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샅길 조선사(21)] 조선시대 '한남대교', 청계천 영도교
ㆍ동대문 광희문 밖 첫 다리...단종 귀양길 돌다리
ㆍ다리 건너 황학동 주방거리, 중앙시장 북적
ㆍ삼남지방 가는 국가기간도로 첫 다리 '영영이별'
서울 중구 황학동은 지하철 2호선 신당역과 접한 북쪽 일대다. 가로 500m, 세로 700m 정방형 동네다. 서울중앙시장과 황학동주방거리가 있다. 주방거리는 국내 요식업 관련 제품의 최대 상권으로 이곳의 거래 지표가 물가 변동의 가늠자가 되기도 한다.
지난 4일 황학동 북쪽 청계천 영도교는 전통 문양 경관 조명등이 더없이 아름답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다리 밑으로 밤길을 달리는 러너와 산책 시민들 모습이 평화로운 서울의 밤을 느끼게 했다.

영도교(永渡橋)는 조선 초기 건립된 유서 깊은 다리다. 서거정의 '용재총화'에 "동대문 밖 왕심평에 큰 다리를 만들고 영도교라 이름하였는데 모두 임금의 글씨로 정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불과 20~30m 길이에 불과한 돌다리였겠지만 당시 교량 건축 기술로선 대역사였던 셈이다.
이 다리는 왕심평대교 또는 영미교로도 불렸다. 왕심평은 지금의 왕십리를 말한다. 황학동 우측의 왕십리는 한양도성에 채소를 대던 들(坪)이었다.

영도교는 청계천 복원(2005년) 구간인 청계광장~용두동 고산자교까지 22개의 다리 중 하나일 뿐이다. 한데 조선 시대만 하더라도 국가기간도로에 설치된 최신 공법의 교량이었다. 그 중요성 때문에 임금이 어필을 내린 것이다.
당시 동대문과 그 남쪽 광희문을 지나면 성저십리(城底十里)에 해당하여 도시 계획 범주에 속했다. 동대문은 도성의 4대 정문(正門)이였기에 광화문에서 종로통을 지나 성 밖으로 나서 경기도 동남부와 강원도, 충청도와 경상도로 향하는 삼남대로와 평해로의 시작점이었다.

이 다리를 지나 청계천과 중랑천 합수부 지점에 살곶이다리를 만나게 되고 계속 나아가면 한강 도강을 위한 광나루와 송파나루에 접하게 된다. 따라서 조선 시대 여행자가 나룻배가 아닌 다리 위를 건너는 것은 영도교와 살곶이다리 정도였다.
영도교는 단종의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5세기 중반 숙부(세조)에 의해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갔던 그가 도성을 벗어나 영도교를 건넜다.
그의 비 정순황후는 이 다리쯤에서 강제 이별해야 했다. 그 가슴 아픈 이별에 '영영 건너간 다리'라는 말로 회자했고 훗날 이 의미의 영도교로 굳어졌다.
한편으로 영미교(靈彌橋)로도 불렸다. 조선 시대 승려들이 대중을 위한 사회사업 차원에서 원우(院宇)을 세워 여행자를 위한 봉사를 했는데 이때 길 관리도 포함됐었다.
영도교의 경우 태종 때 장원심이라는 자비로운 승려가 교량을 보수하곤 했다. 잠도(현 잠실)의 제반교 등도 불심으로 관리됐다. 이때 영도교는 '신령스러운 미륵보살(靈彌)'의 의미를 담은 영미교로도 불린 것이다.
이날 영도교를 건너 서울중앙시장 방향으로 가는 길.
'영미'라는 이름을 단 간판이 곳곳에 걸려 있다. 다리를 지나면 약간 오르막인데 이는 치산치수에 약했던 당시 사람들이 해발 30여 m 높이 황학동을 주거지로 삼아서이다. 이 고을 사람들은 다리를 건너온 여행자를 상대로 주막 등을 운영했다. 그 길옆 '영미상가' 등은 그러한 뿌리를 지니고 있다.

영도교는 일제강점기까지도 '대교(大橋)'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경성부민이 필요한 채소와 땔감 등이 이 다리를 통해 공급됐다.
이보다 앞서 흥선대원군 시기 경복궁 중창을 위해 석재가 필요했는데 이때 영도교 돌을 뜯어 자재로 삼고, 대신 띄엄다리로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산업화 시대에는 황학동·신당동 옛 대장간거리 등에 바탕이 된 기계·공구상가가 활황이었다.
이제 영도교는 북쪽에 동묘구제시장, 남쪽은 주방용품시장을 배경으로 곱창집거리, 가내 순대·족발도매거리 등 도시 서민이 즐겨 찾는 골목이 됐다.
전정희 기자 oklaka@oknews.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