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장의 미아리 고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호준석 국민의힘 전 대변인, 현 서울 구로갑 당협위원장 2026. 7. 18.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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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준석의 역사전쟁]

6·25 남침 당시 전차를 앞세운 인민군이 서울 시내로 들어오려면 의정부를 뚫고 미아리 고개를 넘어야 했습니다. 파주·고양 방면은 북한산과 도봉산을 우회하고 한강을 건너야 했지만, 의정부·미아리 방면에는 장애물이 없고 한반도에서 가장 잘 닦인 도로가 있었습니다. 미아리 고개는 서울 도심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었습니다. 인민군 전차가 미아리 고개를 넘는 걸 보고 서울시민들은 공산 치하가 됐음을 알았고, 반대로 인천상륙작전 후 인민군이 쫓겨 갈 때도 넘어야 하는 것은 미아리 고개였습니다.

인민군은 다급하게 철수하는 와중에도 남한의 반공 인사들을 잔인하게 숙청했습니다. 사상자가 2만500여 명에 달했습니다. 서울의 시설과 물자는 철저히 파괴해 초토화시켰습니다. 더 끔찍한 것은 8만3000여 명을 강제로 북한으로 끌고 간 것입니다.(대한민국 통계연감(1954년) 자료) 미아리 고개는 끌려가던 서울시민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가족과 생이별하던 장소였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1956년 나온 노래 <단장(斷腸)의 미아리 고개>는 단장, 즉 창자가 끊어질 듯한 슬픔과 괴로움을 노래했습니다. 노랫말을 지은 반야월에게도 통곡의 사연이 있었습니다. 그는 9·28 서울 수복 후 전쟁통에 헤어진 아내와 극적으로 상봉했지만, 네 살짜리 딸 수라가 죽 한 그릇 못 먹고 굶주림에 시달리다 미아리 고개에서 눈을 감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넋이 나간 아내는 딸을 이불에 싼 채 호미로 땅을 파서 묻었다고 합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백병원과 인제대의 창립자 격인 백인제 박사는 일제 시대 국내 최고 외과 의사였습니다. 3·1 운동에 참여해 6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인민군은 서울을 점령하자마자 백인제외과병원을 포위했습니다. 당시 51세였던 백 박사는 혼자 피신하고 가족들은 가회동 집에 감금돼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7월 19일 새벽 백인제 박사가 두 청년에게 끌려 가회동 집으로 왔습니다. 체포된 그가 늙은 아버님을 한번만 뵙고 가겠다고 해서 온 것입니다. 집에 숨어 있던 동생 백봉제까지 두 형제가 함께 연행됐고, 인민군이 후퇴할 때 북으로 끌려갔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홀로 남은 부인 최경진 여사가 병원을 운영했습니다. 인민군은 병원 설비와 가구까지 모조리 뜯어 갔다고 합니다. 1955년 백 박사의 집을 찾은 기자에게 부인은 “아직도 남편이 외국 출장 간 것만 같다”며 “언제든 꼭 돌아오리라고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책상에는 국민학교 2학년인 딸의 산수 시험 답안지가 놓여 있었고, 국민학교 4학년인 둘째 아들은 “남북 통일을 하고 내 손으로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말했습니다.(경향신문 1955.11.28 자)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6·25 전쟁 납북 피해자 진상규명 및 납북 피해자 명예회복위원회’가 민관의 납북자 명부 12종을 바탕으로 추산한 전시 납북자는 9만5456명입니다. 이 가운데 7만여 명은 인민군으로 끌려간 사람들이고, 2만여 명은 정·재계 유력 인사, 법조인, 언론인, 교육자, 의료인, 예술인, 문학가, 은행원, 기술자, 통역사 등 전문직, 그리고 경찰, 종교인, 우익 단체 회원 등 이른바 ‘반체제 인사’들입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김일성은 1946년 7월 31일 “부족한 인테리(고학력자) 문제를 해결하려면 북조선에 있는 인테리들을 다 찾아내고 남조선에 있는 인테리들을 데려와야 한다”고 교시했습니다. 그러나 전쟁 전까지 인재 편중은 더 심해졌습니다. 공산 체제의 비인간성과 심각한 경제난을 체험한 북한의 인재들이 속속 월남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김일성이 패퇴하는 와중에도 대규모 납북이라는 전쟁범죄를 저지른 것은 남한 인재의 씨는 말리고, 이들을 김일성 정권에 복무하게 하려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우익 인사 납북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1949년 8월 5일 자 북한 연천주재기관 사업보고서에는 “남한의 반공산주의 집단을 북으로 데려와 그들을 분열시키고 파괴시킨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일제강점기 경성치안유지법원이 있었고 해방 후 경찰 시설로 사용된 서울 청계천로 30번지(현 예금보험공사)의 ‘애국 인사 구금지’ 등에 억류돼 있던 애국 인사들은 철사줄, 새끼줄로 묶인 채 맨발로 미아리 고개를 넘어 북쪽으로 끌려갔습니다. 가족들은 그들이 죽음의 행렬에 서서 미아리 고개를 넘는 것을 통곡하며 지켜봐야 했습니다.

