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멀리'서 '더 안전·더 오래'로…EV 캐즘이 바꾼 배터리 경쟁

장지현 기자 2026. 8. 25.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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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D·KGM, LFP 안전성·장수명·구조 혁신 전면에
리베스트, 실리콘 음극 드론·항공용…스탠다드에너지, 충전·AI ESS 공략
'EV 트렌드 코리아 2026' BYD 부스. 사진=장지현 이코노믹리뷰 기자

'한 번 충전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느냐'에 집중됐던 전기차 배터리 경쟁의 무게중심이 달라지고 있다. 안전성과 수명은 물론 배터리를 차체에 어떻게 넣을지, 전기차 밖에서는 어떤 산업에 적용할지까지 경쟁 영역이 넓어지는 모습이다.

전기차 수요 둔화로 이른바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이 이어지는 가운데 배터리 업체들도 대형 전기차 시장만을 바라보기보다 드론·항공, 에너지저장장치(ESS),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등 새로운 수요처 찾기에 나섰다.

25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개막한 'EV 트렌드 코리아 2026'에서도 이 같은 변화가 곳곳에서 감지됐다.

2018년 시작된 EV 트렌드 코리아는 전기차 민간 보급 확대와 전기차 문화 형성을 위해 마련된 전동화 전문 전시회로 올해 행사는 오는 27일까지 열린다. 전기차뿐 아니라 친환경 이륜차와 건설기계, 충전시설, 배터리, 전장부품 등이 함께 전시된다.

올해는 자율주행과 무인이동체 분야까지 아우르는 '2026 퓨처 모빌리티 위크' 형태로 개최됐다.

이날 전시장에서는 기아와 KG모빌리티(KGM), BYD 등 완성차 업체부터 배터리·충전 업체들이 각기 다른 기술을 전면에 내세웠다.

눈에 띄는 점은 배터리 용량이나 1회 충전 주행거리만을 강조하기보다 안전성과 장기 내구성, 배터리 구조, 특정 산업에 최적화된 성능을 강조하는 업체가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EV 트렌드 코리아 2026' KGM 부스. 사진=장지현 이코노믹리뷰 기자

LFP 어떻게 쓰느냐 경쟁…BYD는 CTB, KGM은 수명·보증 강조

BYD 부스에서는 리튬인산철(LFP)을 기반으로 한 '블레이드 배터리'와 CTB(Cell-to-Body), 전기차 전용 플랫폼 'e-Platform 3.0'이 하나의 기술 체계로 소개됐다.

BYD는 길고 얇은 칼날 형태의 셀 구조를 적용한 블레이드 배터리의 핵심 경쟁력으로 안전성을 내세웠다. 극한의 못 관통 시험에서도 화재나 폭발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 강조됐다.

낮은 원가와 높은 안전성이 강점이지만 삼원계 배터리보다 에너지밀도가 낮다는 평가를 받아온 LFP의 한계를 셀 구조와 차량 설계 기술로 보완하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CTB는 배터리 셀을 별도의 모듈과 팩에 넣는 기존 방식에서 더 나아가 배터리를 차체와 직접 통합하는 기술이다. BYD는 배터리와 차체를 일체화해 구조적 강성을 높이는 동시에 배터리 공간 활용도를 극대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배터리·모터·전장 시스템을 통합한 e-Platform 3.0까지 더해 배터리 소재 자체뿐 아니라 '배터리를 차량 안에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도 전기차 경쟁력의 일부로 가져가는 모습이었다.

KGM이 강조한 지점은 장기간 성능 유지 여부였다. 전시장에는 '국내 최초·최장 10년·100만㎞ 배터리 무상보증'이라는 문구가 크게 걸렸다. 약 65만㎞, 1500회 이상의 충·방전 사이클 이후에도 배터리 건강상태(SOH)를 90% 이상 유지했다는 자체 시험 결과도 함께 제시됐다.

고전압 배터리 BMS(배터리관리시스템)를 통한 열관리도 주요 기술로 소개했다. 배터리 온도를 관리해 성능을 유지하고 열화에 따른 내구성 저하를 억제한다는 설명이다. 차세대 LFP 타입 블레이드 배터리에는 직사각형 셀을 팩에 직접 장착하는 CTP(Cell-to-Pack)를 적용하고 용량은 80.6kWh(킬로와트시)로 구성했다.

완성차 업체의 배터리 경쟁도 셀의 에너지밀도 하나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셀에서 모듈 단계를 줄여 공간 활용도를 높이는 CTP, 배터리를 차체 구조와 결합하는 CTB 같은 구조 기술부터 BMS를 통한 열관리, 장기 보증까지 배터리의 상품성을 결정하는 요소가 세분화되고 있는 것이다.
'EV 트렌드 코리아 2026' 리베스트 부스에 전시된 실리콘 음극재 배터리 셀. 사진=장지현 이코노믹리뷰 기자

"EV만 바라보지 않는다"…실리콘 음극 배터리는 드론·항공으로

배터리 스타트업들의 방향은 완성차용 대형 배터리 시장에서 국내외 대기업과 정면승부하기보다 각 배터리 기술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시장을 찾아가는 모습이다.

