과일을 개발한다. 그렇게 탄생한 품종은 농부의 밭에서 자라고, 수확한 농산물은 시장과 마트를 거쳐 우리 식탁에 오른다. 무심코 장바구니에 담는 채소 한 포기에도 오랜 연구의 시간이 담겨 있다.

지난 10월 전북 김제에서 열린 '2026 국제종자박람회'는 평소 접하기 어려운 종자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자리였다. 올해로 10회를 맞은 박람회는 '오늘의 씨앗, 내일을 키우다'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국내외 종자기업과 연구기관 등 113개 기업과 기관이 참여했고, 야외에는 약 4헥타르 규모의 전시포가 펼쳐졌다. 45개 작물, 461개 품종이 자라고 있었다. 무와 배추, 양배추부터 고추, 오이까지. 실내에서는 종자산업의 새로운 기술과 다양한 유전자원을 소개하고, 야외에서는 실제 재배한 작물들을 직접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전시장을 둘러보는 농업인들의 모습도 눈길을 끌었다. 올해 박람회에는 전국 26개 농업인 단체에서 1,470여 명이 단체 참관을 신청했다. 농업인들은 실내 전시관과 야외 전시포를 오가며 품종마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 꼼꼼히 살폈다. 이들에게 박람회는 다음 농사에 심을 작물을 직접 비교하고 선택할 기회다. 같은 작물이라도 품종에 따라 수확량과 재배 조건이 달라지니 씨앗 하나를 고르는 일에도 신중할 수밖에 없다. 지금 전시포에서 자라는 작물이 내년 어느 농장을 거쳐 누군가의 식탁에 오를지도 모르는 일이다.

개막식에서는 '대한민국 우수품종상' 시상식도 열렸다. 올해는 29개 출품 품종 가운데 8개가 수상했고, 최고상인 대통령상은 NH농우바이오의 배추 '청명가을'에 돌아갔다. 가을 고온에도 속이 단단하게 차는 품종으로, 현재 국내 가을배추 종자시장의 29%를 차지하고 있다. 수박, 수수, 쌀, 단감 등 다른 수상 품종도 안정적인 재배와 더 나은 맛, 달라진 입맛을 겨냥해 개발됐다. 그중 우리의 식생활과 맞닿아 있는 여섯 가지 품종을 골라 살펴봤다.

새로운 품종에는 각자 이름과 사연이 있다. 단감 '감풍'에는 단감 산업에 새바람을 일으키길 바라는 뜻이 담겼고, 쌀 '새청무'는 '청무'와 '새누리'를 교배해 탄생했다. 낯선 이름 뒤에 담긴 이야기를 알고 나면, 익숙한 작물들도 조금 달리 보인다.
1. 청명가을 | 더위에도 끄떡없는 알찬 김장 배추
가을에도 무더위가 이어지는 요즘, 김장 배추 농사도 쉽지만은 않다. NH농우바이오가 개발한 '청명가을'은 높은 기온에도 속이 단단하게 차고 뿌리혹병에 강한 품종이다. 수확과 출하 시기를 유연하게 조절할 수 있어 변덕스러운 날씨에도 배추를 안정적으로 생산하는 데 도움이 된다.
2. 맘모스꿀 | 한겨울에도 먹는 꿀맛 수박
수박을 꼭 한여름에만 먹으란 법은 없다. 팜한농이 개발한 '맘모스꿀'은 기온이 낮은 시기에도 열매가 잘 자라 겨울철 재배에 적합한 품종이다. 씨앗이 비교적 작아 먹기 편하고 아삭한 식감도 갖췄다. 개발을 이끈 남기철 육종가는 올해 신설된 '후계육종가상'을 받았다.
3. 청풍찰 | 잡곡밥의 쫄깃함에도 비밀이 있다
잡곡밥에 넣어 먹는 수수도 품종에 따라 식감이 달라진다. 충청북도농업기술원이 개발한 '청풍찰'은 찰기가 강하고 쫄깃해 밥에 섞거나 수수팥떡을 만들 때 잘 어울린다. 키가 작아 쉽게 쓰러지지 않고 기계로 수확하기에도 편리하다. 맛과 재배 편의성을 함께 고려한 품종.
4. 새청무 | 오늘 먹은 삼각김밥의 쌀은?
편의점 삼각김밥에도 국내에서 개발한 쌀이 쓰인다. 전라남도농업기술원이 7년에 걸쳐 개발한 '새청무'는 쌀알이 크고 윤기와 찰기가 좋은 것이 특징이다. 올해 3월부터는 GS25 도시락과 삼각김밥 등 간편식 원료로도 공급되고 있다.
5. 감풍 | 한 손에 잡기 힘든 왕단감
보통 단감보다 두 배가량 큰 단감이 있다. 국립원예특작과학원이 개발한 '감풍'은 평균 무게가 약 410g에 달한다. 과즙이 풍부하고 당도가 높으며 아삭한 식감까지 갖췄다. 익숙한 단감의 크기와 맛을 새롭게 보여주는 품종이다.
6. 19ITP4719 | 유럽에서도 찾는 달큰한 단고추
국내에서 개발한 씨앗이 해외 농장에서도 자라고 있다. NH농우바이오가 개발한 단고추 '19ITP4719'는 당도가 높고 열매가 잘 맺히며 여러 병에도 강한 품종이다.
*한약재로 친숙한 감초 '원감'과 흰 국화 '백강'도 함께 수상했다.
변화는 밭에서 멈추지 않는다. 불안정한 식량 시장부터 새로운 푸드테크, 프린터로 차리는 미래의 아침까지. 국제 곡물 시장 전문가에게 앞으로 달라질 우리의 식탁에 대해 물었다.
김민수 | 국제 곡물 시장 전문가
한국사료협회에서 국제 곡물 구매와 시장 조사 업무를 담당했으며, 현재 국제 곡물 선물시장 분석가로 활동하고 있다. 충북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농업·경제 전문 매체에 국제 곡물 시장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미래 식량을 설계하라>의 저자.