“쇠고랑을 채우고 20여 일을 이동하니 나중에는 굳은살이 배겼다. 자식, 처, 부모 생각이 나서 다들 남쪽 하늘을 쳐다보면서 울었다. 떠나는 날마다 울음바다였다.” (실업 농구팀 선수였던 당시 28세 김용일 씨 증언)

“우리는 산간 지역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너무 지쳐 있었고 다리는 힘이 다 빠졌는데 북한군은 지친 사람은 밖으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손을 든 사람들은 밖으로 나갔고 처형됐습니다. 우리는 너무 겁에 질려 그들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리는 풀리고 그들은 우리를 계속 때리면서 걷게 했습니다.” (납북됐다 탈출한 당시 서울대 간호대 2학년 박명자씨 증언)

납북자의 98.2%는 남성, 85%는 10대 후반부터 35세까지의 청년이었습니다. 젊은 아내, 어린 자식, 부모님과 생이별한채 지옥 같은 체제로 끌려가면서도 한 가닥 희망만은 놓지 않았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자유여, 그대는 불사조. 우리는 조국의 강산을 뒤에 두고 홍염만장 철의 장막 속 죽음의 지옥으로 끌려가노라. 조국이여 UN이여, 지옥으로 가는 우리를 구출하여 준다는 것은 우리의 신념이라.” (평양형무소 내벽에서 발견된 납북자 메모)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민간인 수만 명을 납치해 끌고 가는 전쟁범죄는 유례없는 일이었습니다. 1951년 7월 시작된 휴전회담에서 유엔군은 납북 민간인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납치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자진 월북이라 주장하는 북한군은 벽과도 같았습니다. 1952년 1월 유엔군은 인민군 포로와 납북 민간인의 1:1 교환까지 제안했지만, 북한은 전쟁 중 남으로 내려와 정착한 이른바 ‘실향사민(失鄕私民)’도 돌려보내라며 물귀신 작전을 폈습니다. 실향사민은 자의로 남한에 내려온 사람들이고, 납북자는 강제로 끌려간 사람인데도 말입니다. 결국 납북된 민간인은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전시 납북자들은 북한 정착 후에도 극심한 핍박을 당했다. 밀착 감시와 처벌을 받고 대부분 오지의 광산, 강제노동수용소, 정치범 수용소로 수용됐다. 가족들과 소식을 주고받을 권리조차 부여받지 못했다. 북한의 성분제도에서 가장 낮은 적대계층이 됐고 자손들은 교육과 취업의 기회마저 박탈당했다.” (유엔인권위 2014년 북한인권보고서 중)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남아있는 가족들의 고통도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 모두가 살아남기에 바빴던 전쟁 직후, 납북자 문제는 후순위로 밀리기 일쑤였고, 가족들을 돌봐줄 사회적 여력도 없었습니다. 1955년 11월 이승만 대통령이 임병직 유엔 주재 대사에게 유엔 총회에서 여론을 환기해 납북 민간인을 구출하라는 훈령을 내리고, 조정환 외무장관이 중공에 납북 민간인 석방을 요구했지만 성과는 없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괴뢰들의 악랄한 쇠사슬과 총부리에 얽혀 이북으로 끌려간 납치인사들. 생사조차 알 길 없는 묘연한 수년 동안 유가족들의 울부짖음은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다. 정부 당국이나 사회로부터 하등의 보호를 받음이 없이 비참한 자활의 길을 걷고 있는데, 오직 납치인의 귀환만을 몽매에도 그리며 가냘픈 희망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1955.11.22 경향신문)

