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자막’ 선고한 대법…“영화관, 장애인 권리 더 넓혀야”

3일 오전 10시 서울 서초동 대법원 2호 법정. 평소 판결 선고 때는 볼 수 없던 대형 스크린 두 개가 재판부 양쪽에 내려왔다. 재판장인 신숙희 대법관이 선고를 시작하자, 발언 내용이 실시간으로 스크린에 나타났다. 법정 한쪽에 선 수어통역사는 방청석을 바라보며 신 대법관의 말을 수어로 옮겼다. 장애인인 소송 관계자들이 판결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대법원이 마련한 조치였다.
이날은 A씨 등 시각·청각 장애인 4명이 CJ CGV와 롯데컬처웍스, 메가박스중앙 등 대형 영화관 업체들을 상대로 낸 차별구제 소송의 상고심 선고일이었다. 이들은 지난 2016년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화면해설과 자막, 이를 수신할 장비 등을 제공하라”며 소송을 냈다.
통상 대법원 선고는 재판장이 사건번호와 당사자를 말하고 “상고를 기각합니다” 같은 ‘주문’을 읽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이날은 주문을 선고하기 전, 주심인 천대엽 대법관이 직접 판결 이유를 쉬운 말로 설명했다. 이날 원고 당사자들은 나오지 않았지만 농아인협회와 시각장애인협회 관계자 등이 선고를 지켜봤다.
◇쉬운 말로 판결 “영화 100번 중 3번은 너무 제한적”
앞서 서울고법은 2심에서 “장애인에게 자막과 화면해설을 제공하지 않은 것은 차별”이라며 영화관들이 좌석 300개가 넘는 큰 상영관 등에서 전체 상영 횟수의 3%만큼 화면 해설과 자막을 제공하라고 판결했다. 대법원 1부는 이날 2심이 상영관의 규모와 상영 횟수를 제한한 것은 장애인의 영화 관람권을 충분히 보장하지 못한 것이라며 파기환송했다.
천 대법관은 먼저 “대법원의 결론은 서울고등법원(2심)이 잘못 판단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라며 “사건을 돌려보내 다시 재판하도록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천 대법관은 2심 판결을 설명하면서 “영화를 100번 상영하면 그중 세 번 정도만 자막과 화면 해설을 제공하라는 것”이라며 “이렇게 하면 자막과 화면 해설을 매우 제한적으로만 제공하게 되는 셈”이라고 했다.
천 대법관은 “영화관은 장애인에게 자막과 화면 해설을 제공해야 하지만, 이를 제공하는 데 일정한 비용이 드는 것도 사실”이라며 장애인의 권리와 영화관의 경영 사정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영화 등 사회적·문화적 생활을 충분히 즐길 권리를 헌법에 따라 보장받고, 영화관도 자유롭게 영화 산업을 운영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2심은 그중 영화관의 비용 부담에 지나치게 무게를 뒀다는 것이 대법원의 판단이었다. 천 대법관은 “서울고법은 영화관의 비용 지출을 너무 많이 고려했다”며 “앞으로 영화관이 얼마나 돈을 벌고 자막과 화면 해설에 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지, 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영화를 즐기게 하면서도 영화관의 비용을 합리적으로 줄일 방법이 무엇인지를 판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천 대법관의 설명이 끝나자 신숙희 대법관은 “원심판결 중 원고들 패소 부분을 파기하고 이 부분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에 환송한다. 피고들의 상고를 기각한다”고 주문을 선고했다. 천 대법관의 설명과 신 대법관의 주문은 수어와 실시간 자막으로 동시에 전달됐다.


◇“법원이 잘못 판결했습니다”… 대법원 첫 ‘쉬운 판결문’
이날 대법원은 원고들에게 일반 판결문과 함께 대법원 최초의 ‘이지리드(Easy-Read) 판결문’도 제공했다. 간단한 문장과 시각자료로 판결의 핵심을 설명한 ‘쉬운 판결문’이다. 판결문에는 “서울고등법원은 잘못 판결했습니다” “영화관의 비용만 너무 많이 생각했습니다” “자막과 화면해설을 조금만 제공하도록 한 것에 잘못이 있습니다”처럼 일상적인 문장과 그림이 담겼다.
대법원은 올해부터 장애인 등이 판결문 등 사법 정보를 다른 사람과 동등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해하기 쉬운 자료를 제공하도록 하는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 사법지원 예규’를 시행하고 있다. 앞서 이 예규에 따라 서울행정법원에서 지난 6월 쉬운 판결문이 나왔고, 대법원에서 나온 건 처음이다.
대법원은 “최종심에서 판결 요지나 안내 수준을 넘어 판결문 자체를 이지리드 방식으로 작성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쉽게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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