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10대 제자 일기장 속 '빗금'의 정체… 4년간 성착취 일삼은 유명 국악인

신은별 2026. 10. 28.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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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 제자를 4년여간 성적으로 착취한 혐의를 받는 유명 국악 연주자를 수사 중인 경찰이 피해자가 작성한 일기와 휴대폰 메모를 증거자료로 확보했다. 일기와 메모에는 주변에 피해 사실을 털어놓지 못해 겪었던 심적 고통, 피해 사실이 알려지면 자신의 진로에 영향을 주고 스승의 가정이 무너질까 두려워한 심경이 고스란히 담겼다.

2021년 12월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일기에는 자신이 사용한 펜을 "얼핏 보면 잘 안 보이는 펜"이라고 적었다.

전문가들은 미성년 피해자가 스승을 따르거나 자신을 탓한 이유를 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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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국악인, 미성년 제자 성착취 혐의]
경찰, 성착취 당시 제자 일기 증거 확보
"두렵다" 고통 "다 내 잘못" 자책 뒤섞여
"그만해 달라" 호소했지만 멈추지 않아
스승 아내는 전공교사… "진로 막힐까"
또다른 피해 막으려 용기 '뒤늦게 고소'
최근 경찰에 증거자료로 제출된 고소인의 일기장. 피해 사실을 주변에 알리지 못한 고통과 함께, 피해가 알려지면 자신의 진로에 지장이 생기고 자신을 가르친 연주자의 가정이 무너질까 두려워한 심경이 담겼다. 고소인 측 제공

미성년 제자를 4년여간 성적으로 착취한 혐의를 받는 유명 국악 연주자를 수사 중인 경찰이 피해자가 작성한 일기와 휴대폰 메모를 증거자료로 확보했다. 일기와 메모에는 주변에 피해 사실을 털어놓지 못해 겪었던 심적 고통, 피해 사실이 알려지면 자신의 진로에 영향을 주고 스승의 가정이 무너질까 두려워한 심경이 고스란히 담겼다.


"두렵다, 숨긴다"... 거부해도 계속된 피해

27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국악 연주자 A씨가 2019년부터 2023년까지 제자 B씨를 상대로 추행과 유사성행위, 간음 등을 반복했다는 내용의 고소장이 최근 서울경찰청에 접수됐다. 첫 추행 당시 B씨는 만 16세 미만이었다.

미성년자 시절부터 유명 국악 연주자에게 성착취를 당했다며 최근 경찰에 고소장을 낸 고소인이 일기장에 남긴 글을 재현한 것. 그래픽=신동준 기자

본보가 B씨를 대리하는 법무법인 흰뫼의 박지영 변호사를 통해 확보한 B씨의 2021~2023년 일기와 메모에는 자신을 탓하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2021년 12월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일기에는 "벌을 받을 만큼 받고 욕을 먹을 만큼 먹고 매장당해야 속죄를 받을 수 있을까"라고 적혀 있다. 2022년 2월에는 "다 내 잘못이고 이제 진짜 돌이킬 수 없다"고 썼다.

A씨는 2013년 3월부터 2026년 2월까지 국악을 가르치는 중학교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A씨의 아내는 해당 중학교와 연계된 고등학교 교사로, B씨에게 악기를 가르치는 전공교사였다. A씨의 아내가 자신의 전공교사라는 사실 때문에 느낀 부담과 두려움은 B씨의 일기장 곳곳에 남아 있다. B씨는 A씨의 아내를 가리키는 호칭을 거론하며 "알려지면 나는 아마 못 살지 싶다"고 적었다. 2022년 2월 일기엔 "(A씨의 범죄를 폭로할 경우) 선생님에게 배우고 있는 학생들이 더 이상 배우지 못할까 봐 두렵다. 그렇게 많은 사람의 인생을 망칠 권리가 나에게는 없다"고 쓰기도 했다.

B씨가 A씨를 향해 성적 접촉을 멈춰 달라고 요구한 흔적도 여럿 남아 있다. 2021년 10월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일기에는 "단 한 사람, 이 일에 연루된 당사자한테는 수도 없이 말했다. 힘들다고 이제 그만해 달라고. 알겠다고 한다. 그리고 한 달가량은 아무 일이 없다가 다시 시작된다. 원하지 않는다. 나는"이라고 썼다. 거부 의사를 전한 뒤 잠시 안도한 기록도 있다. 2022년 2월 일기에는 "진심을 전했다. 예측했던 반응이었다.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후에도 성적 접촉은 이어졌다. 같은 해 4월 일기장엔 "상황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고"라고 적혔다.

