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곁에 있는 경청 : ‘마을 경청 활동가’가 여는 일상 속 청취

김나솔 2026. 10. 30.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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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틔우는 제주의 미래] ⑯ 일상 속 청취
1500만이라는 화려한 관광객 숫자 뒤에 소외된 현장의 질문에 답하고자 합니다. "우리 마을은 무얼 먹고 살아야 할까?", "우리의 목소리는 왜 가닿지 않을까?" 외부 자본에 의존하는 성장을 넘어, 마을 스스로 일어서는 '내발적 발전' 방향을 탐색하고 도민 중심, 현장 중심의 소통방식을 모색합니다. 현장의 목소리에 국내외 혁신 사례를 더해, 자립하는 읍면 경제와 도민 주권의 비전을 그려냅니다. [편집자 글]
동네 마트에서 계산원이 안부를 묻는 모습. (AI 생성 이미지)

지난 회에서는 퐁낭 아래와 동네 카페 앞으로 찾아가는 공론장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조차 나오지 못하는 도민이 있다. 홀로 사는 어르신, 거동이 불편한 이웃, 새벽 물질과 밭일로 하루가 빠듯한 분들이다.

제주는 지난해 주민등록 기준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처음 20%를 넘었고, 혼자 사는 노년 가구는 2024년 2만5천 가구로 9년 새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찾아가는' 경청을 넘어 '곁에 있는' 경청이 필요한 이유다.

말하지 않는다고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공청회 발언자는 주민 전체를 대표하지 못한다. 미국 보스턴대 연구진이 매사추세츠주 97개 시·읍의 회의록을 분석한 결과, 발언자는 지역 유권자보다 나이가 많고, 오래 거주했으며, 남성일 가능성이 높았다.

민원 창구를 열어 두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 미국 뉴욕대 연구진이 캔자스시티의 생활민원 전화(311) 기록을 분석해 보니, 저소득층 동네는 실제 불편이 더 큰데도 신고는 더 적었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이 문제가 없는 곳은 아니다. 누군가는 먼저 찾아가 물어야 한다. "요즘 어떠세요?"

안부에서 시작하는 경청 : 해외의 세 갈래 길

첫 번째 길은 이웃이 '레이더'가 되는 방식이다. 2008년 바르셀로나의 한 동네에서 시작된 '레이더스(Radars)'는 이웃과 상점, 약국이 홀로 사는 어르신의 일상을 살핀다. 변화가 보이면 그 신호가 행정의 사회서비스로 이어지고, 자원봉사자는 정기적으로 안부전화를 건다.

두 번째 길은 제도로 뿌리내린 동네 위원이다. 일본의 민생위원은 법에 근거해 위촉되는 지역 자원봉사자로, 약 22만명이 홀로 사는 어르신과 장애인의 안부를 살피고 필요한 서비스로 연결한다.

세 번째 길은 들은 이야기를 행정의 변화로 잇는 방식이다. 호주에서 시작해 영국으로 퍼진 '지역 코디네이터'는 1만명 안팎의 생활권마다 배치돼 주민 곁을 지키고, 주민의 경험을 정책 책임자에게 전해 제도 개선을 이끈다. 영국 5개 대학의 공동 평가는 이 방식이 신뢰를 쌓고 돌봄 위기를 미리 막는다고 밝혔다. 영국이 코로나19 시기에 크게 확대한 '커뮤니티 챔피언'도 행정의 말을 이웃에게 전하고 이웃의 사정을 행정에 알리는 다리가 됐다.

제주형 '마을 경청 활동가'의 네 가지 원칙

제주에는 이미 바탕이 있다. 리 단위 마을공동체와 해녀회·부녀회·노인회, 그리고 마을 약국과 동네 마트, 재활용 도움센터처럼 사람들이 날마다 오가는 곳이다.

첫째, 안부가 먼저다. 설문지를 들고 가면 주민은 경계한다. 활동가의 첫 임무는 의견 수집이 아니라 관계 맺기다.

둘째, 마을 사람이 맡는다. 마을에서 신뢰받는 분을 경청 활동가로 위촉하고, 약사와 상점 주인은 일상의 변화를 알리는 '마을 레이더'로 함께하게 하자.

셋째, 들은 이야기는 행정에 닿아야 한다. '경청 노트'로 가볍게 기록하고, 어르신 대신 민원을 접수하며, 매달 읍면 주민자치회에 마을 동향을 보고하자. 서랍에 머물면 경청은 요식행위가 된다.

넷째, 활동가를 지원하고 원칙을 세운다. 활동비와 교육, 정기모임이 필요하다. 경청이 감시로 비치지 않도록 동의와 개인정보 보호 원칙도 분명히 해야 한다.

복지의 안부에서 자치의 경청으로

우리에게도 찾아가는 복지 상담, 명예사회복지공무원, 43개 읍면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의 위기가구 발굴 활동이 있다. 다만 지금까지는 위기 가구를 찾는 '복지의 눈'에 머물렀다. 이제 마을의 불편과 바람, 정책에 대한 생각까지 듣는 '자치의 귀'로 넓히자. 본격 전환을 준비하는 제주형 주민자치회가 그 중심에 설 수 있다.

스스로 말하고 싶은 도민에게는 전화 한 통, 문자 한 줄로 의견을 전할 문턱 낮은 창구도 필요하다.

공론장이 행정의 문턱을 낮췄다면, 경청 활동가는 그 문턱을 일상 속으로 옮겨 놓는다. 가장 작은 목소리는 회의실이 아니라 안부를 묻는 대화에서 비로소 들린다.

김나솔

주식회사 제주스퀘어 대표이사로, 지역의 자산을 연결하고 비즈니스로 만들어가는 기획자이자 경영자이다. 제주스타트업협회(JSA) 부회장, 제주사회적협동조합협의회 사무국장, 제주도정소식지 편집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제주의 로컬 생태계와 공동체 활성화를 위해 활발히 활동해 왔다. 온라인/모바일 기획, 콘텐츠 기획, 로컬 브랜딩, 리빙랩 기획운영 등다양한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현장 중심의 정책과 솔루션을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