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규제에 ‘민간 대형 돔구장’도 못 짓는 한국

배준용 기자 2026. 10. 9.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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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 다다른 노후 경기장] <下>
경기장 재건축 지자체에 휘둘려
‘잠실 돔’도 비용 문제 등으로 축소
서울시

2020년대 들어 국내에선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프리미어12 국제 야구대회가 열린 적이 없다. 날씨 영향을 받지 않고, 대규모 관중을 유치해 흥행을 뒷받침할 대형 돔구장이 없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 열리는 메이저 대회는 죄다 일본 도쿄돔(4만5000석) 아니면 2023년 개장한 대만 타이베이돔(4만석) 차지다. 2017년 WBC A조 경기가 서울 고척돔에서 열렸지만, 1만7000석인 아담한 사이즈 탓에 인프라 부족이라는 한계만 노출했다.

서울 잠실야구장이 올해 말 철거에 들어가 3만석 규모의 잠실 돔구장으로 재탄생한다. 2032년 개장이 목표지만 벌써부터 “허울만 좋은 ‘반쪽짜리 랜드마크’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잠실 돔구장 건설 계획을 세울 때 스포츠·문화예술계는 “국제 대회와 초대형 공연을 유치할 수 있는 5만석 규모의 개폐형 돔을 짓자”고 요청했다. 그러나 서울시는 애초 4만석이던 규모를 3만5000석으로 줄이더니 최종안은 3만석으로 확정했다. 지붕을 열고 닫는 방식도 추가 공사비 2000억원과 소음 문제를 이유로 폐쇄형으로 정했다.

전문가들은 “민간은 1000석 이상 대형 체육시설을 소유할 수 없는 낡은 규제 탓에 노후 경기장 재건축도 지자체 등 관(官)의 입김에만 휘둘린다”고 지적한다. 구강본 한국교통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는 “지자체는 비용을 줄이는 보수적인 개발에만 치중하다보니 신축 경기장을 도시 랜드마크로 활용할 수 있는 폭이 좁아지고 있다”며 “잠실 돔구장이 야구 팬의 눈높이를 충족하지 못하면 주변 복합시설의 수익성도 흔들릴 수 있다”고 말했다.

◇“5만석 계패형 돔 짓자”했는데...서울시는 4만→3만 도리어 줄여

서울 잠실 돔구장 개발은 고급 호텔과 대형 컨벤션 센터 시설을 포함한 약 3조원 규모의 대형 민자 사업이다. 사업자로 선정된 한화 컨소시엄이 투자비를 들여 돔구장과 마이스(MICE) 시설 등을 지은 뒤 서울시에 기부 채납하고, 그 대가로 40년 운영권을 확보해 투자비를 회수한다. 소유는 서울시, 운영권은 한화, 실제 사용은 프로야구 LG·두산이 하는 구조다.

연 관중 1200만명 이상이 몰리는 국내 최고 인기 스포츠 프로야구는 삼성·LG·한화·두산·SSG 등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 구단을 운영하며 매년 수백억원을 투자하지만, 정작 자기 야구장을 갖지는 못한다. 사실상 1000석 이상 체육 시설을 민간이 설립·소유하지 못하게 막는 시대착오적 규제 때문이다. 2000년대 초 부동산 가격 상승과 국토 난개발이 문제가 되자 정부는 “대기업 등 민간 자본이 땅을 사서 경기장을 짓고 나서 부동산 투기에 활용할 우려가 있다”며 국토계획법 시행 규칙을 제정했다.

