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을 통해 인류 문명의 시간을 읽어낸다”…이재태 교수의 ‘세계의 종 이야기’

박태해 2026. 8. 7.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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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종(鐘) 하나에 거대한 세계사가 담겨 있다.

'세계의 종 이야기'는 종을 통해 인류 문명의 시간을 읽어내는 독특한 역사서다.

저자는 각각의 종에 담긴 이야기를 따라가며 세계사의 다양한 장면을 펼쳐 보인다.

'세계의 종 이야기'는 작은 금속 공예품 하나가 어떻게 인간의 역사와 예술, 종교와 전쟁, 기쁨과 슬픔을 함께 품어왔는지를 흥미롭게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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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종 이야기
이재태/학이사/2만8000원

작은 종(鐘) 하나에 거대한 세계사가 담겨 있다. 종은 시간을 알리는 도구였고, 신앙의 상징이었으며, 권력의 표식이었다. 때로는 전쟁의 참상을 기록했고, 평화와 희망을 알리는 소리가 됐다. 한 번 울리고 사라지는 종소리지만 그 울림은 인간의 기억 속에 오래 남는다.

‘세계의 종 이야기’는 종을 통해 인류 문명의 시간을 읽어내는 독특한 역사서다. 저자인 이재태 경북대 의대 명예교수는 30여 년 동안 세계 각국의 종 1만여 점을 수집해 온 종 전문가다. 그는 방대한 소장품 가운데 역사적·문화적 의미가 깊은 종들을 골라 그 탄생 배경과 시대상을 흥미롭게 들려준다. 독자는 책을 통해 종을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종이 지나온 시간을 함께 읽게 된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웨딩종
종의 역사는 인류 문명의 역사만큼 오래됐다. 고대 중국에서는 황제와 염제가 종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3000년 전 바빌론 유물에서도 종의 흔적이 발견된다. 성경 출애굽기에는 제사장의 예복에 종을 달았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그러나 종은 처음부터 시간을 알리는 도구가 아니었다. 인간은 종소리로 신에게 기도했고, 공동체를 불러 모았으며, 권위를 드러냈다. 종은 신과 인간, 권력과 백성, 공동체와 개인을 이어주는 매개였다. 저자는 각각의 종에 담긴 이야기를 따라가며 세계사의 다양한 장면을 펼쳐 보인다.
가장 눈길을 끄는 사례 가운데 하나는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웨딩 종이다. 빅토리아 여왕은 결혼하는 부부에게 아름다운 유리종을 선물했고, 이후 영국 사회에서는 이를 결혼 선물로 주고받는 풍습이 유행했다. ‘빅토리아 여왕 웨딩종’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결혼과 가정을 중시했던 당시 사회 분위기를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아름다운 공예품 안에는 산업혁명 이후 성장한 중산층 문화와 빅토리아 시대의 가치관이 오롯이 담겨 있다.

복음전도자의 종
‘복음전도자의 종’  이야기도 흥미롭다. 20세기 초 영국에서 제작된 이 종은 영화 '검은 사제들'과 '검은 수녀들'에서 구마 의식의 소품으로 사용됐다. 영화에서는 악령을 물리치는 신비로운 물건으로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중세 기독교 신앙과 제례 문화를 이어온 역사적 유물이다. 하나의 종이 수백 년 전 종교문화와 현대 대중문화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셈이다. 
맥주를 나르는 바이에른 전통 의상의 여성 인물종
독일의 옥토버페스트를 기념한 종은 지역 문화의 상징성을 보여준다. 1900년 무렵 제작된 이 종에는 생맥주 네 잔을 나르는 바이에른 전통 의상의 여성이 표현돼 있다. 작은 공예품 하나에 독일의 축제 문화와 지역 정체성이 응축돼 있다.
치즈 절구의 홍두깨를 누르면 소리가 나는 원숭이 황동 기계식 탁상종
시가 보관함과 재떨이 기능을 가진 주철 원숭이 탁상종
저자는 종에서 인간의 창의성과 유머도 발견한다. 19세기 프랑스 장인들이 만든 치즈 만드는 원숭이 탁상종과 혀를 누르면 소리가 나는 가고일 괴물 종은 생활용품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시대정신을 보여준다. 기능만을 위한 물건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상상력을 담아낸 작품들이다.

종은 전쟁의 기억도 간직하고 있다.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종은 공출돼 무기로 녹아 사라졌다. 반면 참호에 버려진 탄피와 철조각은 새로운 종과 생활용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철십자훈장을 손잡이로 단 종과 전쟁 금속을 활용한 참호 예술품은 인간이 남긴 상처와 회복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흔히 역사는 거대한 전쟁과 영웅을 중심으로 기억되지만, 저자는 역사의 현장에 등장한 종들이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시대의 공기를 생생하게 간직한 증언자라고 말한다. 학이사 제공
저자가 책을 통해 전하려는 핵심 메시지는 종의 본질이 ‘소통’에 있다는 점이다. 신을 부르는 종에서 학교 수업을 알리는 종으로, 화재를 알리는 경종에서 전화벨과 자명종에 이르기까지 형태와 기능은 달라졌지만 종은 언제나 사람과 사람을 이어왔다.

오늘날 종소리의 상당수는 전자음으로 대체됐다. 스마트폰 알림음이 과거의 종소리를 대신하는 시대다. 그럼에도 우리는 새해를 여는 보신각 종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성당의 종소리에서 위안을 얻으며, 오래된 학교의 종소리를 들으면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린다. 기술은 변했지만 소리가 불러오는 기억과 감동은 여전히 살아 있다.

‘세계의 종 이야기’는 작은 금속 공예품 하나가 어떻게 인간의 역사와 예술, 종교와 전쟁, 기쁨과 슬픔을 함께 품어왔는지를 흥미롭게 들려준다. 종을 단순한 생활용품이 아니라 시대의 증언자이자 문화의 기록물로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책이다. 저자는 “종은 더 이상 단순한 생활 도구가 아니다. 시대를 울리고 사람을 이어온, 인류가 만든 가장 오래된 문화의 언어”라고 말한다.

박태해 선임기자 pth122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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