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리다임 상장 접은 SK하이닉스, 중복상장 규제가 바꾼 자회사 공식
LG엔솔에서 HD현대로보틱스까지 출구 전략 재편
국내 대기업은 오랫동안 유망 사업을 자회사로 떼어내 따로 상장하는 방식으로 성장 자금을 마련해 왔다. 모회사의 지배력은 지키면서 외부 자본을 끌어올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신성장 동력을 창출하기 위한 다양한 가능성 타진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모회사 주주의 몫이 줄어든다는 불만이 고조되며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무엇보다 올해 들어 정부가 중복상장을 원칙적으로 막는 제도를 내놓으며 시장의 규칙 자체가 달라지는 분위기다.

솔리다임 상장 철회의 행간
업계 등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23일 공시를 통해 솔리다임의 프리IPO와 기업공개(IPO) 검토를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솔리다임의 생산능력 확충과 경쟁력 강화가 여전히 중요한 과제지만 투자 시기와 규모 재원조달 방식을 검토해 솔리다임의 성장과 기존 주주의 이익을 함께 키울 방안을 계속 찾겠다고 밝혔다.
솔리다임은 SK하이닉스가 2020~2021년 인텔의 낸드플래시와 SSD 사업을 약 90억달러에 사들여 출범시킨 미국 법인으로 AI 데이터센터용 기업용 SSD를 주력으로 한다. 시장에서는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가 대표 주관사로 거론됐고 조달 규모 약 100억달러에 기업가치 최대 1000억~1500억달러, 상장 시점은 이르면 2027년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솔리다임의 기업가치는 SK하이닉스 시가총액의 13% 안팎으로 추정된다.
두 회사의 실적은 견조하지만 금융시장 변동성이 커지며 반도체 기업 주가가 전반적으로 조정을 받고 있다는 점도 중단 사유로 들었다. 다만 시장에서는 이번 '후퇴'를 두고 중복상장 논란을 철회의 핵심 배경으로 보고 있다. 솔리다임이 SK그룹 반도체 지배구조의 가장 아래에 있는 회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SK그룹의 반도체 지배구조는 지주회사 SK㈜에서 중간지주사 SK스퀘어와 SK하이닉스로 이어지고 SK하이닉스가 미국에 세운 투자법인 AI컴퍼니를 거쳐 솔리다임에 닿는다. 이 가운데 SK㈜와 SK스퀘어 SK하이닉스는 국내 증시에 상장돼 있고 SK하이닉스 미국주식예탁증서(ADR)도 7월 뉴욕 증시에 입성했다.
여기에 솔리다임까지 상장하면 하나의 사업을 두고 상장사 5곳이 층층이 얽히게 된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이 이를 사실상 5단 중복상장이라고 비판한 이유다.
특히 주주들이 반발한 이유는 지분 희석 때문이다. 솔리다임이 신주를 발행해 외부 자본을 받으면 SK하이닉스의 간접 지분율이 낮아지고 미래 이익에서 기존 주주가 가져갈 몫도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다. 거버넌스포럼의 경우 SK하이닉스가 인텔 사업부를 인수한 후 수년간 대규모 적자를 견딘 끝에 이제야 수익을 내기 시작한 상황에서 오래 기다려 온 일반주주의 권익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강조하기도 했다.
논란이 지배주주의 이해관계 문제로도 번지며 상황이 심각해졌다. 당장 포럼은 최태원 회장이 AI컴퍼니와 솔리다임에 대한 통제력은 그대로 두고 희석 비용만 SK하이닉스 일반주주에게 넘기는 구조라고 비판했다. 최 회장은 7월 말 개인 명의로 SK하이닉스 보통주 3620주 약 47억8564만원어치를 장내 매수하기 전까지 SK㈜와 SK스퀘어를 거친 1.2% 안팎의 간접 지분만 갖고 있었다는 설명이다.
자금 조달이 필요하다는 명분에도 의문이 제기됐다. SK하이닉스가 이미 막대한 현금을 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포럼은 SK하이닉스가 올해 167조원 내년 326조원의 잉여현금흐름을 낼 것으로 보여 자금 수요라는 전제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영곤 토스증권 리서치센터장도 SK하이닉스가 2분기 역대급 영업이익을 낸 데다 ADR 발행으로 대규모 자금을 확보한 만큼 상장 목적을 투자재원 마련으로만 보기는 어렵다고 분석했다.
국회에서는 공시 형평성 문제도 불거졌다. SK하이닉스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는 자회사 상장이 모회사 주주에게 미칠 부정적 영향을 상세히 설명했지만 국내 주주에게는 같은 설명을 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웨이퍼 공급가격 등을 놓고 SK하이닉스 주주와 솔리다임 주주 사이에 이해충돌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나왔다.
결정적인 변수는 금융당국이었다. 올해 시행된 중복상장 가이드라인이 해외 상장까지 규율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금융위원회와 한국거래소가 마련한 규정과 가이드라인은 8월3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이 규제는 물적분할뿐 아니라 인수와 신설로 생긴 모자회사 관계에도 적용되고 자회사를 해외 거래소에 상장할 때도 같은 의무가 부과된다.
