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ADR 상장 앞둔 SK하이닉스…1100조 투자계획 SEC 신고서 담은 이유

AI 투자 청사진 공개와 동시에 공급과잉 리스크까지 명시
ADR 자금과 1100조 투자 ‘분리’…美 투자자 신뢰 확보 포석
[대한경제=심화영 기자]오는 10일 미국 나스닥 미국주식예탁증서(ADR) 상장을 앞둔 SK하이닉스가 1100조원 규모의 중장기 투자계획을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증권신고서를 통해 해외 투자자들에게 첫 공개했다. 대규모 투자 발표 다음 날 곧장 신고서를 정정한 속도는 이례적이다. 업계에선 공급과잉과 재무 리스크까지 함께 공시한 것을 두고, 미국 자본시장 특유의 ‘세이프 하버(Safe Harbor)’ 공시 전략을 반영했다고 해석하고 있다.
2일 SK하이닉스는 충북 청주시에 100조원을 투자해 낸드플래시와 첨단 패키징 생산 역량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은 이날 ‘충청권 첨단산업 발전비전 국민보고회’에서 “낸드가 적용되는 분야와 수요는 앞으로 더욱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낸드 역시 일정 규모 이상의 증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앞서 회사는 서남권에 400조원을 투입해 신규 반도체 팹 2기를 건설하는 내용 등 총 1100조원 규모의 중장기 투자 계획을 내놨다.
하루 만에 움직인 SEC 신고서…“45조 ADR 자금과 1100조 투자는 별개”
SK하이닉스는 지난달 24일 이사회를 열어 보통주 최대 1779만주를 발행하는 제3자 배정 유상증자를 결의했다. 예상 조달 규모는 약 45조4500억원으로, 확보한 자금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1기 팹, 청주 P&T7 첨단 패키징 팹,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확보 등에 투입될 예정이다.
이후 지난달 29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용인 600조원, 청주 100조원, 서남권 400조원 등 총 1100조원 규모의 장기 투자 계획을 발표하자, SK하이닉스는 곧바로 SEC에 제출한 ADR 증권신고서를 정정했다.
신고서에는 ‘중장기 투자 전략 발표 및 실시에 따른 위험’ 항목이 새롭게 추가됐다. 회사 측은 “생산시설이 확충되는 시점에 글로벌 메모리 수요가 둔화돼 공급과잉이 발생할 경우 재무건전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밝혔다.
이번 정정 신고서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ADR 공모 자금과 1100조원 투자 계획의 ‘분리’를 명확히 했다는 점이다.SK하이닉스는 “이번 중장기 투자 전략은 ADR 발행 및 신주 유상증자를 통해 조달한 자금의 사용 목적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이는 미국 투자자들이 대규모 장기 설비투자 부담을 우려해 공모에 소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된다.실제로 ADR을 통해 조달하는 최대 45조원은 기존에 공시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1기, 청주 P&T7 첨단 패키징 공장, EUV 노광장비 확보 등 확정된 투자에 사용된다.
반면 서남권 400조원을 포함한 1100조원 규모의 메가 프로젝트는 영업활동을 통해 창출되는 현금흐름을 우선 활용하고, 시장 상황과 재무 여건에 따라 차입이나 추가 자금조달을 병행하는 방식으로 장기간 단계적으로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자본시장에선 이를 전형적인 세이프 하버 공시로 풀이한다. 미국에서는 대규모 투자 계획을 제시한 기업이 향후 업황 악화나 주가 하락으로 투자자들의 집단소송에 직면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한 반도체 담당 애널리스트는 “정부발 국가 이벤트 타이밍에 맞춰 호남 부지 인허가나 전력망 확보 등 실리를 챙기는 동시에, 미국 자본시장에는 ‘재무 건전성 훼손은 없을 것’이라는 정교한 시그널을 동시에 보낸 리스크 관리의 정석”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시장에선 이번 ADR 상장이 고질적인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할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SK하이닉스는 HBM 시장 세계 1위이자 엔비디아의 핵심 공급사지만, 밸류에이션은 미국 경쟁사인 마이크론보다 낮다. 현재 마이크론의 12개월 선행 PER은 11배 안팎인 반면 SK하이닉스는 6배 수준에 머물러 있다.
다만 이번 상장은 신주 발행을 동반한 유상증자인 만큼 기존 주주의 지분 희석은 불가피하다. 그럼에도 시장에선 조달 자금이 AI 메모리 생산능력 확대에 투입되고, 미국 시장에서 기업가치 재평가가 이뤄질 경우 희석 우려를 상당 부분 상쇄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심화영 기자 dorot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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