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탉론’ 선덕여왕 위해 세운 80m 랜드마크···생뚱맞은 ‘김유신 장군’ 유물[이기환의 사래자(思來者)]

2026. 7. 17.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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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2월 경주 황룡사 9층 목탑터에서 ‘목탑 찰주본기’와 함께 도굴됐다가 압수된 ‘중화3년’명 금동사리기. 그런데 이 사리기엔 황룡사 9층 목탑의 창건 및 중수기인 ‘찰주본기’에 기록된 ‘목탑 중수 연도’(872) 보다 11년이나 늦은 ‘중화3년’(883) 명문과 함께 ‘김유신’이라는 인명이 새겨져 있었다. 뜬금없는 연도와 인물이 등장한 것이다. 그 때문에 이 사리기는 다른 곳에서 도굴된 장물로 치부되어 주목받지 못했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1966년 9월3~5일 경주 불국사 경내에 연일 수상한 자들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이들은 석가탑(일명 무영탑)의 기단과 기단 사이에 유압 잭을 넣어 들어 올리려 했다. 하지만 유물을 찾지 못했고, 잭마저 ‘꽝!’하고 미끄러졌다. 그 바람에 탑신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허탕 친 도굴범 일당은 그대로 도망쳤다. “사건 당일 수상한 사람 2명을 태우고 불국사로 갔다”는 택시 운전자의 증언에 따라 수사망이 좁혀졌다. 그렇게 해서 붙잡힌 일당 중에 국립경주박물관 수위로 10년 재직했던 윤×만이 포함되어 있었다.

여죄를 추궁하니 굴비 엮듯 줄줄 나왔다. 남산사터·안동사터·달성군 사찰(이상 1966년 3월초)-남원 절터·대구 동화사·경주 월광사·양산 통도사(6월)-창녕 무명탑(7월 상순)·전북 칠삼사(8월) 등을 돌며 닥치는대로 유물을 빼내 팔아치운 것으로 드러났다. 그중 압권은 1964년 12월의 ‘황룡사 9층 목탑 터 심초석 사리공 도굴 건’이었다. 사건의 발단이 얄궂었다. 이전까지 황룡사 9층 목탑터엔 민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사리기가 안장되어 있던 심초석 위에 민가의 담장이 들어서 있었다. 도굴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그해(1964) 정부는 유적 정비를 위해 민가를 사들여 주변을 말끔히 정리해놓고 터를 보존하고 있었다.

그것이 오히려 도굴의 화를 불렀다. 사리장엄구가 들어있던 심초석이 노출된 것이다. 도굴범들은 ‘웬 떡이냐’ 하고 군침을 흘렸다. 심초석 속 사리장엄구를 보관하려고 올려놓은 10t짜리 방형대석(사각형 모양 바위)도 무용지물이었다. 12월26일 밤 12시 도굴밤들은 3t짜리 유압재크와 윈치로 방형대석의 틈을 살짝 낸 뒤 사리공 안에 들어있던 사리장엄구를 몽땅 털어갔다. 그리곤 다시 방형대석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감쪽같았던 ‘황룡사 9층 목탑 사리공 도굴 건’이 불국사 석가탑 도굴 미수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꼬리가 잡힌 것이었다.

도굴범-재계-학계 유착

수사 결과 더욱더 기막힌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당시 언론은 “국내 굴지의 기업 회장의 형 이×각 삼강유지 대표에게 일련의 도굴 유물이 거액에 팔렸다”면서 “심지어 윤×만 등 도굴범 2명이 이×각씨 집에 이틀간이나 머물렀던 사실도 드러났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도굴단의 배후에 국내 일류 재벌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도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떠들썩한 이때 또 하나의 주목거리가 아닐 수 없다”고 꼬집었다.(동아일보 1966년 9월20일 등)

이 사건에서 또 찜찜한 구석이 있다. 불교미술사학자이자 모 대학 소속인 황×영 교수는 ‘황룡사 9층 목탑 도굴’과 관련해서 “당시 이 (도굴) 유물은 민간에 매각되었고, 본인은 그 순간에 관여했다”고 짧게 언급했다. 한마디로 황 교수 본인이 장물의 가격을 매기는 감정에 응했음을 고백한 것이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도굴-재계-학계 유착이 존재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니 혹독한 비판을 감수해야 한다.