스크린 밖으로 나온 식량 이야기

영화 <설국열차>에서 꼬리칸 사람들이 먹던 검은 단백질 블록. 알고 보니 바퀴벌레로 만든 것이었다. <마션>의 주인공은 화성 기지에서 직접 감자를 길러 살아남는다. 영화니까 가능한 이야기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곤충 단백질은 새로운 식재료로 연구되고 있고, 햇빛 대신 인공조명 아래에서 채소를 키우는 식물공장도 이미 가동 중이다. 영화 속 낯선 풍경이 조금씩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먹거리를 생산하는 새로운 방식이 주목받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지난 8월 네팔과 중국 티베트 접경의 히말라야 일대를 덮친 대홍수부터 세계 곳곳에서 이어지는 전쟁과 이상기후까지. 기후와 국제 정세가 불안정해지면서 식량을 어떻게 생산하고 공급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오랫동안 국제 곡물 시장을 분석해온 김민수 전문가는 최근 <미래 식량을 설계하라>를 펴냈다. 책에서도 SF 영화를 통해 식량 문제를 이야기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세계 식량 시장은 2000년을 전후로 '안정'에서 '불안정'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엘니뇨와 라니냐 같은 기상이변이 반복되면서 밀과 옥수수 등 주요 곡물의 생산도 영향을 받고 있다. 밀값이 오르면 빵값이, 사료용 옥수수값이 오르면 삼겹살과 우유, 달걀값도 덩달아 오른다. 농산물 가격 상승이 전체 물가를 끌어올리는 '애그플레이션'이다. 커피와 초콜릿도 예외는 아니다. 아침마다 마시는 라테 한 잔의 가격까지 영향을 받는다.

우리 식탁도 세계 곡물 시장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밥상에서 쌀이 차지하던 자리를 고기가 넓혀가는 동안, 가축 사료로 쓰는 주요 곡물은 대부분 해외에서 들여오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세계 식량 시장은 '기울어진 운동장'입니다." 곡물을 대량으로 수출하는 나라는 손에 꼽을 만큼 적고, '곡물 메이저'라 불리는 대형 기업들은 국제 유통망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김민수 전문가가 강조하는 '식량 안보'란 누구나 필요한 식량을 언제든 안정적으로 구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식량 안보라는 말은 낯설어도, 우리가 먹는 음식이 어디서 오고 무엇에 영향을 받는지 아는 것부터가 출발점일 것이다. 2050년 세계 인구는 약 97억 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더 많은 사람의 식탁을 채우기 위해 농업에서도 새로운 생산 방식을 모색하고 있다.

