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깎아줘도 올 들어 3만명 재신청…탕감보다 중요한 건 경제자립 지원

2026. 10. 24.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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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도 노인도 부채 허덕
빚을 깎아주는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장기간 빚에 짓눌린 사람에게 채무 감면은 경제활동으로 돌아갈 기회이다. 하지만, 빚을 줄여준 뒤에도 소득은 늘지 않고 생활비 부족을 다시 대출로 메운다면, 탕감은 재기의 출발점이 아니라 부채의 회전문이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탕감 규모의 경쟁이 아니라 탕감 이후 삶을 바꾸는 정책이다.

신용회복위원회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1~8월 채무조정 재신청자는 3만 명에 근접한다. 벌써 지난해 연간 재신청자의 대략 83%에 이른다. 기존 약정이 실효된 뒤 다시 신청한 사람뿐 아니라, 조정한 빚을 모두 갚고 새로운 채무로 재신청한 사람도 포함된다. 따라서 이를 모두 고의적 연체나 도덕적 해이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채무조정이 지속 가능한 상환과 경제적 자립으로 이어지는지 점검할 필요는 분명하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문제는 ‘갚을 수 없는 사람’과 ‘갚을 수 있는데 기다리는 사람’을 구분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반복적인 감면 기대가 형성되면 일부 차주는 정상 상환보다 연체가 유리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반대로 실제 소득을 고려하지 않은 상환계획은 성실하게 갚으려는 사람마저 재연체로 내몬다. 전자는 유인 설계의 실패이고, 후자는 재활 설계의 실패이다. 두 문제를 같은 잣대로 다루면 정작 보호해야 할 취약계층까지 배제된다.

연체에 따른 비용은 채무자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보증부 대출의 부실이 늘면 보증기관이 금융회사에 대신 갚는 대위변제 부담도 커진다. 반복 부실을 방치하면 공적 보증의 여력이 줄고, 금융회사는 취약차주 심사를 강화할 수 있다. 성실 상환자는 ‘먼저 갚은 사람이 손해’라는 박탈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이 퍼지면 향후 꼭 필요한 채무구제까지 ‘퍼주기’로 낙인찍힐 위험이 있다. 도덕적 해이 방지는 구제를 줄이기 위한 명분이 아니라, 구제정책의 사회적 신뢰를 지키기 위한 조건이다.

해외 경험은 채무구제의 효과와 설계의 중요성을 함께 보여준다.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의 공공정책학 교수인 윌 도비와 미국 사회보장청의 경제학 연구자 재 송이 2015년 발표한 연구는 약 50만 건의 개인파산 신청자료 등을 분석했다. 법원의 분할변제형 개인파산 절차인 ‘챕터13(법원이 승인한 계획에 따라 채무를 분할 상환하고 잔여 적격채무를 면책받는 미국의 개인파산 절차)’의 보호를 받은 채무자는 보호받지 못한 경우보다 이후 5년간 연평균 소득이 5562달러 높았고, 같은 기간 주택 압류율은 19.1%포인트 낮았다. 이는 무조건적 탕감이 아니라, 법적 보호와 상환 재조정을 결합한 제도가 경제적 추락을 막을 수 있다는 근거이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브리딩 스페이스(Breathing Space: 채무상담과 해결계획 수립을 위한 한시적 추심·이자 유예제도)’도 참고할 만하다. 동 제도는 채무상담을 통해 신청하면 원칙적으로 최대 60일 동안 대상 채무의 추심·집행과 대부분의 이자·수수료 부과를 멈춘다. 빚을 자동으로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독촉에 쫓기는 시간을 재기를 준비하는 시간으로 바꾸는 장치이다. 일반형은 원칙적으로 최근 12개월 내 이용 이력이 없어야 하므로 반복 이용에도 제한을 둔다. 단, 정신건강 위기 치료를 받는 사람에게는 별도 유형을 적용해 치료 기간과 종료 후 30일까지 보호하고, 이용 횟수도 제한하지 않는다. 반복 이용은 관리하되, 불가피한 위기에는 보호를 강화하는 설계이다.

한국의 채무구제도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첫째, 감면율보다 상환능력을 먼저 봐야 한다. 소득뿐 아니라 처분 가능 재산, 필수생계비, 부양가족, 질병과 실직 여부를 함께 평가해 차주를 구분해야 한다. 상환능력이 사실상 없는 사람은 신속한 면책과 복지로, 일시적 충격을 받은 사람은 유예와 분할 상환으로 지원해야 한다. 정부가 올해 채무조정기구의 소득·자산정보 활용을 확대한 만큼, 심사 강화가 서류만 늘리는 절차가 아니라 실제 부담 능력을 판단하는 도구가 돼야 한다.

둘째, 상환계획을 생활과 연결해야 한다. 일정한 월급이 없는 자영업자에게 매달 같은 금액을 요구하기보다 계절적 매출과 소득 변동을 반영해야 한다. 재실직이나 질병이 발생하면 약정을 실효시키기 전에 납입액을 조정할 통로도 열어야 한다. 반면 고의적 재산 은닉과 허위 신청은 엄격하게 제재해야 한다.

셋째, 감면과 재기 서비스를 하나의 계약으로 묶어야 한다. 신청 시 재무 진단을 하고, 필요하면 취업·직업훈련·폐업정리·복지급여를 담당할 전담 관리자를 두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 다만 고령자·중증질환자에게 취업을 지원 조건으로 강요해서는 안 된다.

넷째, 성실 이행에 보상을 붙여야 한다. 예컨대 6개월·12개월 정상 납입 시 금리 인하나 잔여 채무 추가 감면을 제공할 수 있다. 이는 정상 상환자에게 금리·보증료 우대를 제공해 ‘연체해야 혜택을 받는다’는 그릇된 인식을 해소해야 한다.

다섯째, 정책의 성과를 ‘얼마나 깎아줬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다시 일어섰는가’로 평가해야 한다. 지원받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다시 연체한 비율, 조정된 상환계획을 지키는 비율, 취업 여부와 소득 변화를 지속 점검해야 한다. 특히, 갚을 능력이 있는데 재산을 숨기거나 고의로 납입을 중단한 경우에 추가 감면을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

결국, 탕감은 책임을 없애는 정책이 아니라 책임을 다시 감당할 기회를 만드는 정책이어야 한다. 금융당국은 감면 속도만큼 재기의 지속성을 관리하고, 금융회사는 적정 심사와 상담 책임을 져야 한다. 상환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충분한 보호를, 일시적으로 어려워진 사람에게 회복의 시간을, 성실하게 갚는 사람에게 그에 걸맞은 혜택을 제공해야 한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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