도굴 사건의 수사 결과 당시 재벌 기업 관계자가 일련의 도굴 유물취득에 관여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당시 저명한 학자 교수는 “이 (도굴) 유물은 민간에 매각되었고, 본인은 그 순간에 관여했다”고 짧게 고백했다. 이기환 제공

어쨌든 이 씨의 수중에 있던 유물 220여 점이 압수되었다. 그런데 압수유물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유물이 2건 있었다. 훗날 보물로 지정된 ‘황룡사 9층 목탑 금동찰주본기’(이하 ‘찰주본기’)와 ‘중화3년(883)명 금동사리기’ 등이다. 이중 ‘황룡사 9층 목탑 금동찰주본기’는 871(경문왕12)~872년 사이 황룡사 9층 목탑을 창건·건창수리한 내력을 900여자로 기록한 것이다.

최근 ‘중화3년명 원통형 사리기’ 몸체와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뚜껑에 대한 과학적 분석 결과 두 유물이 100% 1세트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 사리기의 입 부분에서 일정한 높이의 구리 부식 흔적이 관찰됐다. 뚜껑이 덮여있던 흔적과 일치한 것이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명문의 전반부는 선덕여왕(632~647)이 자장 법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9층 목탑을 창건한 경위를, 후반부는 문성왕~경문왕대의 중수 내력을 기록했다. 명문은 “…638년 당나라에 건너간 자장 법사가 643년 귀국하기 전 중국의 원향선사에게 들었다”는 말을 전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때 원향선사가 ‘내가 관심법으로 보니 황룡사에 9층 탑을 세우면 해동의 여러 나라가 그대 나라에 항복할 것’이라 했다”는 것이다. 명문은 이어 “그 후 귀국한 자장법사가 선덕여왕에게 아뢰자 여왕은 이간(이찬·17관등 중 2등) 용수(혹은 용춘)에게 명하여 대장(大匠)인 □□□비(非) 등과 소장(小匠) 200여 명을 거느리고 탑을 제작했다”고 덧붙였다. 그런 뒤 “…14년(645) 건립을 시작하고 4월8일 탑의 찰주(기둥)를 세웠으며 이듬해(646) 완공했다”고 썼다. 여기까지는 탑의 최초 조성에 관한 이력이다.

다음은 탑의 수리 명세다. 195년 후인 841년(문성왕3) 탑이 동북쪽으로 기울자 수리계획을 세웠지만 30년이 지나도록 공사가 진척되지 않았다. “그랬다가 871년(경문왕11) 왕의 친동생인 이간 위홍의 주도로 중수가 시작되었다. 872년 7월 9층 공사를 마무리…. 11월6일 찰주를 들어 사리공을 살폈고…25일 사리 100매와 법사리 2종 봉안…제목과 사유 기록, 창건의 연원, 중수 이유 등을 기록….”

원향선사 혹은 신인

이 ‘찰주본기’는 872년 11월 당시의 생생한 기록이다. 그럼 후대의 역사서인 <삼국사기>(1145)와 <삼국유사>(1281) 등은 어떻게 기록했을까. <삼국사기>는 “636년(선덕여왕5) 자장법사가 당나라에 들어가 불법을 구했고, 645년 3월 귀국한 자장의 요청에 따라 구층탑을 창건했으며, 873년(경문왕 13) 9월 중수공사를 마무리했고 길이는 22장(220척)”이라고 전했다.

