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 대법관 후보 임명 거부… 재제청 요구

이재명 대통령은 28일 조희대 대법원장이 노태악 전 대법관의 후임으로 임명 제청한 손봉기 대구지법 부장판사에 대해 국회에 임명 동의안을 제출하지 않기로 하고 대법관 후보자의 재(再)제청을 요청했다고 청와대가 밝혔다.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 체계에서 대통령이 대법원장의 대법관 임명 제청을 거부한 건 처음이다. 조 대법원장은 이날 퇴근길에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서 송구하다”며 “자세한 내용은 우리가 검토 중에 있으니까 다음 주 중 말씀드리겠다”고 했다.
강유정 청와대 수석대변인은 이날 “노 전 대법관 후임자에 대한 제청은 그 절차적 완결성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다”며 “대법원장은 지난 18일 실질적 협의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손 부장판사를 일방적으로 서면 제청했다”고 말했다. 청와대는 조 대법원장이 이흥구 대법관의 후임자로 임명 제청한 김성수 서울고법 부장판사에 대해서는 임명 동의안을 이날 국회에 제출했다. 사전 협의를 통해 제청에 동의한 김 부장판사에 대해서만 임명 절차를 진행하겠다는 것이다.

청와대는 조 대법원장이 관례를 깨고 대통령과 사전 협의 없이 일방 통보해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민주당도 “전례가 없는 헌정 초유의 상황”이라며 조 대법원장의 자진사퇴를 요구해왔다. 청와대는 헌법상 대법원장에게 부여된 제청권에 대해 “대법원장의 제청권은 완결적인 권한이 아니라 헌법이 임명권자인 대통령에게 부여한 실질적 임명권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행사돼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조 대법원장을 향해 “대법관 후보 추천위의 추천 내용을 존중해 최대한 신속히 재제청 절차를 진행해 주기 바란다”고 했다. 법조계에서는 “대통령이 임명을 원하는 것으로 알려진 김민기 서울고법 판사를 추천하라는 의미 아니겠느냐”는 말이 나왔다. 김 판사는 진보 성향 법관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출신이다.
야당은 “이 대통령이 사법부 장악을 위해 헌법을 짓밟고 삼권 분립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고 했다. 정점식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이 대통령이 임기 중 임명하게 될 22명의 대법관을 모두 마음대로 임명하기 위한 사법부 길들이기 신호탄”이라며 “사법부는 굴복하지 말고 손 부장판사를 다시 제청해야 한다”고 했다.
◇대법관 임명권과 제청권 정면 충돌… 삼권분립 원칙이 흔들린다
이재명 대통령이 이날 조희대 대법원장의 대법관 후보자 임명 제청을 거부하자, 정치권과 법조계에서는 위헌 논란이 일었다. 헌법 104조 2항은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삼권분립 원칙에 따라 제청권, 동의권, 임명권을 각각 동등한 권한으로 부여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하지만 청와대는 이날 “대통령은 주권자인 국민이 직접 선출한 국민의 대표자이고, 대법원장은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한 기관”이라며 “국민 주권 원리에 비춰볼 때 제청권은 임명권을 대체하거나 무력화하는 권한이 아니라 임명권이 올바르게 행사되도록 뒷받침하는 권한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했다. 선출 권력인 대통령의 임명권이 대법원장의 제청권에 우선한다는 것이다. 청와대는 관련 법률 검토를 거쳐 내린 결론이라며 “대통령의 임명권 자체가 실질적인 심사 재량을 내포하고 있다”라고도 했다.
이날 이 대통령이 조 대법원장이 임명 제청한 손봉기 대구지법 부장판사에 대한 임명을 거부하자, 정치권에서는 “대통령이 원하는 인사를 대법관에 임명하기 위해 헌법상 대법원장의 제청권에 공개적으로 개입한 초유의 사건”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당초 청와대는 손 부장판사가 아닌 친여 성향으로 알려진 김민기 서울고법 판사를 제청하라는 입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판사는 이 대통령이 기소된 대장동 사건 핵심 인물인 김만배씨 항소심에서 지난해 1심 유죄 판결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었다.