중복상장에 해당하면 모회사는 주주 영향평가와 주주보호 방안 마련, 주주소통 또는 주주동의 확인, 이사회 찬반 결의와 자회사 통지, 공시 등 5대 의무를 져야 하고 이 과정은 독립 특별위원회의 사전 심의를 거쳐야 한다. 이사회가 의무를 어기면 상장공시위원회 심의를 거쳐 10억원 이내의 위약금과 매매거래정지 조치를 받는다. 금융당국 수장들은 솔리다임을 이 가이드라인의 적용 대상으로 판단했다.
물론 반론도 있다. 당장 미래에셋증권은 솔리다임 지분을 팔아 투자금을 모으면 약 150억달러 규모의 미국 투자 여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추산했다. 서버용 고성능 제품 대부분이 SK하이닉스 본사의 설계와 생산 기술에 기대고 있어 지분 일부가 외부로 나가도 기업가치 영향은 크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SK하이닉스의 솔리다임 승부수가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다. 다만 최종적으로 SK하이닉스가 철회를 선언, 솔리다임을 둘러싼 이슈는 제자리를 찾아가는 분위기다.
과거의 트라우마
정부가 중복상장 가이드라인이 해외 상장까지 규율 대상으로 삼는 등 강도 높은 규제를 꺼내 든 배경에는 과거의 학습 효과가 있다. 자회사 상장이 이어질 때마다 모회사 주주들이 고스란히 손실을 떠안았다는 논란이 커졌기 때문이다.
중복상장 문제가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른 계기는 LG에너지솔루션 상장이었다.
LG화학은 당시 배터리 대장주로 불렸다. 이런 가운데 LG화학이 가장 유망한 사업을 떼어내자 주주들의 반발이 거셌다. LG에너지솔루션은 2020년 10월 LG화학이 전지사업본부 분사를 확정한 뒤 그해 12월 물적분할 방식으로 세워졌다. 개인주주들은 분할에 반대했지만 지분율이 10% 수준에 그쳐 결정을 바꾸지 못했고 비슷한 지분을 가진 국민연금도 반대 의사를 냈다. 지주사 LG가 보유한 30.06%를 포함해 LG 측 우호지분만 30.1%에 달해 안건 통과는 처음부터 어렵지 않다는 관측이 나왔다.
상장이 다가오자 LG화학 주가는 내리막을 걸었다. 투자자들이 모회사 대신 자회사를 직접 사면 되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조현렬 삼성증권 연구원은 LG화학 주가가 LG에너지솔루션 상장을 앞두고 한 달 사이 14% 떨어졌다며 고성장 자회사라는 대체 투자처가 생기고 자금 흐름의 불확실성이 커진 탓이라고 분석했다. LG화학 주가는 물적분할 발표 뒤 고점 대비 39% 넘게 하락했다. 상장 전에는 LG에너지솔루션 이익 전부가 LG화학에 반영됐지만 상장 이후 지분율이 80%대로 낮아지면서 기존 주주의 가치가 줄어든다는 지적이 나왔다.
물론 LG에너지솔루션은 흥행에 성공했다. 상장 당시 108억달러 규모 자금을 조달해 국내 최대 IPO 가운데 하나로 기록됐다. 그러나 상장 당일 공모주 투자자들이 차익을 거두는 사이 LG화학 종목토론방에는 대주주만 이득을 보는 분할 상장을 막아야 한다는 주주들의 성토가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졌다.
여파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행동주의펀드는 LG화학 주가가 지나치게 저평가됐다고 주장하며 그 원인 가운데 하나로 LG에너지솔루션 상장을 지목하고 있다. 다른 기업들은 당시부터 방어 장치를 마련했다. 지주회사 전환을 앞두고 있던 포스코는 철강 자회사를 상장하려면 절대다수 주주의 동의를 받도록 자회사 정관에 명시했다.
LG그룹의 IT서비스 계열사 LG CNS도 상장 과정에서 같은 논란에 휩싸였다. 사업부를 떼어낸 회사는 아니었지만 지주사 LG의 핵심 자산이었기 때문이다. LG CNS의 최대주주는 지분 49.95%를 가진 LG이고 맥쿼리PE가 35%,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1.12%를 보유하고 있었다. LG CNS는 상반기 기준 LG의 매출과 지분법 손익에서 약 75%를 차지하는 회사였다.
거버넌스포럼은 LG CNS가 상장하면 투자자들이 LG 주식을 살 이유가 사라진다고 비판했다. LG전자와 LG화학 LG생활건강 LG유플러스 등 주요 자회사가 이미 모두 상장된 상황에서 LG CNS가 LG의 사실상 유일한 대규모 비상장 자회사였다는 설명이다. 주가도 흔들렸다. 밸류업 기대감에 2024년 2월 10만3500원까지 올랐던 LG 주가는 7월 8만원대로 내려온 뒤 LG CNS 상장 계획이 구체화하자 하락을 이어갔다.
