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안판석 감독 추모 이어져…김혜수 “마지막 삶까지 연출에 바쳐”
‘하얀거탑’·‘밀회’ 등 대표작 남겨

드라마 '하얀거탑'(2007),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2018) 등을 만든 안판석 감독이 지난 12일 별세하면서 방송가에 추모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다.
고인의 드라마 '짝'(1994~1998)에 출연한 배우 김혜수는 13일 언론 인터뷰에서 "(별세) 소식을 듣고 오랫동안 멍했다.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며 "마지막 순간까지도 연출자로서 놓지 않으셨다. 본인의 마지막 삶까지 (연출에) 바치신 것에 대한 존경심이 있다"고 애도했다.
안 감독의 최근작인 JTBC '협상의 기술'(2025) 제작사 비에이엔터테인먼트도 "감독님은 언제나 시청자들에게 재미있고, 감동적이며, 깊이 있는 이야기를 전하고자 했던 분"이라며 "감독님께서 평생 만들어 오신 수많은 장면과 이야기들은 앞으로도 오래도록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추모했다.
배우·제작진 추모 이어져…"귀한 어른이었다"
고인의 대표작 '밀회'(2014)에 출연한 배우 김혜은은 별세 당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제 마음의 키를 키워주신 감독님"이라며 "너무나 아까워 가슴이 미어진다"고 슬퍼했다.

"모든 드라마는 리얼해야"…세태 읽어낸 작품 세계
1987년 MBC에 입사해 드라마 연출을 시작한 그는 "모든 드라마는 리얼해야 한다"는 소신 아래 작품을 만들었다.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하얀거탑'은 병원을 로맨스의 현장이나 사람을 살리는 휴머니즘의 무대로만 비추던 당시 의학물의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한국형 의학 드라마의 새 장을 열었다.
김명민을 스타 반열에 올린 이 작품은 권력을 향한 인간의 욕망과 병원 내부의 정치적 역학 구도를 밀도 높게 그려 이후 등장한 의학물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가부장적 현실에 대한 통찰을 담은 '장미와 콩나물', 아줌마를 주인공으로 지식인의 속물근성을 꼬집은 '아줌마', 20세 연상 연하의 불륜을 통해 상류층의 위선과 욕망을 다룬 '밀회', 부와 혈통을 세습하는 특권층을 비판한 '풍문으로 들었소' 등 안 감독의 연출작엔 세태를 향한 날카로운 시각이 세련되게 담겼다. 남녀의 심리를 섬세하게 포착한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봄밤', '졸업' 등 설레는 멜로에서도 이러한 문제의식은 여전했다.
롱테이크·풀샷으로 만든 '안판석 드라마'
그의 작품 세계를 돋보이게 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연출 참고서 삼은 극사실주의 연출이다. 롱테이크, 풀샷 등을 이용해 포착하듯 찍고 특유의 색감을 입힌 연출 기법은 '안판석 드라마'라는 수식어를 만들어 냈다.
제작 환경을 개선하는 데도 힘썼다. 현장에서도 배우나 스태프에게 지시·명령하는 대신 꾸준한 대화로 장면을 함께 만들어갔다. 쪽대본, 생방송 같은 촬영 문화가 관습화된 업계 분위기에서도 철저한 준비로 배우·스태프의 휴식 시간을 보장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인권이 있는 현장"…촬영문화 개선에도 힘써
한 연예기획사 관계자는 "안 감독은 '덕장'이라 불릴만한 현장의 리더였다"며 "감독님의 비보를 들은 배우들이 정상적으로 촬영을 진행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슬퍼하고 있다"고 전했다.
드라마 평론가인 윤석진 충남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는 "안 감독은 사회 변동기에 환경적 요건과 충돌하는 인간의 본성을 섬세하게 연출한 인물"이라며 "작품으로 대중에게 끊임없이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화두를 던졌던 분"이라고 평했다.
이어 "안 감독의 작품은 시대의 풍속을 그대로 드라마로 연출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풍속화'라고도 볼 수 있다"며 "과거 방송 프로그램의 한 꼭지로 인식되던 드라마를 독립된 영상 예술로 옮겨 위상 변화를 가져오는 데도 큰 공헌을 했다"고 설명했다.
안 감독은 최근 뇌출혈로 쓰러져 투병하던 중 지난 12일 세상을 떠났다.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장례식장 1호에 마련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