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팀이냐” 홍명보의 예언은 현실이 됐다

대혼란이다. 미증유의 상황이다. 은하계 최고의 빅리그, 즉 다혈질을 기본값으로 삼고 세상의 모든 선수·감독·전술이 융복합된 축구의 용광로 잉글랜드 리그에서 수년 동안 날카로웠으며 끝내 득점왕을 차지했던 손흥민. 우당탕탕 마구잡이로 거칠게 몰아붙이는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가히 넘사벽으로 불린 김민재. 스페인을 거쳐 프랑스로 비행해 가장 정교하고 우아한 축구를 몸으로 익힌 이강인. 그 밖에 또 누가 있는가. 자기 자신조차 속여버리는 황인범, 머리만 잘 쓰는 것으로 오해받고 있는 조규성, 스코틀랜드의 강건한 피지컬 미로를 헤집고 다닌 오현규, 이따금 급회전을 하지만 일단 직진하면 누구도 막기 어려운 황희찬. 아, 그밖의 선수들 또한 유럽 리그에서 뛰고 있으니 언제 또다시 이런 멤버로 월드컵을 나갈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대혼란이다. 해석 불가능한 상황이다. 당사자의 말을 들어보자.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석패한 다음날, 홍명보 대표팀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데이터를 보면 선수들의 운동량은 큰 차이가 없었다. 뛴 거리는 남아공전에서 조금 줄었지만 고강도 스프린트는 오히려 늘었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다."
현자의 말씀을 새겨볼 시간이다. 요한 크루이프. 축구장 안팎에서 축구의 미학적 아름다움과 사회적 가치를, 이제는 자신이 거하고 있을 저 하늘 높은 곳까지 끌어올린 이 명장의 아포리즘을 들어보면, 우리가 그리고 홍명보 감독 본인도 "무엇이 문제였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운동량은 있지만 통찰력은 없다
월드컵 기간에 맞춰 발간된 그의 자서전 <요한 크루이프>(지식공작소 펴냄)의 아무 페이지나 펼쳐보면 지금의 대혼전을 조망할 수 있는 경구를 발견하게 된다. 우선 325쪽의 경구다.
"축구는 눈을 크게 뜨고 하는 스포츠다."
세상의 어느 스포츠가 눈을 감거나 가늘게 뜨고 하겠느냐마는, 크루이프가 말하는 것은 '공간 감각 능력'이다. 눈을 크게 떠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비유인데, 자신의 위치로 공이 굴러올 때 그가 만약 공격수라면 동료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상대 수비수들은 어떻게 이를 차단하려 하는지, 그 공간 감각을 극대화해야 한다. 11명의 선수들이 각자의 위치를 확보하면서 동시에 팀 전체로서 유기적으로 움직일 것. 이를 그는 '통찰력'이라고 불렀다. 단순히 볼 터치 감각이나 위치 선점 능력이 아니라 공간 전체를 읽고 움직이는 통찰력, 그것이 우리에게는 부족했다. 크루이프는 "잘 달린다고 해서 될 게 아니"라고 말했다(325쪽). 홍명보 감독은 "데이터를 보면 선수들의 운동량은 큰 차이가 없었고 고강도 스프린트는 오히려 늘었다"고 했다. 그런데 통찰력은 없었다. 무의미한 방향으로 달렸다. 심지어 두세 명을 제쳤는데, 실은 패스할 곳이 없어서 후진했을 뿐인 플레이도 자주 반복됐다. 이는 석패한 멕시코전은 물론 첫 경기 체코전에서도 자주 발견된 일이다.
악순환이 반복되면 감독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축구는 아주 복잡하게 전개되는 단순한 스포츠다. 그런데 복잡한 단순함이 있고 무의미한 단순함이 있다. 가령 이번 월드컵 대회에서 눈에 띄는 복잡한 단순함의 경우를 보자.
