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맑고 춥다”… 전쟁이 낳은 측후소, 서울 날씨 100년을 쓰다[염복규의 경성, 서울의 기원]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2026. 10. 7.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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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직후인 1945년 10월 한 신문은 흥미로운 소식을 전했다. "전 경성측후소장 구보다는 8월 15일 이후 기상통계표와 암호전보 그 밖에 중요한 서류가 들어 있는 강철제 서류고를 파괴 소멸"시켰는데 "기상학계의 권위인 이원철 박사가 이 소식을 탐지하고 분노하여 군정 당국의 응원을 얻어 경성측후소를 급습"했다는 것이다.

송월동으로 측후소를 이전한 뒤 1930년대 중반에는 기상 업무를 대대적으로 개편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핵심은 "도립 측후소를 관측소 직속으로 하고 지방 측후소를 72개소로 확대하고 기술원을 150명으로 대증원하고 관측소를 경성에 이전한 다음 중앙기관으로 하여 조선중앙기상대로 승격하려는 것 등이 그 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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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러일전쟁에 군사용 관측 시작
1907년 경성 첫 관측 연건동에서 낙원동 거쳐 1932년 송월동 시대
중일전쟁 계기 중앙관측소로 승격
광복 뒤에도 송월동서 관측 이어가… 2017년 WMO ‘100년 관측소’로
1913년 낙원동 측후소 서울기상관측소(옛 경성측후소)는 1907년부터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사진은 1913년 서울 종로구 낙원동으로 이전한 경성측후소 전경.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내손안에 서울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서울의 근대 기상 관측소

광복 직후인 1945년 10월 한 신문은 흥미로운 소식을 전했다. “전 경성측후소장 구보다는 8월 15일 이후 기상통계표와 암호전보 그 밖에 중요한 서류가 들어 있는 강철제 서류고를 파괴 소멸”시켰는데 “기상학계의 권위인 이원철 박사가 이 소식을 탐지하고 분노하여 군정 당국의 응원을 얻어 경성측후소를 급습”했다는 것이다. 궁지에 몰린 구보다는 “군에서 소각을 명령해왔음으로 한 일이요, 자기의 의사로 한 일은 아니라고” 변명을 했다고 한다. (자유신문, 1945년 10월 8일)》

태평양전쟁 당시 기상 관측과 정보 생산에 일본군이 관여했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이원철(1896∼1963)은 일제강점기 미국 미시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교수를 지낸 천문학자다. 광복 후 초대 국립중앙관상대장을 맡아 1948년부터 13년간 재임했다.

전통적으로 한국의 기상 관측은 농업과 관련한 강우량 측정이 주를 이뤘다. 이를 상징하는 유물이 세종 때 처음 제작된 측우기다. 그러나 조선은 해양 진출이나 대외 무역이 활발한 나라가 아니어서 종합적인 기상 관측은 발달하지 못했다. 근대적인 기상 관측은 러일전쟁 발발 직후인 1904년 3월 일본군이 목포, 부산, 인천, 용암포(평안북도) 등에 임시 관측소를 설치하면서 시작됐다. 모두 해안 지역이었다. 러일전쟁에서는 해전이 중요했다. 개전 초기 제물포 해전에서 일본군이 크게 승리한 것이 전쟁 전체의 성패를 가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이를 잘 보여준다. 한국의 근대 기상 관측은 군사적 목적에서 시작돼 일제의 침략 과정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었다.

1932년 송월동 측후소 서울기상관측소(옛 경성측후소)는 1907년부터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사진은 1932년 종로구 송월동에 새로 지은 측후소. 원통형 옥탑과 곡선형 현관 등 근대 모더니즘 건축의 특징이 드러난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내손안에 서울
러일전쟁이 끝난 뒤인 1906년 공식적으로 측후소관제가 제정됐다. 서울에는 이듬해 10월 1일 인천측후소 경성지소가 설치되면서 기상 관측이 시작됐다. 측후소 위치는 ‘경성 동부 연화방(蓮花坊)’이라고 했다. 오늘날 서울 종로구 연건동 일대다. 구체적으로는 연건동의 작은 봉우리인 마두산으로, 당시 서울 인근에서 가장 양질의 채광이 가능한 곳이었다고 한다. 현재 대학로에 있는 서울대병원 구내다.

경성측후소는 강제병합 이후인 1913년 1월 “낙원동 대빈궁지(大嬪宮址)”로 이전했다.(매일신보, 1913년 1월 18일) 대빈궁은 원래 조선 후기 숙종의 후궁인 희빈 장씨의 사당이었는데, 그 신주를 숙종의 또 다른 후궁인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의 사당 육상궁에 합사한 뒤 비어 있었다. 현재 종로세무서가 있는 자리다. 일제강점기에는 시내 곳곳에 산재한 옛 왕실 영역이 식민지 권력이 세운 새로운 근대시설의 부지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경성측후소 이전도 그런 사례 중 하나였다.