‘찰주본기’와 비교하면 1년씩 차이가 날 뿐 내용은 같다. 다만 <삼국사기>는 사실만 간단히 기록했다. 그런데 일연스님이 편찬한 <삼국유사>의 기사는 아주 세밀하다. 그 중 ‘찰주본기’에서는 ‘원향선사’가 등장하지만 <삼국유사>에서는 ‘신인(神人)’이 나온다. <삼국유사>에서 자장은 신인에게 “말갈·왜가 남북으로 접하고 고구려·백제가 번갈아 가며 침략하니 이것이 신라의 걱정”(<삼국유사>)이라고 토로했다. 당시 신라는 누란의 위기에 빠져있었다. 백제의 총공세에 대야성(합천) 등 40여 개 성을 잃었다(642). 자장법사는 고국에서 들려오는 좋지 않은 소식에 깊은 시름에 잠겨있었다. 이러한 자장의 걱정에 신인의 답변은 지금 기준으로는 다소 뜬금없었다.

도굴 압수품 중에는 ‘황룡사 9층 목탑 금동 찰주본기’가 압권이었다. ‘찰주본기’는 9층 목탑의 ‘창건(646) 및 수리(871~872) 내력’을 900여 자로 기록한 것이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여왕이라 덕이 없어…

“너희 나라는 여자가 왕이 되어 덕이 없으니 위엄도 없다. 그래서 이웃 나라가 침범하는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신인은 “호법룡이…황룡사를 수호하고 있으니 빨리 돌아가 절 안에 9층 탑을 세우면 아홉나라(九韓)가 항복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닌 게 아니라 당시 ‘신라의 사상 첫 여왕 등극’ 소식은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충격파를 던진 게 틀림없다. “당나라 황제가 짝이 없는 나(선덕여왕)를 희롱하려고 ‘나비 없는 꽃 그림’을 그렸다”는 <삼국유사> ‘지기삼사’ 기사가 유명하지 않은가. 사달이 일어났다. 647년(선덕여왕 11) 정월 비담과 염종이 “여주(女主·여왕)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면서 반역을 일으켰다.

이 반역은 실패로 끝났지만 <삼국사기>는 “선덕여왕이 1월8일 서거했다”고 전했다. 비담의 난이 선덕여왕 서거와 어떤 관련이 있는 지 모르겠다. 오죽하면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1075~1151)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는데, 신라는 여왕을 내세웠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신라본기·선덕여왕’조)고 어이없는 평론을 붙였겠는가.

어떻든 그로부터 226년 뒤인 872년 황룡사 9층 목탑을 중수할 때 새긴 ‘찰주본기’에는 선덕여왕과 관련된 나쁜 이야기를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찰주본기’에는 ‘여왕 운운’하는 이야기는 빼고 “9층 목탑을 세우면 해동의 여러 나라가 항복할 것”이라고만 새겼다.

<삼국유사>는 ‘찰주본기’와 <삼국사기>에 비해 좀더 세밀하다. ‘찰주본기’는 ‘신라가 끊임없는 외세 침략을 막으려고 9층 목탑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신라는 여자가 왕이 되어 덕이 없어서 외세의 침략을 받는 것이므로 황룡사 9층탑을 지으면 아홉 나라가 항복할 것”이라고 목탑 창건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이기환 제공
‘□□□非=백제 아비’

또 하나, ‘찰주본기’에는 의미심장한 구절이 등장한다. “이에 □(왕이) 감군인 이간 용수에게 대장(大匠)인 □□□비(非) 등과 소장(小匠) 200여 인을 거느리고 이 탑을 만들도록 명했다”(乃□命監君伊干龍樹大匠□□□非等率小匠二百人造斯塔焉)는 구절이다. 그런데 ‘감질난다’는 표현이 꼭 맞는다. 1150여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찰주본기의 일부가 삭아 떨어져 나갔는데, 공교롭게도 ‘결정적인 □□□’ 3자가 전부, 혹은 일부가 없어졌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비(非)’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삼국유사>에 이 부분을 추독할 수 있는 구절이 보인다. “황룡사 9층 목탑 조성을 위해 백제 기술자(工匠) 아비지(阿非知)를 초빙했고…이간 용춘(혹은 용수·진지왕의 아들)이 주관하여 소장(小匠) 200명을 이끌었다”(‘황룡사9층 목탑’조)는 내용이다. 이 구절을 ‘찰주본기’에 맞춰보면 정답을 얻어낼 수 있다. 즉 <찰주본기>에서 떨어져 나간 ‘□□□非’는 ‘백제아비(百濟阿非)’임에 틀림없다.