대전에 기반을 둔 배터리 셀 업체 리베스트는 실리콘 음극을 적용한 드론·항공용 배터리를 전면에 내세웠다. 리베스트 관계자는 "실리콘 함량을 약 30%에서 60% 수준까지 적용할 수 있다"며 "실리콘의 팽창 문제는 공정 개선을 통해 제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리콘은 기존 흑연 음극보다 많은 리튬이온을 저장할 수 있어 에너지밀도를 높일 차세대 음극 소재로 거론되지만 충·방전 과정에서 부피가 크게 팽창하는 것이 상용화의 난제로 꼽혀왔다. 리베스트는 이 같은 특성을 활용해 무게와 사용시간이 특히 중요한 드론·항공 시장을 우선 공략하고 있다.

제품도 사용 목적에 따라 나눴다. 순간적으로 높은 출력을 요구하는 고출력형부터 출력과 체공시간을 절충한 제품, 오랜 시간 비행하는 데 초점을 맞춘 장기체공형 등을 고객 요구에 따라 공급한다는 설명이다.

리베스트 관계자는 "일부 항공·드론용 제품이 이미 미국 고객사에 공급되고 있으며 국내 드론 업체들의 문의도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리베스트가 EV보다 항공·드론에 우선 집중하는 것은 시장 규모와 경쟁 구도 때문이다. 관계자는 "전기차는 시장이 크고 대형 배터리 업체들이 하고 있어 우리는 니치마켓을 보고 있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항공용 배터리 셀의 핵심 특성으로 경량화와 고출력, 높은 에너지밀도를 제시했다.

리베스트는 고온·고진공 환경의 반도체 제조 공정에서 웨이퍼 레벨 센서에 전력을 공급하는 초박형 배터리도 개발했다. 해당 제품은 0.6㎜ 이하 두께와 고온·진공 대응 설계를 적용했다.

전기차 주행거리를 늘리기 위해 발전해 온 배터리 기술이 드론과 항공, AI 반도체 제조장비로까지 적용처를 넓혀가는 셈이다.
'EV 트렌드 코리아 2026' 스탠다드에너지 부스. 사진=장지현 이코노믹리뷰 기자

車 밖에서도 커지는 배터리 시장

또 다른 배터리 스타트업 스탠다드에너지는 에너지밀도를 높여 이동체에 탑재하기보다 안전성과 고출력, 긴 수명을 앞세워 고정형 ESS 시장을 겨냥한다.

스탠다드에너지가 개발한 바나듐이온배터리(VIB)는 수계 전해액을 사용한다. VIB의 에너지효율이 97% 이상이며 5만회 이상의 충·방전 테스트를 통과해 최소 20년 이상 운용할 수 있다.

다만 리튬이온배터리 대비 에너지밀도가 낮아 같은 에너지를 저장하려면 더 큰 공간이 필요한 만큼 차량 탑재보다는 ESS에 적합하다는 것이 회사 측의 설명이다.

스탠다드에너지가 EV 트렌드 코리아에서 내세운 것도 '차량 안'의 배터리가 아닌 '차량 밖'의 배터리였다. 전기차 초급속 충전소에 ESS를 연계해 전력망의 순간적인 부담을 낮추는 방식이다.

초급속 충전기는 짧은 시간에 막대한 전력을 끌어쓴다. 스탠다드에너지는 전기차 한 대를 초급속 충전할 때 같은 시간 약 500가구가 사용하는 수준의 전력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전기차 보급이 늘고 여러 대가 동시에 충전하는 상황이 반복되면 충전 속도뿐 아니라 배전망에도 부담이 발생할 수 있다. 이때 ESS가 평상시 전력을 저장했다가 충전 수요가 몰리는 순간 전력을 보조하면 기존 전력망의 부담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스탠다드에너지는 이미 서울 도심에서 VIB ESS를 연계한 전기차 초급속 충전 실증을 진행했다. 현장 관계자는 해당 실증 기간 2475대의 전기차가 충전됐다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일본에서도 같은 개념의 실증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VIB ESS를 재생에너지와 전력망 안정화, AI 데이터센터에도 적용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그리드포밍과 진행한 실증에서는 전압 강하 사고가 발생했을 때 0.003초 이내에 전력을 공급하는 그리드포밍 성능을 검증했다. AI 반도체 업체 리벨리온과는 급격한 전력 변동에 대응하는 AI 전력 인프라 솔루션 '도파민'을 공동 개발했다.

전기차 캐즘이 차량용 배터리 업황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지만 이날 전시장에서는 배터리 산업의 또 다른 변화도 확인할 수 있었다.

완성차 업체들은 안전성과 수명, 열관리와 구조 혁신으로 배터리의 상품성을 높이고 있고, 배터리 업체들은 드론·항공과 반도체, ESS·AI 데이터센터와 전력망으로 시장을 넓히고 있다.

전기차 판매량이 곧 배터리 성장률을 의미하던 시기를 지나면서 배터리 경쟁의 기준도 달라지고 있는 셈이다.

앞으로는 얼마나 높은 에너지밀도의 배터리를 많이 생산하느냐뿐 아니라 각 배터리의 특성을 어떤 시장에 최적화해 적용하느냐가 또 하나의 경쟁력이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