밭에서 식물공장으로, 고기에서 대체 단백질로
그렇다면 앞으로 농사는 어떻게 달라질까. 김민수 전문가가 그리는 미래의 농촌에서는 인공지능을 활용한 농업 로봇과 자율주행 농기계, 드론이 활약한다. 작물의 상태를 살피고 물과 영양분을 공급하는 일부터 수확까지 기계가 거든다. 사물인터넷 기술을 활용하면 재배부터 가공과 유통까지 농업의 여러 과정을 디지털로 관리할 수 있다.
농사를 짓는 장소도 달라진다. 곡물은 지금처럼 주로 너른 밭에서 자라는 한편, 일부 과일과 채소는 실내농업이나 수직농업으로 재배 영역을 넓혀갈 전망이다. 빛과 온도, 습도를 조절해 작물이 자라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제어환경농업'이다. 상추 같은 잎채소는 여러 층으로 쌓아 올린 재배시설에서도 키울 수 있다. 바깥 날씨의 영향을 줄여 사계절 내내 수확하는 것도 가능하다.

식재료를 얻는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김민수 전문가는 기존 농업에 더해 살아 있는 세포를 배양하는 '세포공장' 등에서 새로운 식재료를 생산하는 시대를 내다본다. 식물성 단백질로 만든 대체식품은 이미 우리 식탁에 올라와 있다. "푸드테크의 급속한 발전 덕분에 과거 '인조 고기', '가짜 고기'로 불렸던 대체식품들은 이제 일반 가공식품과 거의 구분하지 못할 수준까지 진화했습니다." 곤충 단백질과 배양육, 미생물 단백질도 차세대 먹거리로 주목받고 있다.
그가 특히 눈여겨보는 분야는 '합성생물학'이다. 생물학과 공학을 결합해 생물의 기능을 설계하고 활용하는 기술이다. 미국의 푸드테크 기업 퍼펙트데이는 유전자를 설계한 미생물을 활용해 젖소 없이도 우유에 들어 있는 유청 단백질을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아직 생산비용과 기술적 한계가 남아 있고 상용화 단계도 제각각이지만, 식재료를 얻는 방법은 지금보다 훨씬 다양해질 것으로 보인다.
2056년, 어느 평범한 아침 식사

김민수 전문가는 미래의 소비자를 설명하며 '프로슈머(Prosumer)'라는 개념을 꺼냈다. 앨빈 토플러가 <제3의 물결>에서 제시한 말로, 생산자(Producer)와 소비자(Consumer)를 합친 것이다. 완성된 식품을 구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생산에도 직접 참여하는 사람을 뜻한다. 그는 앞으로 소비자가 자신의 몸에 필요한 음식을 직접 설계하고 만들어 먹는 시대가 올 것으로 내다본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침대가 오늘의 식단을 알려준다면? 30년 뒤의 식사 풍경을 묻자 그는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가보자며 뜻밖에도 침실 이야기부터 꺼냈다. "과거 '침대는 과학'이라던 광고 카피가 수사에 그치지 않고 진짜로 과학이 될 것이라 봅니다." 그가 그리는 아침은 꽤 구체적이다. '스마트 슬립 케어' 기능을 갖춘 침대에서 일어나면 밤새 수집한 건강 데이터를 분석한 리포트가 나온다. 부족한 영양소를 파악해 그날 필요한 식단까지 짜준다.
아침 준비는 싱거울 만큼 간단하다. 스마트폰 앱으로 메뉴와 레시피를 고르면 주방의 3D 푸드 프린터 복합기가 요리할 채비를 마친다. 냄비와 프라이팬도 필요 없다. "신선 냉장고와 3D 프린터 복합기, 이 두 가지만 있으면 주방 시설은 그것으로 끝입니다." 냉장고에서 잉크 역할을 하는 식용 카트리지를 꺼내 프린터에 끼우고 접시를 올려두면 된다.

이제 프린터가 일할 차례다. 침대에서 전송된 건강 데이터에 맞춰 반죽과 분말, 액체 형태의 재료가 섞이고 층층이 쌓여 음식의 모양을 갖춘다. 마지막으로 열을 가하면 한 끼가 완성된다. 식물성 단백질과 곤충 단백질, 배양육 등이 재료로 활용된다. 그렇다면 맛은 어떨까. 그는 미래의 푸드 프린팅 기술이 기존 요리와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맛과 식감, 풍미를 구현할 것으로 기대한다.
먹는 재미도 빠지지 않는다. 그날 몸 상태에 맞춰 세상에 없던 조합의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매일 새롭게 설계되는 지속 가능한 식탁을 두고 "30년 후 우리가 맞이할 가장 보편적이고 따뜻한 아침 식사의 풍경"이라고 표현했다.
물론 모든 가정의 주방에 전자레인지 대신 프린터가 놓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30년 후 식탁에 오를 음식의 종류와 만드는 방법이 지금보다 훨씬 다양해질 거라는 즐거운 상상만큼은 현실이 되지 않을까.
강주희 기자 juhee@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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