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할수록 선명해지는 ‘나’[이주영의 연뮤덕질기](78)

2026. 8. 14.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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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쇼 <나 혼자만 레벨업 on ICE>, 발레 <백조의 호수>, 뮤지컬 <유미의 세포들> 등
아이스쇼 <나 혼자만 레벨업 on ICE> 공연 장면. ㈜라이브아레나 제공

한국 왕자를 대표하는 20대 초반 두 청년을 지난 8월 6일과 7일 연이어 만났다. 얼음 위에서, 발레 무대에서 세계와 경쟁해온 국가대표 피겨스케이터 차준환과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 퍼스트 솔리스트 전민철이다. 세계적 위치에 있는 이들의 신작 기자간담회는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을 시험하는 과정을 진솔하고 진지하게 들려주는 자리였다. 차준환은 <나 혼자만 레벨업 on ICE>에서 가족을 위해 무수히 도전하는 헌터 성진우가 됐다. 전민철은 유니버설발레단 <백조의 호수>에서 백조를 구하려다 사랑에 빠지고 선택의 시험대에 오르는 지그프리드 왕자가 됐다.

<나 혼자만 레벨업 on ICE>(웹툰 ‘나 혼자만 레벨업’ 원작, 우진하 연출·각색, 박찬민 극본, 이강현 작곡·음악감독, 김해진·차준환 스케이팅 안무, 신선호 플로우 안무, 김정열 액선감독)에서 차준환은 피겨의 경계를 넘나든다. 직접 노래를 부르고 연기를 하면서 피겨스케이트로 서사를 전달하는 퍼포머이자 안무가로 거듭난다.

원작 팬이라고 밝힌 그는 안무 작업에 참여해 액션과 군무가 많은 작품의 특성을 피겨스케이팅으로 녹여냈다. 관객에게 세계적 스케이터 차준환이 아닌 극중 성진우를 각인시키는 과정이다. 또 원작의 여러 캐릭터를 아이스쇼의 스피드와 스펙터클에 맞게 재매개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실제로 필자가 관람한 작품은 피겨스케이팅을 중심으로 뮤지컬과 액션, 아이스하키 군무, 에어리얼 퍼포먼스(공중예술)와 파이어쇼까지 결합한 하이브리드 장르였다. 그가 안무에 참여하고 액션을 소화하며 라이브로 노래하는 장면은 성진우(차준환 분)가 끊임없이 한계를 깨며 레벨업하는 극 중 이야기와 닿아 있다.

피겨 프린스 대 발레 프린스

전민철은 클래식 발레의 본질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간다. 마린스키발레단의 빡빡한 시즌 중에도 유독 많은 시간을 들였다는 <백조의 호수>(표트르 차이콥스키 음악, 마리우스 프티파·레프 이바노프 안무, 올레그 비노그라도프·유병헌 개정안무, 나탈리아 스피치나 연출, 시몬 파스투크 무대, 갈리나 솔로비예바 의상)다. 그는 한국에서 <지젤>, <라 바야데르> 등 여러 작품의 주역을 경험한 시간이 큰 자산이 됐다고 했다.

유니버설발레단에서 성장해 마린스키 퍼스트 솔리스트가 된 그가 다시 한국에서 추는 지그프리드는 그래서 특별하다. 한국에서 성장한 전민철과 마린스키에서 단련된 전민철이 융화해 탄생할 유일무이한 지그프리드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그를 지켜본 문훈숙 단장은 전민철을 “부담을 즐기는 성품”이라고 평한다. 그러나 정작 그가 마린스키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꼽은 것은 거창한 성취가 아니라 함께 춤추는 사람들이 자신을 믿고 좋아해주는 순간이다.

도전을 거듭할수록 무엇이 자신에게 중요한지는 오히려 선명해진다. 그 사유와 경험이 어떤 지그프리드로 육화될지 궁금해지는 이유다. 이들처럼 낯섦과 익숙함의 양가적 부담을 이겨나가며 성장하는 청년들이 주인공인 작품도 다양하다. <유미의 세포들>의 유미와 109세포, <헬스키친>의 알리, <죽은 시인의 사회>의 웰튼 학생들이다. 청년기 문턱에서 이 작품들은 끊임없이 질문한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기 웹툰 원작 뮤지컬 <유미의 세포들>(양정웅 연출, 김가람 극작, 최재광 작곡, 김성수 음악감독, 이현정 안무)은 그 질문을 심연으로 가져간다. 유미(티파니 영·김예원 분) 안에는 사랑세포와 이성세포, 불안세포와 응큼세포 등 수많은 ‘나’가 공생한다. 그중에는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나조차 잘 모르는 내가 있다. 뮤지컬에 새롭게 등장한 109세포(최재림·정택운 분)다.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나를 발견하고 이해해가는 과정은 곧 자존감을 찾아가는 여정이 된다. 자아란 애초 하나의 단단한 핵이 아니라 여러 목소리가 충돌하고 협상하며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무엇인지도 모른다. 성장은 그 목소리 중 무엇에 귀 기울이며 내 삶을 살아갈 것인지 선택하는 일이다.