앞서 대법관 후보 추천위는 지난 1월 노 전 대법관의 후임자로 손 부장판사, 윤성식 서울고법 부장판사, 박순영 서울고법 판사, 김민기 서울고법 판사 등 4명을 조 대법원장에게 추천했다. 이때부터 법원 안팎에서는 청와대는 우리법연구회 출신인 김민기 판사를 후임자로 원하는데, 조 대법원장은 이에 반대해 양측이 대립하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조 대법원장은 김 판사의 남편인 오영준 헌법재판관이 현 정부 들어 헌법재판관에 임명됐다는 점 등을 들어 제청에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내가 관여한 대법원 판결의 위헌성을 남편인 헌법재판관이 재판소원으로 심판하는 건 안 된다는 것이다. 부부가 동시에 최고법관은 전례 없는 일이라는 게 법조계 다수 의견이기도 했다. 하지만 청와대와 여권 인사들은 “남편이 헌법재판관이라고 아내가 대법관을 못 한다는 논리는 억지”, “대법원장의 대통령에 대한 도전이자 항명”이라고 했다.
일각에선 청와대가 김민기 판사를 고수하며 대법원장의 임명 제청을 거부하는 부담을 지는 이유에 대해 “향후 대법관 구성을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민주당은 ‘사법 개혁’이란 이름으로 기존 14명이던 대법관을 26명으로 증원하는 법안을 강행 처리했다. 이에 따라 이 대통령은 임기 내 26명 중 22명을 임명하게 된다. 야당은 “대통령이 자신의 재판을 지우기 위해 대법원을 친명 대법관으로 채우려는 것”이라고 해왔다.
청와대는 이날 재제청과 관련해 대법관 후보 추천위의 기존 추천 내용을 존중해 최대한 신속히 진행하라고 대법원에 요구했다. 그러면서 대법관 후보 추천위가 지난 1월 추천한 인사들을 제청 대상에서 배제하는 것은 “인사 절차의 공정성에 대한 신뢰를 훼손하는 일”이라고 했다. 대법관 공백이 길어지면서 대법원은 아예 후보자를 새로 추천받는 안을 검토했는데, 청와대가 새 후보자를 받지 말고 기존 후보자 중에서 추천하라고 못 박은 것이다.
법조계 인사는 “대법관 후보 추천위가 추천한 4인 중 손봉기 부장판사는 청와대가 거부했고, 윤성식 부장판사는 서울고법 내란전담재판부를 맡고 있어 제청이 어렵다”며 “박순영 판사도 중앙선거관리위원을 겸하면서 최근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연루된 상태라서, 사실상 김민기 판사를 제청하라고 청와대가 요구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다른 인사는 “법원조직법은 ‘대법관 제청 때 후보자 추천위를 둔다’고 규정하고 있다”며 “새로 추천위를 꾸리지 않고 기존 추천된 인사를 재제청하는 게 절차적으로 맞는지에 대해서도 시비가 일 수 있다”고 했다. 이 대통령이 김 판사 임명을 염두에 두고 재제청을 요청한 것이라는 데 대해, 청와대 관계자는 “확인되지 않은 사항”이라고 했다.
야권에서는 이 대통령의 대법관 재제청 요청이 “대통령 입맛에 맞는 ‘이재명 사법부’를 만들겠다고 선언한 것”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이 대통령의 재제청 요구에 대한 위헌 여부 확인을 위해 헌재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하자는 제안도 나왔다. 박충권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사법부에 대한 노골적인 겁박”이라며 “사법부 독립과 삼권분립은 흥정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했다. 허영 전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는 “대통령이 임명 제청을 거부한 건 대법원장의 제청권 침해일 뿐 아니라 국회의 임명 동의권까지도 침해한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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