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C]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허경주 2026. 8. 18.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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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책 하나 주문해줘.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라는 책이야."

친지를 만나고 오거나 방송에 독립운동 관련 이야기라도 나오면 낡은 책장에서 먼지 쌓인 책을 하나씩 꺼내듯 오래된 이야기를 꺼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루한 이야기 속에는 책에서나 본 이름이 어지럽게 교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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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충남 천안시 성정청소년문화의집 청소년 역사 여행 '호국영웅투어'에 참가한 학생들이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아 독립운동가 복장으로 태극기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책 하나 주문해줘.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라는 책이야.”

아빠에게 뜬금없는 연락이 왔다. 무장 독립운동 토대를 만든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선생의 손주며느리, 허은 여사의 회고록을 구해달라는 부탁이었다.

허은 여사는 아빠의 고모할머니,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친고모라고 했다. 책에는 애국지사와 가족의 험난했던 만주 망명과 독립운동 비사가 주로 담겼는데, 조카였던 할아버지와의 일화도 짧게 등장한다고도 했다. 그 희미한 흔적이라도 확인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빠는 늘 이랬다. 친지를 만나고 오거나 방송에 독립운동 관련 이야기라도 나오면 낡은 책장에서 먼지 쌓인 책을 하나씩 꺼내듯 오래된 이야기를 꺼냈다.

“허은 여사의 아버지이자 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인 허발 선생은 독립운동을 하셨고, 당숙이자 구한말 의병장인 왕산 허위 선생의 투쟁에도 가담했고, 누이인 허길 여사는 민족저항시인 이육사의 어머니이고, 독립운동가 누구는 어쩌고저쩌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루한 이야기 속에는 책에서나 본 이름이 어지럽게 교차했다. 그리고 이야기의 결론은 늘 하나였다. “항일 지사의 피가 흐르니 자부심을 가져라.”

과장을 조금 보태면 백 번은 들었을 레퍼토리다. 그중 아흔아홉 번은 한 귀로 흘려보냈다. ‘조상이 독립운동한 게 무슨 의미가 있나. 덕 본 게 하나도 없는데.’ 사촌들과도 카톡으로만 안부를 묻는 판에, 본 적도 없는 선조의 궤적이 피부에 와닿을 리 없었다.

배우 하영이 여러 의혹 속에서 결국 증조부 친일 의혹을 인정하며 사과문을 올렸다. KBS2 영상 캡처

정작 아빠와 형제들은 숨 쉬듯 배를 곯는 어린 시절을 보냈으면서, 허울뿐인 집안의 역사에 왜 이리 자부심을 갖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독립운동’이란 단어는 존경을 자아낼지언정 내 삶과는 동떨어진 얘기로만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매년 3·1절이나 광복절이 되면 ‘독립운동가와 후손이 잊히고 있다’는 기사를 쓰면서도, 정작 가족의 이야기에는 지독히도 무관심했다.

‘남의 일’로 치부하던 부끄러운 무감각을 깨운 것은, 역설적이게도 연예계를 달군 한 배우의 가문 논란이었다. 방송에서 집안을 언급했다가 증조부의 친일 행적이 드러나며 거센 역풍을 맞았다. 과거를 몰랐는지, 알면서도 외면했는지는 알 수 없다. 본질은 역사적 맥락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 낳은 촌극이란 점이다.

조상의 잘못을 가린 채 자랑으로 포장한 이와, 헌신을 알고도 고개를 돌려온 나. 무지는 과오를 미화하고 무관심은 숭고함을 잊게 만들었다. 어쩌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역사를 바라보는 무심함일지도 모른다. 그 고리를 끊어내고자 뒤늦게나마 기억하려는 작은 걸음을 떼려 한다. 40년 만에 처음으로, 아흔아홉 번의 건성은 접어두고.

P.S. 글을 마무리 짓고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옛이야기에 처음 보인 관심이 퍽이나 반가웠는지, 수화기 너머 달뜬 목소리가 한참 동안 귓가에 맴돌았다.

허경주 사회부 차장

허경주 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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