<유미의 세포들>은 109세포를 통해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들여다보고 스스로의 가치를 발견하는 과정을 신체화된 세포들의 다채로운 움직임으로 펼쳐낸다. 뮤지컬 <헬스키친>과 연극 <죽은 시인의 사회>도 마찬가지다. 두 작품의 청소년은 부모의 강한 사랑과 욕망 아래서 ‘나’와 ‘부모’의 경계를 찾아간다.

뮤지컬 <유미의 세포들>공연 장면. ㈜샘컴퍼니 제공

팝스타 앨리샤 키스의 자전적 이야기에서 출발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헬스키친>(앨리샤 키스 작곡·작사, 크리스토퍼 디아즈 극작, 마이클 그라이프 연출, 카미유 A. 브라운 안무, 오루피나 국내협력연출, 양주인 국내협력음악감독, 강동주 국내협력안무가)의 17세 앨리(손승연·김수하 분)에게 엄마 저지(박혜나·최현선 분)는 자신을 가장 사랑하면서도 삶을 대신 결정하려는 거대한 세계다.

앨리는 성장하기 위해 엄마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 사이에 경계를 긋는다. 과보호하는 엄마와 무심한 아빠 데이비스(테이·케이윌 분), 자신을 키운 헬스키친이라는 세계에서 받은 음악과 사랑을 품은 채 바깥으로 걸어나간다. 홀로서기란 부모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받은 것을 자기 삶의 일부로 다시 배치하는 과정임을, 익숙한 팝과 자유로운 힙합의 움직임으로 느끼게 한다.

타인이 규정한 나, 내가 원하는 나

<죽은 시인의 사회>(톰 슐만 원작, 조광화 연출·윤색, 박설영 번역, 심새인 협력연출·움직임, 이동준 작곡·음악감독, 박상봉 무대, 고태용 의상, 정태진 조명)의 닐(김락현·이재환·찬희 분)에게는 거리 두기가 끝내 허락되지 않는다. 배우가 되고 싶은 자신의 욕망보다 아버지(남경읍·박지일 분)가 설계한 미래가 압도적으로 크다.

부모의 욕망이 내 안의 여러 목소리 중 하나가 아니라 존재 전체를 잠식할 때 벌어지는 비극이다. 반대편에는 토드(김태균·문성현 분)가 있다. 말조차 제대로 꺼내지 못하던 소년은 모든 비극의 책임을 지고 학교를 떠나는 키팅 선생(차인표·오만석·연정훈 분)을 향해 책상 위에 올라 “오 캡틴! 나의 캡틴!”을 외친다. 키팅에게 배운 언어지만 그 순간만큼은 토드 자신의 목소리다. 좋은 교육의 완성은 스승을 닮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받은 것을 자기 목소리화 하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차준환에게도 코치와 안무가, 선배가 있다. 전민철에게도 스승과 발레단, 수백년 축적된 클래식 발레의 전통이 있다. 누구도 혼자 ‘자신’이 되지는 않는다. 타인에게서 받은 수많은 것이 우리 안에 쌓여 자기 방식으로 재배열하며 유일무이한 ‘나’를 형성한다. 차준환은 자신의 영역 밖으로 나가고, 전민철은 자기 예술의 중핵으로 깊이 들어가며 자신만의 해석을 더하는 과정에 있다. 작품 속 성진우와 109세포, 앨리와 토드, 지그프리드 역시 어제의 자신을 넘어선다.

무대에서는 ‘나 혼자만’ 레벨업할 수 있을지 몰라도 현실에서는 누구도 혼자 레벨업하지 않는다. 어쩌면 ‘도전’은 타인에게서 받은 것으로 ‘나’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나 혼자만 레벨업 on ICE>은 8월17일, <백조의 호수>와 <유미의 세포들>은 8월 23일, <죽은 시인의 사회>는 9월 13일, <헬스키친>은 11월 8일까지 공연한다.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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