상장의 실제 목적을 두고도 뒷말이 나왔다. 업계는 LG CNS 상장이 사실상 맥쿼리PE의 투자금 회수를 위한 것으로 봤다. LG와 맥쿼리PE가 맺은 주주간 계약에는 2025년 4월까지 상장을 마쳐야 한다는 조건이 담겼다.
LG CNS는 중복상장이 아니라고 맞섰다. 특히 이현규 LG CNS 최고재무관리자(CFO)는 중복상장이란 특정 사업부를 물적분할해 상장하면서 모회사 주주에게 손해를 끼치는 경우라며 LG CNS는 미국 EDS와의 합작으로 세워진 회사로 LG에서 분할된 회사가 아니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현행 가이드라인은 인수나 신설로 생긴 모자회사 관계도 규율 대상에 넣었다. 같은 사례가 지금 다시 나온다면 일반 중복상장 유형으로 분류돼 거래소 특례심사를 받아야 하는 셈이다.
한편 규제가 강화되자 상장을 접는 대기업 자회사도 잇따랐다.
LS그룹이 대표적이다. LS그룹은 권선 계열사 에식스솔루션즈의 상장 절차를 중단했다. LS 소액주주들의 반발이 이어지던 가운데 이재명 대통령까지 중복상장 문제를 지적했기 때문이다. LS는 앞서 모회사 주주에게 공모주를 특별배정하겠다는 방안까지 내놨지만 여론을 돌리지 못했다.
LS의 계획은 연쇄 상장이었던 만큼 타격이 컸다. LS는 에식스솔루션즈에 이어 LS MnM과 LS전선을 차례로 상장해 대규모 투자금을 마련할 계획이었지만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에식스솔루션즈는 2억달러 규모 프리IPO 투자금 상환 부담을 안게 됐다.
HD현대로보틱스도 눈길을 끈다. 물적분할로 탄생한 회사이기 때문이다. HD현대에서 물적분할된 HD현대로보틱스는 올해 초 주관사를 선정하고 IPO에 나섰지만 3월 중복상장 규제 논의가 시작되자 절차를 멈췄다. 가이드라인은 물적분할 자회사에 가장 엄격한 잣대를 댄다. 금융위는 저비중 자회사에 해당하더라도 물적분할된 자회사라면 주주동의를 의무적으로 받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HD현대는 결국 숨 고르기를 택했다. 상장 준비를 위해 상주하던 주관사 인력은 최근 철수했고 HD현대는 내년 정기 주주총회에서 동의를 받는 방안도 현재로서는 추진하지 않기로 했다. 대기업 특유의 주주 구성이 걸림돌이다. 수십만에서 수백만 명의 주주를 둔 대기업은 물리적으로 주주 소통이 어려워 주주보호 방안만으로는 문턱을 넘기 힘들다는 평가다.
이런 가운데 상장을 포기하며 그룹 곳간을 열어던 곳도 있다. 상장을 전제로 재무적투자자(FI) 자금을 받아온 SK에코플랜트가 단적인 사례다. 여기에 CJ그룹의 CJ올리브영과 현대차그룹의 보스턴다이내믹스도 새 규제의 영향권에 든 기업으로 꼽힌다.
복잡해진 계산
솔리다임 사례 이후 해외 상장을 준비하던 기업들도 계산이 복잡해졌다. 해외 증시가 규제를 피할 우회로가 될 수 없다는 점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시장에서는 현대차의 보스턴다이내믹스와 LG전자의 베어로보틱스, 두산의 미국 연료전지 자회사 하이엑시엄 등 해외 상장을 추진하던 자회사들의 일정이 늦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LG전자와 현대차 인도법인, 두산에너빌리티 체코 자회사 두산스코다파워는 이미 현지 증시 상장을 마쳤다.
물론 모든 계열사 상장이 막히는 것은 아니다. 가이드라인이 상장 순서와 지분 관계에 따라 대상을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회사가 먼저 상장한 뒤 모회사가 IPO에 나서는 구조는 특례심사 대상에서 빠졌다. 티웨이홀딩스 등 상장 자회사를 둔 비상장 모회사 소노인터내셔널이 대표적이다. 한화도 한화에너지 지분 22.15%만 보유하고 있어 일반적인 모회사의 자회사 상장 사례로 보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증권가에서 이제 게임의 법칙, 곧 상장의 기준이 바뀌었다고 보는 이유다. 무엇보다 강화된 가이드라인 아래에서는 IPO 성공 가능성이 낮아질 것이며, 설사 이를 시도한다고 해도 모회사 매출 기여도가 작다는 점만 내세울 것이 아니라 모회사 주주에게 어떤 실질적 혜택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당장 솔리다임 사례는 해외 상장이 규제를 피하는 우회로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잘 보여줬다. 지분율로 지배력을 유지하던 방식에서 일반주주의 신뢰를 얻는 방식으로 자본조달의 기준이 옮겨가고 있다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