‘아비’에 붙은 ‘지(知)’는 그 당시에는 ‘존칭 접미사’로 쓰였다. 지금으로 ‘~선생’이나 ‘어르신’ 혹은 ‘대감’이나 ‘영감’, 혹은 ‘공(公)’ 정도가 될까. 그러니 ‘아비지’의 이름은 ‘아비’이다. ‘찰주본기’에 등장하는 이간 용수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용춘, 바로 그 사람이다. 용수가 백제 기술자인 아비지를 초빙, 신라 기술자 200여명을 이끌고 목탑 조성을 지휘했다는 것이다. ‘찰주본기’와 <삼국유사> 내용이 100% 부합된다.

또 하나 검증해야 할 부분이 있다. ‘찰주본기’는 “9층 목탑은 철반 이상은 높이가 7□이고 이하의 길이는 30보 3척”(鐵盤已上高七▨已下高삽步三尺)이라 했다. 7자 다음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삼국사기> ‘본기’는 “872년 중수했을 때의 탑 높이는 22장(220척)”이라 기록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기록이 <삼국유사>에 등장한다. 즉 ‘찰주기’를 인용, “찰주기는 철반 이상의 높이가 42척이고 이하는 183척으로 기록했다”고 전했다. 그 당시 일연 스님이 ‘찰주본기’를 보고 인용했음이 틀림없다. 특히 당시 ‘1보=6척’으로 계산했기에 일연 스님은 찰주본기에 등장하는 ‘30보3척=183척’으로 환산해서 기록했을 것이다. 따라서 ‘찰주본기’에서 ‘철반 이상의 높이 7□’는 ‘7보’(42척)로 읽을 수 있다.

‘철반’은 탑의 가장 꼭대기 지붕 위에 설치하는 상륜부(금속제 장식 부분)의 맨 아랫단 받침대를 일컫는다. 그렇다면 전체 높이는 ‘42+183=225척’으로 계산된다. <삼국사기> 본기에 등장하는 ‘872년 중수한 탑의 높이=220척’과 불과 5척 차이가 난다. ‘872년 복원’이 ‘646년 창건 당시’의 규모를 그대로 따라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똑같이 복원하려 애썼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220~225척은 지금으로 치면 몇 m일까. 고구려척(1척=35.6㎝)으로는 80.1m, 당척(1척=29.8㎝)으로는 67.1m에 달한다. 67m든 80m든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고려 후기 승려 혜심(1178~1234)이 남긴 기행시(‘황룡사 탑에 오르다’)는 목탑이 온전했을 때 남긴 마지막 소감이었다. 왜냐면 67~80m에 달하는 목탑이 해심이 입적한 지 4년 후인 1238년(고종 25) 몽골군의 침입 때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한 층을 보고 나서 또 한 층을 보니, 걸음걸음 높이 올라 눈길이 점점 넓어지네. 지면은 깎은 듯 널찍이 평평하여 지친 백성들 무너진 집도 평탄하니 볼 만하네.”