동아일보는 새 사옥(현 일민미술관) 건설을 앞두고 1924년 ‘내 동리 명물’이라는 장기 연재를 기획했다. 동네마다 명물 하나씩을 선정해 사진과 함께 간단한 해설을 싣는 기사이다. 종로구 낙원동의 명물로는 측후소가 선정됐다. “어느 신문을 보든지 신문에는 대개 천기예보(天氣豫報)라는 것이 있지요. 그런데 서울 신문의 천기예보는 다 이 낙원동에 있는 측후소에서 발표하는 것이랍니다. (중략) 측후소 안에는 여러 가지 기계가 놓여 있어서 현재와 장래의 천기를 기계가 전부 가르켜주는데 단지 없는 기계라고는 지진계밖에 없고 그 나머지는 다 있다 합니다. 지진계가 없는 것은 우리 조선은 강산이 좋아서 일본같이 지진하는 법이 없으니까 그까짓 것은 있으나 없으나 상관이 없다 합니다.”(동아일보, 1924년 7월 4일)

낙원동 측후소에는 정말 지진계가 없었을까. 1924년 3월 경성측후소에 지진계를 설치하기 위해 약 40m² 규모의 기계실을 공사 중이며 곧 기계를 구입할 예정이라는 기사가 있다.(경성일보, 1924년 3월 1일) 하지만 지진계 설치는 비용 문제로 무산된 듯하다. 경성측후소의 지진계 설치와 무선전신 설비를 위한 예산이 통과된 것은 한참 뒤인 1927년 말이기 때문이다.(조선신문, 1927년 12월 3일) 따라서 1924년 7월 당시 경성측후소에 지진계가 없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다만 그 이유를 “우리 조선은 강산이 좋아서 일본같이 지진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라고 비꼰 조선어 언론의 표현이 이채롭다.

낙원동에 20여 년간 자리했던 경성측후소는 1932년 11월 종로구 송월동으로 이전했다. 당시에는 무선통신을 통해 전국의 기상 정보를 연계하는 것이 중요한 현안이었다. 하지만 경성의 도시화로 건축물과 인구 밀도가 높아지면서 시내 중심부에는 기상 관측과 무선통신에 장애가 자주 발생했다. 경희궁 뒤편의 송월동은 한양도성 능선의 구릉지로, 풍속이나 풍향에 영향을 미칠 만한 장애물이 거의 없는 고지대였다.

송월동 측후소는 그때까지 남아 있던 성곽 일부를 철거하고 땅을 고르는 성토 작업을 한 뒤 건립됐다. 낙원동 측후소가 흔히 볼 수 있는 벽돌조의 다소 평이한 건물이었던 데 비해, 송월동 측후소 본관은 원통형 옥탑 구조물과 곡선의 현관 및 처마 지붕, 상층부의 요철 장식, 반원형의 창틀, 외부 벽면의 타일 마감 등이 특징이었다. 기하학적 형태와 공간을 강조한 근대 모더니즘 건축 기법을 잘 보여주는 건물로 평가된다.

현재 서울기상관측소(2023년∼ ) 서울기상관측소(옛 경성측후소)는 1907년부터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사진은 송월동 관측소의 2023년 모습. 현재까지 서울의 기상 관측을 맡고 있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내손안에 서울
송월동으로 측후소를 이전한 뒤 1930년대 중반에는 기상 업무를 대대적으로 개편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반도 각지 측후소의 기상 사무의 통제, 무전에 의한 기상관측의 연락상” “새로히 조선중앙기상대를 설치하여 내지, 조선, 만주의 기상 교환 뿌럭(block)의 결성을 희망”하고 “반도의 상층 기류의 관측은 물론 항공, 어업, 수산 기상을 각 관계 방면에 신속히 통지하여 천기 급변에 의한 재해 방지를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매일신보, 1936년 6월 24일)

개편을 실제로 앞당긴 것은 전쟁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조선총독부는 “시국의 중대성과 반도 산업의 비약에 비추어 중앙기상대의 전국적 기상 사업의 개혁에 관한 기치로 반도 기상 사업의 획기적 대개혁을 단행하기로” 했다. 핵심은 “도립 측후소를 관측소 직속으로 하고 지방 측후소를 72개소로 확대하고 기술원을 150명으로 대증원하고 관측소를 경성에 이전한 다음 중앙기관으로 하여 조선중앙기상대로 승격하려는 것 등이 그 골자”였다.(매일신보, 1938년 2월 11일)

일본과 한반도, 만주, 나아가 중국 대륙까지 아우르는 일제의 ‘기상 블록’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경성 기상 관측의 위상은 더 높아졌다. 직제와 사무 개편으로 경기도립 측후소에서 중앙관측소로 승격하면서 1939년 건물과 시설을 대폭 증·개축했다. 이때 증축한 장방형 청사는 관측 업무보다 사무와 통신 업무에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전쟁 기간 중 기상 정보를 신속하게 생산하고 교환하는 일이 중요해졌던 것이다.

송월동 측후소는 광복 후 국립중앙관상대로 다시 출발했고, 이후 직제 개편을 거쳐 서울기상관측소가 됐다. 1990년대 말 기상청이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으로 이전할 때도 관측소는 그 자리에 남았다. 기상 관측은 가능한 한 같은 장소에서 계속 관측해 장기간 정보를 축적해야 하기 때문이다. 관측소는 2014년 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됐고, 2017년에는 세계기상기구(WMO)의 ‘100년 관측소’로 선정되기도 했다.

1932년 건립한 청사는 지금도 ‘서울 기상 관측의 대푯값’을 매일 생산하고 있다. 1939년 증축한 청사에는 2020년 국립기상박물관이 문을 열어 한국 기상 관측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한국 기상 관측의 역사와 현재가 한 공간에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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