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 미래 걸린 CPTPP, ‘농심 달래기’ 카드로 쓰고 끝나나

박정훈 기자 2026. 10. 20.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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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론화 40일만에 ‘李 제동’ 논란
15일 서울 청와대 사랑채 앞에서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저지 농림축수산비상대책위원회' 소속회원들이 전국 농어민대회 기자회견에 앞서 결사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이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 공식 논의 착수 40여 일 만에 연내 가입 신청에 제동을 걸면서, 당초 정부의 추진 시점과 방식을 둘러싼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정부가 공론화의 불을 지핀 8월 말은 농지 전수조사로 농민 반발이 커지고 대통령 지지율이 급락하던 시점이었다. 하필 이런 상황에서 경제 부처는 의제를 띄웠고 불과 한 달여 만에 대통령이 농심(農心)을 이유로 거둬들인 모양새가 된 것이다.

통상 전문가들은 “정권 초 지지율이 60%를 넘고 여권이 일사불란했던 최적기는 허비하고 정치적 여건이 최악인 시점에 갑자기 CPTPP를 꺼내 들었다가 결국 농민 달래기용 카드로 소모해버렸다”며 “국가 생존이 걸린 통상 전략이 국내 정치의 국면 전환용으로 쓰인 셈”이라고 지적했다.

◇최악의 시점에 논의 급발진

CPTPP 가입은 박근혜 정부 때인 2013년부터 14년째 검토를 반복해온 과제다. 문재인 정부는 가입 추진 계획 의결까지 마쳤으나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고, 윤석열 정부에서도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 이재명 정부 들어서는 지난해 12월 산업부와 외교부 업무보고, 올해 1월 한일 정상회담에서 가입 의사를 재확인했지만 5월 안동 한일 정상회담 땐 의제에서조차 빠지며 사실상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상태였다.

그런데 8월 이후 추진 당위성을 주장하는 언론 기고와 칼럼이 부쩍 늘었다. 10대 일간지 및 3대 경제지 기준, CPTPP를 제목으로 하는 칼럼과 기고가 5~7월 단 1건에서 8월 이후 9건으로 늘었다. 통상 관련 부처들이 여론 조성에 나선 결과가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정부는 이어 8월 27일 대외경제장관회의를 열어 CPTPP 가입을 위한 사회적 논의 착수를 전격 선언했다.

그래픽=백형선

하지만 당시는 정부가 새로운 무역 개방 의제를 추진하기에 부담이 커진 시기였다. 7월 말 발표된 농지 전수조사 결과는 CPTPP 최대 반대그룹인 농업계에 기름을 부었다. 여기에 증시 폭락 여파까지 덮치며 8월 중순 대통령 지지율(한국갤럽 기준)이 취임 후 첫 데드크로스(부정 평가가 긍정 평가를 역전)를 기록했다. 한 전직 고위 관료는 “농지 조사는 대통령 지시 사항이고 CPTPP도 국가적 어젠다인데 가장 반발이 극심할 시점에 두 사안을 동시에 던진 건 상식적인 정책 조율 결과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추진 방식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경제부처 장관이 모이는 대외경제장관회의만 전면에 나섰을 뿐 청와대도 여당도 나서지 않았다. 그러다 청와대가 판을 뒤집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농어업계에 “너무 걱정 마시기 바란다”며 재정을 통한 피해 보전을 약속했다. 지난 6일엔 “원점에서 다시 대화하라”고 지시했고, 결국 8일 “연내 가입 신청을 하지 말라”고 쐐기를 박았다.

이 대통령은 19일에도 “과거 FTA 체결 때 (농어민을) 억압적 방식으로 대했고 1조원 규모 농어업 상생기금 조성 약속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농어민들이 국가에 기만당했다는 불신이 크다”며 “올 연말 신청은 미루고 불신과 불안을 최소화한 뒤 하겠다”고 재차 못 박았다. 부처가 앞장서 매를 맞고, 대통령이 나서 ‘무리한 추진을 막겠다’며 민심을 수용하는 구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한 전문가는 “국운이 걸린 무역협정을 추진할 때는 당청이 전방위 지원사격을 해도 모자란다”며 “당초 진정성 있게 추진할 의지가 있었는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한 경제 부처 관계자는 “반발을 각오하고 조심스럽게 설득 작업을 시작했는데 대통령 지시 이후 부처로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을 잃은 상태”라고 말했다.

◇“생존 위한 필수 카드인데… 현 정부 내 재추진 동력 상실”

미국의 관세 압박과 중국의 추격 속에서 공급망 안정과 신시장 개척을 위해 CPTPP 가입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생존 카드라는 게 정부 부처와 통상 전문가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이 대통령도 19일 간담회에서 “경제 영토 확장은 피할 수 없는 국가적 과제여서 언젠가는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한 번 제동을 건 이상, 현 정부 임기 내 재추진은 물 건너갔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이 대통령 스스로 “가입국 전체 동의를 받아야 하고 일본 수산물 수입 문제 등 이해관계가 복잡해 단시간에 되는 일이 아니다”라며 ‘농어민이 용인할 수준의 대책 마련’을 선결 조건으로 내걸었다. 사실상 기약 없는 장기 과제로 미룬 셈이다. 한 전직 통상 관료는 “정치적 계산 속에 골든타임을 완전히 놓쳤다”고 진단했다.

☞CPTPP

Comprehensive and Progressive Agreement for Trans-Pacific Partnership의 약칭으로,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이라는 뜻. 일본·영국·멕시코 등 12국이 참여해 관세 장벽을 낮추고 투자·디지털 무역 등에 공통 규범을 적용하는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이다. 미국과 중국이 참여하지 않는 거대 자유무역권으로, 한국에는 미·중 의존도를 낮추고 수출시장과 공급망을 다변화할 전략적 선택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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