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으로 불렸던 사람들, 베를린의 역사가 되다

아르떼 2026. 10. 29.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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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변현주의 Why Berlin
예술에서 드러나는 베를린 이주의 역사와 기록
그룹 전시<Kreuzberg (크로이츠베르크)>
피나르 외렌지, <Gurbet is a home now>, 2021, 영화 스틸컷. / 사진. © Heide Moldenhauer

지난 9월, 베를린 주의회 선거에서 좌파당(Die Linke)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제1당이 되었다. 선거를 이끈 엘리프 에랄프(Elif Eralp)는 튀르키예계 정치인으로, 그의 부모는 튀르키예에서 노동조합과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다 1980년 군사 쿠데타 이후 독일로 이주하였고, 이듬해 뮌헨에서 에랄프를 낳았다. 이민자의 자녀인 그는 베를린 최초의 튀르키예계 시장이 될 수도 있다.

튀르키예계 작가 14명을 비롯해 약 50명의 작가가 참여한 그로피우스 바우의 그룹전 <Kreuzberg: Kunst und Migration seit 1960 (크로이츠베르크: 1960년 이후 예술과 이주)>는 예술을 통해 베를린 이주의 역사를 살펴본다. 전시가 제목으로 삼은 크로이츠베르크는 그로피우스 바우가 위치한 지역이자, 많은 이주민이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자신의 존재와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며 권리를 주장해 온 장소이다. 130여 점의 전시 작품은 이곳에서 삶을 살아낸 이들의 역사를 보여준다.

블라시스 카니아리스, <Kind>, 1980. 바르샤바 현대미술관 소장 / 사진. © Rosa Merk

전시장 입구에서 처음 관객을 맞는 것은 세발자전거를 탄 아이의 형상이다. 블라시스 카니아리스(Vlassis Caniaris)의 <Kind(아이)>(1980)의 자전거 바퀴는 바람이 빠져 있고, 뻗은 손의 바람개비도 멈춰 있다. 아이는 활짝 열린 몸짓을 하고 있지만 주위의 사물들은 어딘가 어긋나 있다. 이러한 어긋남은 전시가 보이는 이주의 역사를 한눈에 느끼게 한다. 새로운 곳에서 삶을 시작하려는 이들과 그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부족했던 사회 사이의 간극이다.

루드밀라 세프리예도바 마테이코바, <Metro>, 2001-2002. / 사진. © Rosa Merk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뒤 크로이츠베르크는 서베를린의 가장자리, 다시 말해 장벽 가까이에 있는 지역이 되었다. 빈 건물과 낮은 임대료는 이주노동자, 예술가, 학생, 집 없는 이들을 불러 모았다. 하지만 이들이 독일에 오게 된 이유는 다양했다. 생계를 위해, 학업이나 작업을 위해, 혹은 정치적 탄압을 피해 온 이들도 있었다. 전시는 이러한 다양성을 ‘이주민’이라는 하나의 명칭에 담을 수 있는지 질문한다.

메흐랑기스 몬타자미다부이(Mehrangis Montazami-Dabui)의 필름 <Analphabeten in zwei Sprachen(두 언어의 문맹자들)>(1975)은 그 명칭이 아이들에게 남긴 영향을 보여준다. 튀르키예어와 독일어, 그 어느 언어로도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한 아이들의 상황이 교사와 부모, 학생들의 증언을 통해 드러난다. 제목은 일견 언어를 익히지 못한 아이들의 문제로 보이게 하지만, 사실 필름은 과밀한 외국인 특별학급과 분리교육을 보여주며 그 책임의 방향을 재고하게 한다.

에스더 프리드먼(Esther Friedman), <크로이츠베르크>, 1978/2026. / 사진. © VG Bild-Kunst, Bonn 2026

필름의 반대편에 설치된 에스터 프리드먼(Esther Friedman)의 작은 사진 3점은 아이들을 다른 모습으로 그려낸다. 카메라 앞의 소녀들은 장난스럽게 자신을 드러내며 서로 어울린다. 몬타자미다부이의 필름과 사진 사이를 오가다 보면 한 시대의 기록 역시 다르게 쓰일 수 있음을 깨닫는다. 무엇을 기록하느냐에 따라 같은 지역에 사는 아이가 도움을 받아야 할 존재가 되기도, 자기 모습을 결정하는 이가 되기도 한다.

