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백년대계, 길을 묻다] ②“기업은 준비됐나”…이사회도, 엔지니어도 커지는 ‘호남행’ 부담

[대한경제=심화영 기자] 29일 청와대에서 열리는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 프로젝트 국민보고회’를 앞두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내부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정부는 “기업들의 자발적인 투자 계획”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경영진은 투자 결정에 따른 법적 책임을, 현장 엔지니어들은 실제 공장 운영과 인력 확보 문제를 우려하는 분위기다.
가장 큰 부담은 이사회다. 정부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총수들을 잇달아 청와대로 불러 비수도권 첨단산업 투자 방안을 논의하면서 재계에선 사실상 정부 주도의 투자 발표가 이뤄지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적지 않다. 야당과 보수 진영에선 “제2의 미르·K스포츠재단 사태”라는 비판까지 제기하고 있다.
더 큰 이슈는 이사회가 떠안게 될 법적 책임이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개정된 상법은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기존 ‘회사’에서 ‘주주’까지 확대했다. 투자 판단이 주주가치 훼손으로 이어질 경우 주주대표소송 등 법적 분쟁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이 재계의 시각이다.
만약 정치적 압박 논란 속에서 경제성과 사업성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대규모 투자를 결정했다가 기업가치가 훼손될 경우 이사회가 배임 논란이나 주주대표소송에 휘말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반도체·디스플레이와 같은 장치산업은 업황 사이클의 영향을 크게 받는 만큼, 수요가 예상에 미치지 못하면 대규모 생산시설이 유휴자산으로 남거나 과거처럼 해외 기업에 매각되는 상황이 재연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한동훈 무소속 의원은 “개정 상법에 따르면 정치적 압박에 굴복해 주주 가치를 훼손하는 것은 명백한 위법”이라며 “500만 주주의 피땀 어린 재산을 정치적 총알로 쓰게 한다면 이사들이 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 위반으로 법적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민연금과 해외 기관투자가의 움직임도 변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국민연금 지분율이 높고 외국인 투자자 비중도 상당해 대규모 투자 결정의 경제적 타당성을 이전보다 더 엄격하게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다. 재계 관계자는 “정부가 상법 개정을 통해 이사회 책임을 강화해 놓고, 한편으로는 국가 정책을 이유로 대규모 투자를 요구하는 모습은 기업 입장에선 상당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며 “투자의 명분뿐 아니라 사업성과 수익성까지 이사회가 모두 입증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동탄도 멀다는데 광주 가라고?”…삼성·SK 직원들 술렁이는 이유
경영진 못지않게 현장 엔지니어들의 우려도 적지 않다.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에는 정부의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추진 가능성이 알려진 이후 관련 글과 댓글이 잇따르고 있다. 상당수 직원들은 국가균형발전의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실제 반도체 생산 현장을 고려하면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삼성전자 DS부문의 한 직원은 “지금도 평택 근무라고 하면 호불호가 갈리고 동탄 선호도가 압도적인데, 느닷없이 광주나 호남으로 내려가라고 하면 자발적으로 갈 엔지니어가 몇 명이나 되겠느냐”며 “반도체는 사람이 전부인데 인재 수급 문제를 너무 쉽게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장에선 인력보다 더 큰 문제로 생산 효율성을 꼽는다. 전공정과 후공정, 협력업체가 수도권에 분산돼 있는 상황에서 수백억원어치 웨이퍼를 장거리 이동시키는 것은 물류비와 품질 리스크를 동시에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익명의 한 직원은 “트럭 한 대에 반도체 웨이퍼를 싣고 경기도와 광주를 오가며 패키징하라는 것인데 이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리스크를 누가 책임질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실무진 사이에서도 “최종 고객사로 제품을 보내려면 대부분 인천공항을 이용하는데 광주에서 물류를 운영하는 것이 과연 효율적인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업계 전문가들도 반도체 경쟁력은 공장 한 동이 아니라 생태계에서 나온다고 입을 모은다. 경기 남부에는 40년 가까이 축적된 연구개발(R&D) 인력과 협력업체, 장비업체, 대학, 물류망이 하나의 산업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이를 단기간에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거나 새롭게 구축하는 것은 단순히 공장을 짓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설명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지역균형발전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기업은 없다”면서도 “다만 반도체 산업은 정치적 선언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전력과 용수, 협력업체, 전문인력, 물류까지 모두 갖춰져야 비로소 경쟁력이 만들어진다”며 “결국 중요한 것은 어디에 짓느냐보다 어떤 역할을 하는 클러스터를 만들 것인지에 대한 산업적 설계”라고 말했다.
심화영 기자 dorothy@
〈ⓒ 대한경제신문(www.dnews.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대한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