전문가들은 “해외 선진국처럼 민간이 스포츠 경기장을 직접 소유해 공연·관광·쇼핑·식음료 등 다양한 파생 사업으로 부가가치를 높이는 사업 모델을 원천 차단하는 규제”라고 지적한다. 전용배 단국대 스포츠경영학과 교수는 “한국 프로 스포츠는 태생적으로 대기업 의존적으로 형성됐는데, 여기에 경기장마저 지자체에 빌려 쓰기만 하니 스포츠 산업을 자생적으로 키워보겠다는 엄두도 못 내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한 야구계 인사는 “영국 등 스포츠 선진국은 소규모 축구 클럽이 간이 축구장에서 시작해 수익을 내면서 스탠드를 늘리거나 중소형 구장으로 개축하는 비즈니스가 가능하다”며 “한국은 1000석 규제 탓에 소규모 클럽이 자생적으로 성장할 토대조차 막혀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래픽=백형선
세계 최초로 차세대 스포츠·문화·엔터테인먼트 복합 공간인멀티스타디움(돔구장)과 복합쇼핑몰이 결합된 새로운 패러다임의 랜드마크로 건립되는 스타필드 청라 조감도./인천시

불합리한 규제를 피하기 위해 일종의 편법이 동원되기도 한다. 프로야구 SSG는 인천 청라에 2028년 개장하는 2만3000석 청라돔을 건설 중이다. 야구장이지만 서류상으로는 ‘문화 및 집회 시설’로 등록했다. SSG가 복합 쇼핑몰 스타필드의 부대 시설로 야구장을 지으며 1000석 규제를 피해 인허가를 받은 것이다. 이병관 단국대 스포츠경영학과 교수는 “청라돔은 신세계그룹이 스타필드라는 자체 복합 쇼핑몰을 가진 덕분에 가능한 특이 케이스”라며 “다른 기업이었다면 돔구장을 문화 시설로 심의받는 우회로를 활용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자제장 입김에 휘둘리는 경기장 건설...“이젠 민간에 열어야”

현재 국내 유일의 돔구장인 서울 고척스카이돔은 경기장 건설을 관(官)이 독점하면서 나온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꼽힌다. 2008년 동대문운동장 철거에 따른 반발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건립된 고척돔은 서울시장 교체 등 정치적 이해관계에 사업 계획이 계속 변경됐고, 사업비는 400억원대에서 2400억원으로 폭증했다. 1만7000석 규모의 소형 돔구장으로 개장했지만 비효율적인 좌석 배치, 조명·전광판·라커룸 등 시설 미비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서울시가 키움 구단에 막대한 사용료를 요구하는 등 수익권을 둘러싼 격한 공방까지 벌어졌다.

1964년 건립돼 60년 넘게 쓰인 노후한 한밭야구장을 대신해 작년 개장한 대전 한화생명 볼파크(대전 신구장)도 비슷하다. 초기엔 대형 돔구장으로 구상됐으나 대전시의 예산 절감 논리에 밀려 1만7000석 소규모 개방형 구장으로 줄어들었다. 최근 폭증하는 야구 팬 관람 수요를 감당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일자 개장 2년 만에 3000석 증축 공사를 결정하는 촌극을 빚었다. 부지 선정 역시 “대중교통이 편한 곳을 찾자”는 여론을 무시하고 “구도심을 살려야 한다”는 정치 논리를 앞세운 탓에 지하철역에서 도보 20분 이상 떨어진 한밭종합운동장 부지로 선정하면서 경기 날마다 신구장 일대는 교통 지옥으로 변하는 실정이다.

정부와 지자체가 체육시설 건립을 독점하면서 1928년 개장해 100년 가까이 쓰이며 안전 우려가 지속되는 부산 구덕운동장 등 전국 곳곳의 노후 체육시설은 예산 부족과 정치 논리에 갇혀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낡은 체육시설을 개선하고 국내 스포츠 산업 성장을 도모하려면 정부·지자체가 체육 시설 건립을 독점하는 규제부터 없애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종성 한양대 스포츠산업과학부 교수는 “지자체는 예산 부족과 지역 이해관계에 치여 실제 이용자인 구단이나 시민들과 다른 시각에서 사업을 진행할 수밖에 없다”며 “해외처럼 스포츠 전문 자본과 구단이 과감히 투자해 구장을 직접 소유·운영할 수 있는 제도를 허용해야 낙후된 스포츠 시설 현대화도 탄력을 받고 국내 스포츠 산업도 더 도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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