모니카 지베킹, <지멘스 노동자들과의 집단 초상>, 1973, 쾰른, 루트비히 미술관. / 사진. © VG Bild-Kunst, Bonn 2026

이처럼 누구를 어떤 모습으로 기록하느냐의 문제는 노동자를 그린 작품에서도 이어진다. 모니카 지베킹(Monika Sieveking)의 <Group Portrait with Siemens Workers(지멘스 노동자들과의 집단 초상)>(1973)에는 서로 다른 표정과 시선을 지닌 이들이 모여 있다. 작가는 지멘스 공장의 노동자들과 동료 작가들을 집으로 초대해 초상을 그렸다. 회색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들과 예술이란 노동을 수행하는 작가들은 노동이라는 공통 요소로 모여 직업을 막론하고 연대를 이룬 모습으로 묘사된다.

당시 서독으로 온 노동자들은 흔히 ‘가스트아르바이터(Gastarbeiter)’, 이른바 초청 노동자로 불렸다. ‘손님’과 ‘노동자’가 결합된 이 명칭은 일정 기간 일한 뒤 본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전제를 포함한다. 그러나 노동을 위해 건너온 이들은 이곳에 가족을 이루고 이웃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 왔다.

이들의 초상은 한국의 파독 간호사와 광부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1960년대 이들이 서독의 병원과 탄광에서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며 얻은 대가를 송금하여 한국의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지베킹의 작업은 그러한 기여 뒤에 낯선 사회에서 일하며 겪어내었을 그들의 삶과 개개인의 얼굴을 환기한다.

아티예 알튈, <자화상 3>, 1990. / 사진. © Ayşe Tunca

전시는 이주노동을 이야기할 때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들의 삶과 경험도 다룬다. 1970년대 초 서베를린 이주노동자의 약 40%를 여성이 차지했지만, 그들의 다양한 이력은 ‘여성 초청 노동자’라는 이름 아래 묶이곤 했다. 아티예 알튈(Atiye Altül)은 공장에서 일하며 미술을 공부했던 작가이다. 그의 <Self-Portrait(자화상)>(1990)은 정면을 응시하는 강렬한 시선으로, 그러한 여성 노동자의 삶을 관객이 마주하게 한다.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로서의 삶과 예술가로서의 삶이 한 사람 안에 담겨져 있다.

이 외에도 <크로이츠베르크>는 이주 예술가들이 서로 만나고 교류했던 관계도 드러낸다. 앞서 언급한 지베킹의 초상 작업에 조각가 메흐메트 악소이(Mehmet Aksoy)가 참여했던 것처럼, 예술가들의 만남은 작업으로 이어졌고, 전시에 참여한 상당수의 작가들이 같은 지역에서 서로를 알고 교류해 왔다고 한다. 크로이츠베르크는 이들에게 그림의 소재이면서 누군가와 만나고 예술 작업을 이어 갈 수 있는 삶의 장소이기도 했다.

하네피 예테르, <베를린의 피크닉>, 1975. / 제공. Künstlerhaus Bethanien

전시는 단지 이주민의 삶과 역사를 노동과 차별로만 나타내지 않는다. 하네피 예테르(Hanefi Yeter)의 <Picnic in Berlin(베를린의 피크닉)>(1975)은 그러한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마리아넨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라디오를 듣거나 음식을 먹으며 공원에서 피크닉을 즐기고 있다. 이들은 일을 마친 뒤 친구를 만나고, 그림을 그리며,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면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일상에서든, 사회에서든, 미술계에서든, 잘 보이지 않는 이들이 있다.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제도 속에서 충분히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크로이츠베르크>는 흩어져 있던 작품과 기억을 모아, 미술관이 어떤 삶과 역사, 작업을 기록해 왔는지 돌아보게 한다. 이들의 작품을 베를린 미술사의 일부로 읽기 시작할 때, 우리가 알고 있던 도시의 역사도 달라질 것이다.

베를린=변현주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