킥오프 아웃이 보여준 압박의 시대
프랑스 대 이라크의 조별리그 첫 순간이다. 100여년 동안 축구는 '킥오프', 경기 시작을 알리는 심판의 휘슬이 울리면 같은 편끼리 패스를 했다. 그런데 이 경기에서 이라크 선수는 프랑스 진영 깊숙한 곳으로 공을 멀리 차서 아웃시켰다. 그런 뒤 일제히 프랑스 진영으로 우르르 몰려들어 갔다. '킥오프 아웃(Kick-off Out)' 전술이다. 이라크만이 아니라 카타르, 모로코, 심지어 홈그라운드의 막강 체력을 자랑하는 미국 대표팀도 이 전술을 구사했다.
얼핏 보기에는 실수한 듯하고, 가만히 분석해 보면 분명히 리스크가 큰 전술이다. 하지만 21세기 중엽으로 치닫는 현대 축구의 강력한 '압박 효율성' 축구에서 이는 경기 초반의 기세를 움켜쥐는 의외의 작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자기 진영에서 무의미한 패스를 숱하게 반복해 공 점유율을 거의 7대3 이상으로 압도하는 경기, 그러나 그 어떤 날카로움도 속도도 의외성도 없는 밋밋한 공 돌리기보다는 오히려 공을 넘겨주더라도 경기 시작부터 상대방 문전 앞에서 강력한 압박으로 초반의 분위기를 흔들어버리는 이 전술은 축구가 단순하지만 복잡하며, 복잡하지만 단순한 스포츠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상대 입장에서 보면 경기 시작을 자기 진영 깊숙한 곳에서 무의미한 스로인으로 해야 한다. 이때 상대방이 강력한 전방 압박 진형으로 몰려들면 일단 자기 수비수들에게 던져주기 급급하고, 그마저 여의치 않으면 골키퍼에게 던져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때까지 세계를 풍미했던 FC바르셀로나식 '티키타카 점유율' 축구가 이제는 상대 진영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압박하는가로 선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상대적으로 공 간수 능력이나 패싱 능력이 떨어지는 팀이 선호할 듯싶지만, 의외로 이 파격적인 전술은 이강인 선수가 뛰는 명문 파리 생제르맹이 2025년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처음 선보였으며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구단들도 신속하게 활용하고 있다.
공을 가진다는 것과 기회를 만든다는 것
다시 현자의 말씀을 들어보자. 그의 자서전에서 크루이프는 모국 네덜란드의 축구를 비판하면서 "전방을 향해 패스하는 대신 좌우로 공을 돌린다. 그것은 기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공을 경기장의 다른 부분으로 옮기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314쪽). 어쩌면 좌우로 돌리는 것은 그나마 나은 것일지 모른다. 우리 대표팀은 뒤로 옮겼다. 공의 소유권을 확보하기 위해 모든 선수가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만약 그것을 잃었을 때 소유권을 되찾기 위해 강력한 압박을 가하는 것. 그것이 현대의 축구다. 단순하지만 복잡하다. 이 복잡성을 철저히 준비해 매 경기마다 능란하게 구사하는 것, 그것이 감독의 역할이다.
감독의 경험이 팀을 가둘 때
어느 조직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학생들은 죄가 없다. 어느 교수가 들어가느냐에 따라 그 수업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팀원은 문제없다. 팀장이 문제고 본부장이 문제다. 그런데 홍명보 감독은 경기 직후에는 아주 불쾌하다는 듯이 "결과는 감독의 책임"이라고 한마디 툭 던졌고, 다음날 인터뷰에서는 "모르겠다"고 했다.
다시, 현자는 말한다. 지도자는 경험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자신에게서 한 걸음 벗어나 타인을 판단하는 단계에 도달해야" 한다고 했다(332쪽). 그리하여 언제나 선수가 최우선이 돼야 하는데, 이와 완전히 다른 시각, 즉 감독 자신의 경험에 의존해 상황을 바라볼 때 문제가 생긴다고 말한다. 아니, 굳이 현자의 말을 되새길 필요도 없겠다. 홍명보 감독은 울산HD 감독 시절인 2022년에 라커룸에서 미래의 자신을 향한 예언적 행동과 발언을 남겼다. "이게 팀이냐?" 아, 지금 그 말이 이뤄지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자신의 경험에만 의존하는 감독에 의해.
스포츠평론가 (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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