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많고 많은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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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상영작 '하나하나의 세계'의 관객과의 대화 진행을 맡았다. 장윤미 감독과 이수유 감독이 공동 연출한 이 영화는 도축장으로 향하는 젖소의 눈동자를 담은 숏으로 시작해 소와 닭, 돼지 등 '축산동물'로 범주화되는 동물들의 얼굴을 오래 응시한다.
현실의 인간이 돼지를 먹듯 소설 속 돼지들 역시 인간을 먹는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10대 소녀-돼지는 도축장에서 버려진 어린 인간을 본 뒤로 제 식생활에 근본적인 회의를 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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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상영작 '하나하나의 세계'의 관객과의 대화 진행을 맡았다. 장윤미 감독과 이수유 감독이 공동 연출한 이 영화는 도축장으로 향하는 젖소의 눈동자를 담은 숏으로 시작해 소와 닭, 돼지 등 '축산동물'로 범주화되는 동물들의 얼굴을 오래 응시한다.
영화를 보다가 오랜만에 10대 시절 쓴 단편을 떠올렸다. 고등학생 시절 습작이지만 글의 이모저모는 여전히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시기 거의 유일하다고 할 만큼 골머리를 썩이며 쓴 글인 까닭이다.
'돼지 사는 세상'이라는 제목의 이 소설에서는 돼지들이 '인류' 역할을 한다. 현실의 인간이 돼지를 먹듯 소설 속 돼지들 역시 인간을 먹는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10대 소녀-돼지는 도축장에서 버려진 어린 인간을 본 뒤로 제 식생활에 근본적인 회의를 품게 된다.
이 소설을 쓴 건 오로지 다음의 짧은 시를 읽었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세상에 살면서/소머리 국밥을 먹는다/소들이 사는 세상에서는/소들이 사람머리 국밥을 먹는다"(정호승 '국밥'). 당시 사람머리 국밥이라는 호칭에는 섬찟해하면서 소머리 국밥이라는 단어는 매우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나에게 놀라 '돼지 사는 세상'을 쓰기 시작했지만, 통 결말을 짓지 못해 한참을 허덕였다. 주인공인 소녀-돼지가 가축인 인간을 가여워해 먹지 않는다면, 지금 이곳의 나 또한 돼지들을 가여워하며 먹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동시에 열아홉이던 내게 육류 없는 생활이란 매우 궁핍하게 보였다. 소설 속 주인공과 창작자가 일렬로 이어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으나 내가 하지 못한 선택을 주인공에게 대뜸 맡기는 일이 누차 찜찜하게 느껴졌다.
'하나하나의 세계'에서 숏마다 켜켜이 쌓이는 동물들의 몸과 얼굴 그리고 그들을 보살피는 인간 '영환'을 보며 그 시절의 찜찜함을 다시 마주했다. 흔히 이처럼 '식사'에 수반되는 죽음과 통증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한다"는 테제와 생태계의 순환이라는 허울 좋은 표현이 따라붙곤 한다. 그러나 현재의 생태계가 인간의 식도락을 위해 경제적으로 재편성된 구조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 구조 이면에 놓인 몸들, 울타리 바깥의 카메라가 궁금해 코를 킁킁거리는 돼지의 표정과 막 태어난 세상에 놀라 짹짹대는 병아리의 울음을 보니 오래전 내가 쓴 소녀-돼지의 고민이 다시금 선명해졌다.
그 소설을 쓴 지도 거의 15년이 지났다. 현재의 나는 육류를 먹지 않은 지 1년 반 정도 됐고 그 사실이 큰 면죄부가 된 양 안심하며 다닌다. 그러나 '하나하나의 세계'에서 닭의 장례를 치르고 돼지의 등을 토닥이던 '영환'의 말처럼, 동물을 진지하게 대하는 일은 이보다 더 많은 사유와 행동을 요구한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동물)이 그들에게 소중함"을 알아가는 일이며 그 소중함을 "합당하게 대우"하기 위해 사회의 기반부터 변화시켜야 함을 아는 일이다. 이는 결국 나의 소녀-돼지가 계속 맞닥뜨려야 하는 과제이기도 할 터다.
[함윤이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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