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백년대계, 길을 묻다] ①1000조 칩워(Chip War), 지방 분산이 경쟁력 될까

[대한경제=심화영 기자]“반도체는 정치가 아니라 생태계다.”
정부가 오늘 1000조원 규모의 비수도권 첨단산업 투자 청사진을 내놓는다. 핵심은 호남과 충청 등을 축으로 한 새로운 반도체 클러스터 구상이다. 수도권 일극 체제를 넘어 ‘전략산업 다극화’를 추진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구상이다.
청와대는 29일 이재명 대통령이 주재하는 ‘3대 메가 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참석한다고 27일 밝혔다.국민보고회에선 반도체, AI 데이터센터, 피지컬 AI 분야 등 3대 전략산업에 대한 지역 거점별 투자 계획이 발표될 예정이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주요 대기업들이 참석하며, 투자 규모가 1000조원에 이를 수도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발표를 앞두고 야당은 “기업 팔 비틀기”라고 비판하고, 정부는 “국가균형발전과 산업 경쟁력을 동시에 달성하는 전략”이라고 맞서고 있다. 산업 현장에선 정치적 찬반을 떠나 ‘정말 가능한 프로젝트인가’라는 현실적 질문이 나오고 있다.세계 반도체 패권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수백조원 규모의 신규 생산거점을 지방에 구축하는 것이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선택인지, 아니면 지역균형발전이라는 정책 목표가 앞선 것인지가이번 논란의 본질이다.
전공정이냐 후공정이냐…아직 답이 없다
반도체 공장은 다른 제조업과 차이가 있다. 초순수와 막대한 전력 공급, 안정적인 송전망, 수백개의 소재·부품·장비(소부장) 협력사, 연구개발(R&D) 인력, 물류망이 유기적으로 연결돼야 경쟁력이 나온다. 세계 최대 반도체 생산벨트로 성장한 경기 남부 클러스터가 4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도 이 같은 집적 효과 덕분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용인·평택·이천에 수백조원을 투자하는 이유 역시 단순히 부지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미 구축된 산업 생태계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다. 이 때문에 업계에선 ‘어디에 짓느냐’보다 ‘무엇을 어떻게 지을 것이냐’가 훨씬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공정의 성격에 따라 산업적 타당성은 크게 달라질 전망이다. 실제 삼성전자는 최근 AI 반도체 경쟁력 강화를 위해 첨단 패키징 역량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재용 회장은 지난 23일 천안사업장 C1·C2 라인을 찾아 HBM 후공정과 첨단 패키징 생산 현황을 직접 점검했다. 천안사업장은 삼성전자의 HBM 후공정 핵심 거점으로, AI 메모리 경쟁력의 한 축을 담당하는 곳이다.
당초 업계에선 광주·전남 신규 투자도 첨단 패키징이나 후공정 중심으로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우세했다. 그러나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25일 이재용 회장과 만나 논의하는 과정에서는 전공정 팹 투자 방안이 핵심 의제로 거론된 것으로 알려졌다.
전공정 팹은 웨이퍼에 회로를 새기는 반도체 생산의 핵심 시설로, 공장 한 기당 최소 60조~100조원 이상이 투입되는 초대형 프로젝트다. 동시에 소부장 협력업체와 핵심 엔지니어, 연구개발 기능까지 함께 이동하는 효과가 있는 만큼 후공정 투자와는 산업적 파급력이 전혀 다르다.
업계가 우려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수십조원이 투입되는 전공정 팹을 호남에 새로 구축할 경우 용인 국가산단과 자본·인력·협력업체를 놓고 경쟁하는 구조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AI 시대 핵심 경쟁력으로 떠오른 첨단 패키징과 데이터센터 중심의 클러스터라면 기존 수도권 메가클러스터와 역할을 분담하며 새로운 성장축을 만들 수 있다는 시각도 나온다.
그러나 정치권의 공방은 오히려 더욱 거세지는 양상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일각에서 제기된 용수 부족 가능성에 대해 “호남에도 영남이나 수도권만큼 물은 충분하다”고 직접 반박했다. 이 대통령은 엑스(X·옛 트위터)에 관련 기사를 인용하며 “첨단도시 발전에 필요한 관리 시스템을 갖추고 수자원을 제대로 배치·관리하면 하루 100만톤의 산업용수 공급도 가능한 것으로 검토됐다”고 했다.
반면 야권은 수백조원 규모의 반도체 인프라를 단기간에 특정 지역으로 분산 배치하는 구상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김미애 국민의힘 의원은 “경기 남부 반도체벨트 완성을 추진하면서도 동시에 호남·충청권 추가 반도체 클러스터를 추진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두 정책이 어떤 역할 분담과 시너지를 낼 것인지 구체적인 근거와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심화영 기자 dorot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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