‘찰주본기’는 “9층 목탑은 철반 이상은 높이가 7□이고 이하의 길이는 30보 3척”(鐵盤已上高七▨已下高삽步三尺)이라 했다. 7자 다음이 보이지 않는다. 이기환 제공
김유신의 현현

압수품 220여 점 가운데 또 하나 눈에 띄는 유물이 원통 모양인 ‘중화3년명 금동사리기’이다. 그런데 이 사리기는 좀 이상했다. ‘중화(仲和) 3년(883·헌강왕9)’이라는 제작 연도부터 그랬다. ‘9층 목탑의 중수 연도’(872)보다 11년이나 늦다. 그렇다면 이 금동사리기가 9층 목탑 사리공에 들어갈 이유가 없다. 그래서 이 ‘중화3년명 사리기’는 다른 곳에서 도굴된 장물이 압수과정에서 섞여왔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무엇보다 이 사리기에는 매우 생뚱맞은 인물이 새겨져 있다. 삼한일통의 주역인 김유신(595~673)이다. 이상하다. 목탑의 중수기(872)나 ‘중화3년명 사리 봉안기’(883)보다 200여 년 전의 인물이 아닌가. 명문 내용을 일별해보자. “…옛날에 유신(裕神) 각간(17관등 중 1등)이 세상에 태어나 과업을 이루어 나라의 보배가 되었기에, 삼가 이 대석탑을 만들었다…중화3년(883)에 다시…했는데…소탑 77구를 만들고 진언(眞言) 77벌을 써서 대탑에 봉안….”

<삼국사기> ‘본기’는 “872년 중수했을 때의 탑 높이는 22장(220척)”이라 기록했다. <삼국유사>는 ‘찰주기’를 인용해서 “찰주기에는 “철반 이상의 높이가 42척이고 이하는 183척”이라고 기록했다. 일연스님이 ‘찰주본기’를 보았거나 그 내용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기환 제공

의문이 든다. ‘유신(裕神)’이라면 그 유명한 김유신(金庾信)과 한자가 다르지 않은가. 그러나 학계에서는 ‘유신(裕神)’은 바로 그 ‘김유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 당시만 해도 이사부(異斯夫 혹은 伊史夫)처럼 이름을 음차(음을 빌림)하는 과정에서 표기가 달라지는 사례가 더러 있다. 게다가 명문은 ‘과업을 이뤄 나라의 보배가 된 인물’이라 했다.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을 지칭했을 가능성이 짙다.

그랬기에 872년에 중수된 황룡사 9층 목탑 사리기에 뜬금없이 ‘중화3년(883)’, 그것도 김유신 이름이 담긴 사리기가 들어있을 리 없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김유신’이 새겨진 중화3년명 사리기는 도굴범들이 즉 경주 부근의 탑에서 훔쳤을 가능성이 짙다고 봤다.

사실 단서가 있었다. 도굴 사건 직후인 1966년 10월 목탑의 심초석 사리공을 정식 조사하는 과정에서 꼭지가 달린 금동 뚜껑 1점을 수습했다. 하지만 이 금동 뚜껑은 몸체를 잃어버린 청동 그릇의 일부로 치부되어 20년 이상 과소 평가되었다. 그러나 1991년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불사리장엄’)에 이 뚜껑을 얹은 모습으로 처음 공개됐다. 그러나 그때도 100% 확신할 수 없었다. 이후 원통형 사리기의 구연부(입 부분)에 뚜껑이 덮였던 흔적이 정식발굴에서 발견된 뚜껑의 턱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2점의 유물은 1세트를 이루고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의구심이 말끔히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국립경주박물관이 황룡사터 발굴 50주년 기념 특별전(‘황룡사, 부처의 사리를 모시다-황룡봉불·6월11~10월11일’)을 열면서 그 의문을 말끔히 풀어냈다. ‘중화3년명 원통형 사리기’와 뚜껑을 두고 현미경·X선 투과촬영·X선 형광분석과 같은 과학적 분석을 진행한 결과 두 유물이 100% 1세트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우선 뚜껑의 지름은 42㎜, 사리기의 입 부분은 지름은 약 39㎜로 추정됐다. 3㎜ 더 큰 뚜껑이 사리기를 덮고 손쉽게 여닫을 수 있는 범위에 있다. 성분 분석 결과 두 유물은 똑같이 순동에 수은 아말감도금을 한 것으로 확인됐다. 재질과 제작기법이 같다는 것이다. 또 사리기의 입 부분에는 일정한 높이의 구리 부식 흔적이 관찰됐다. 이것은 뚜껑이 덮여있던 흔적이 분명했다.