기록에는 A씨와의 성적 접촉을 거부하거나 자신이 당한 성착취를 폭로할 경우 입시는 물론, 국악계에서의 진로까지 포기해야 할 것이라는 두려움도 남아 있었다. A씨는 연주자로서 명성을 쌓았을 뿐 아니라, B씨가 입시 등을 위해 참여해야 하는 경연에서도 심사위원으로 마주칠 수 있는 인물이었다. B씨는 2022년 2월 일기에 "선생님한테 그렇게 말하면 버림받을까 두렵다. 세상의 시선이 두렵다" "그래서 가만히 참는다. 아니 숨긴다"고 썼다. 같은 해 4월에는 "정상적이고 평범한 일상은 없을 것이다"라고 적었다.

2022년 2월 일기엔 "(A씨 범죄를 폭로할 경우) 선생님에게 배우고 있는 학생들이 더 이상 배우지 못할까 봐 두렵다. 그렇게 많은 사람의 인생을 망칠 권리가 나에게는 없다"고 적혔다. 고소인 측 제공

옅은 글씨, 빗금에 숨긴 고통... 자책도 반복

기록에는 스승을 잘 따르는 제자로 보이려 애쓰면서도 그런 자신을 혐오하고, 다시 스승의 기대에 맞추도록 자신을 다그친 흔적도 있다. 2021년 12월 휴대폰 메모에는 "나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최대한 밝은 모습 보인다"고 적혔다. 이듬해 4월 메모에는 "그런 일을 겪고도 아무 일 없었던 척 선생님을 따르는 내가 환멸이 났다"고 기록했다. 같은 해 7월 일기에는 "실망시키지 말고 그냥 하라는 대로 하자. 선생님이 나를 믿고 있는데 그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가스라이팅 아니다"라고 적었다.

2020년 3월 19일 다이어리에 '////...'라고 적혀 있다. 첫 간음 피해를 당한 날을 이렇게 표시했다고 고소인 측은 전했다. 고소인 측 제공

자신이 A씨에게 성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들킬까 우려하는 모습도 반복적으로 기록됐다. 2020년 3월 19일 다이어리 칸에는 구체적인 문장 대신 작은 빗금 여러 개와 점으로 된 '////…'라는 표식이 남아 있다. 이날은 B씨의 첫 간음 피해일로 지목된 날이다. 일부 기록은 평소 일정과 악기 연습 내용을 적은 짙은 글씨와 달리 옅은 회색 글씨로 적혔다. 내용을 적되 다른 사람 눈에는 쉽게 띄지 않도록 한 것이다. 2021년 12월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일기에는 자신이 사용한 펜을 "얼핏 보면 잘 안 보이는 펜"이라고 적었다. 같은 글에는 "이 쪽지는 나만 보는 거다"라고 작성했다.

2021년 10월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소인 일기장. "죽고 싶다. 아무도 나의 마음속 응어리를 모른다. 힘들다고 이제 그만해 달라고 수도 없이 말했다. 알겠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다. 원하지 않는다"라고 적혀 있다. 타인에게 들킬까 평소 사용하는 검은 펜이 아닌 흐릿한 회색 펜으로 작성됐다. 고소인 측 제공

"배제 두려워 침묵… 추가 피해 막으려 고소"

전문가들은 미성년 피해자가 스승을 따르거나 자신을 탓한 이유를 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서적으로 의존하고 신뢰하게 만든 뒤 이를 이용해 피해자가 성적 접촉을 거부하거나 외부에 도움을 청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그루밍 성범죄'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아동·청소년 성폭력 예방기관인 탁틴내일의 이현숙 대표는 "어리다는 것, 사회적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 인간관계 경험이 적다는 것 자체가 취약한 것"이라며 "누구에게나 있는 취약성을 가해자가 찾아내 이용한 것이므로 피해자한테서 원인을 찾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B씨는 A씨에게서 벗어난 뒤에도 한동안 고소를 결심하지 못했다. 하지만 A씨에게 배우고 있는 학생들이 자신과 같은 피해를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밀려오자 고소를 결심하게 됐다. 박지영 변호사는 "고소인은 오랜 시간 '내가 잘못한 건 아닐까' 하는 왜곡된 죄책감과 국악계에서 배제될 것이라는 공포 등으로 침묵했다"며 "또 다른 피해자가 발생하는 것을 막고 국악계에서 그루밍 성범죄가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용기를 내서 고소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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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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