당시 경향신문이 찾아간 36살 방금녀 씨의 남편 윤상철 씨는 우익 청년운동가였습니다. 북한의 남침 당시 다리가 부러져 깁스를 하고 누워있던 남편은 6월 28일 걷지도 못하는 채로 공산당원에 끌려갔습니다. 남편이 납북된 뒤 방 씨는 시장에서 헌옷 보따리 장사를 하며 회현동 판잣집 단칸방에서 노모를 비롯한 식구 5명을 부양했습니다. 방 씨는 생사도 알 수 없는 남편이 꿈에라도 돌아왔으면 하고 매일 기원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45살 김옥선 씨도 동회 간부였던 남편 박중식 씨가 끌려간 뒤 남대문시장에서 나물 장사를 하며 가족 4명을 먹여 살리고 있었습니다. 나물 장사만으로는 생계를 이을 수 없어 12살 난 아들이 구두닦이를 하며 살림을 보태고 있다고 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사랑하는 남편이, 그리운 아빠가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는 그들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무도한 북한 정권은 지금도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가장 귀중히 여기고 그것을 최상에서 보장해 주고 있는 우리 공화국에서는 애당초 ‘랍북자’란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북한인권동향 1권 2호(2006)> 통일연구원) 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가 만든 사이버 기념관(www.돌아오지못한사람들.kr) 에는 단장의 사연들이 지금도 절절합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아버지가 저와 생이별할 때 연세가 마흔이셨습니다. 저는 네 살이었죠. 그 어린 아들은 일흔 한 살 노인이 되었는데 아버지 연세는 아직도 그대로 마흔이시니 뒤바뀐 부자간의 나이가 오늘따라 슬프기만 합니다.” (최영재 씨, 2017년)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제분소를 운영하며 대한청년단 활동을 하던 29살 남편 하격홍씨가 납북된 후 어린 세 딸을 홀로 키운 성갑순 씨는 몇 번이나 죽고 싶었지만 세 딸을 바라보며 견디고 또 견뎠습니다. 그녀는 “차라리 영화 아버지(하격홍)도 전사했더라면 일 년에 한 번씩은 속 시원히 울어나 볼 것을”이라고 한을 토했습니다. 금융조합에 근무하며 대한청년단 일을 하던 남편 김재봉 씨가 인민군에 끌려간 한 달 뒤, 부인 김항태 씨는 임신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혼자 딸을 키우면서 딸이 태어난 것도 모를 남편을 기다렸습니다. “당신 소식을 듣기 전엔 내가 죽을 수 없어요. 소식 좀 전해 봐요”라고 그녀는 절규했습니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는 결코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도 계속되는 우리 모두의 아픔입니다. 다시 한번 이 노래를 되뇌어 봅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미아리 눈물고개, 님이 떠난 이별고개

화약 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철사줄로 두 손 꼭꼭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아빠를 그리다가 어린 것은 잠이 들고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

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을 하오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

울고 넘던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단장의 미아리 고개> (작사 반야월, 작곡 이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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