이 결과를 토대로 ‘3차원 정밀 촬영’(3D 스캔)을 통해 복원했더니 실제 결합이 가능했다. ‘김유신’ 이름을 새긴 명문사리기가 황룡사 9층 목탑에 봉안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명명백백 확인된 순간이었다. 무자비한 도굴로 헝클어졌던 1100여 년 전의 역사가 이렇게 50년간이나 돌고 돌아 겨우 제자리를 찾은 셈이다. 도굴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실감하는 순간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이 개최 중인 ‘황룡봉불-황룡사 부처님 사리를 모시다’ 특별전. 10월12일까지 열린다. 이기환 제공
왜 김유신이 ‘갑툭튀’ 했을까

그러나 이제 50년 만에 겨우 하나의 숙제를 푼 것에 불과하다. 남은 과제가 있다. 김유신 이름과 그것도 중수가 끝난 지(872) 11년 뒤의 연대(883)를 새긴 사리기를 대체 언제 봉안했다는 말인가. 역사나 문헌기록에서 872년 이후 목탑 사리공을 열고 다시 사리장엄구를 추가로 봉안했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고려 때를 주목해야 한다.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 스님이 ‘찰주(본)기’ 등을 인용했기 때문이다. 즉 일연 스님 등이 872년에 목탑에 봉안한 찰주기의 내용을 알았다면 그 이전 어느 순간에 사리공을 열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 중 <고려사> ‘세가·현종’조는 “1012년(현종3) 경주의 조유궁을 헐어 그 재목으로 황룡사 탑을 수리했다”고 기록했다. 궁궐을 헐어 탑을 대대적으로 수리했다는 얘기다.

아마 이때 황룡사 9층 목탑의 사리공을 열고, ‘김유신’ 이름을 새긴 ‘중화 3년명 금동사리기’를 봉안했을 가능성이 짙다. 그러나 과제는 여전히 남는다. 최초에 ‘김유신’ 관련 사리기가 봉안된 대석탑(대탑)은 과연 어느 사찰에 있던, 어떤 탑인지, 또한 왜 그 사리기를 황룡사 목탑에 봉안했는지 알 수 없다. 이것은 또 어떻게 풀어야 할까.

<참고자료>
이현태, ‘황룡사 찰주본기와 그 의미’, <황룡봉불-황룡사 부처의 사리를 모시다>(특별전 도록), 국립경주박물관, 2026
이현태, ‘중화 3년명 금동 사리기 명문의 연구사적 검토’, <황룡봉불-황룡사 부처의 사리를 모시다>(특별전 도록), 국립경주박물관, 2026
이용현, ‘황룡사 찰주본기의 재검토’. <신라문물연구> 제11호, 국립경주박물관, 2018
신명희, ‘황룡사 목탑 사리장엄의 재발견-새로운 조사 연구 성과’, <황룡봉불-황룡사 부처의 사리를 모시다>(특별전 도록), 국립경주박물관, 2026
황수영, ‘신라 황룡사 9층 탑지-찰주본기에 대하여’, <동양학> 3,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1973
장이나·장수연·최기은, ‘제작기법으로 살펴본 ‘중화 3년’이 새겨진 금동 사리기의 원상’, <황룡봉불-황룡사 부처의 사리를 모시다>(특별전 도록), 국립경주박물관, 2026
한정호, ‘황룡사 찰주본기와 불사리장엄 연구’, <미술자료> 77호, 국립중앙박물관, 2008
진홍섭, ‘황룡사탑지 사리공의 조사’, <미술자료> 11, 국립중앙박물관, 1966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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