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 흘러온 자매의 기억이 만났을 때… 은희경이 찾은 '시간의 감촉'

김나연 2026. 6. 29.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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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와 경선은 같은 해 1월과 12월에 출생한 자매다. 언니인 안나는 걸을 때 어깨를 움츠릴 만큼 손발과 골격이 크고, 동생 경선은 아기 때부터 눈에 띄게 예뻤다. 안나가 무거운 책을 샅샅이 탐독할 때, 경선은 다양한 책을 대충대충 읽었다.

은 작가는 "노년의 인물을 '노인' 대신 고유한 개인으로 보게 하고 싶었다"면서 "그러기 위해 두 노인 여성(안나·경선)을 굉장히 다르게 그리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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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감촉' 은희경 작가 인터뷰]
‘새의 선물’ ‘빛의 과거’ 잇는 '시간 3부작'
65세 동갑 자매 안나·경선의 몸의 기억
떨어져 있던 시간 둘러싼 해묵은 오해들
노년에도 새롭게 겪고 부딪힐 '우리의 첫'
7년 만에 장편소설 '시간의 감촉'을 출간한 은희경 작가가 25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다빈 기자

안나와 경선은 같은 해 1월과 12월에 출생한 자매다. 예순다섯이란 나이도, 겨울에 태어난 점도 공유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성정과 삶은 판이하다. 언니인 안나는 걸을 때 어깨를 움츠릴 만큼 손발과 골격이 크고, 동생 경선은 아기 때부터 눈에 띄게 예뻤다. 안나가 무거운 책을 샅샅이 탐독할 때, 경선은 다양한 책을 대충대충 읽었다. 안나는 결혼하지 않았고, 경선은 결혼·출산·이혼을 모두 겪었다. 그리고 비밀을 나누던 유년기가 갈라지기 시작한 날들을 두 사람은 다르게 기억한다.

은희경(67) 작가가 7년 만의 장편소설 '시간의 감촉'으로 복귀했다. '새의 선물' '빛의 과거'에서 뻗어온 '시간 3부작'을 마무리하는 작품이다. 25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만난 은 작가는 신간을 두고 "첫 순간이 계속되는 삶, 새로움을 겪고 어떤 담대함이 있는 노년을 그려보고 싶었다"고 했다.

은희경 작가의 신작 '시간의 감촉'. 정다빈 기자

은 작가는 1995년 신춘문예로 등단, 같은 해 첫 장편소설 '새의 선물'을 냈다. 30대 주인공 진희가 자신의 열두 살을 반추하는 이 소설을 쓸 때, 30대 중반이었던 은 작가 본인이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된 걸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10대로 거슬러 올라갔었다고 했다. '빛의 과거'도 예순에 접어든 주인공이 40년 전 자신의 청춘을 되짚는 이야기다. '시간의 감촉'에서는 60대 중반에 들어선 두 명의 주인공이 살아온 시간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은 작가는 "소설을 사건 위주로 쓰지 않는 편"이라며 "소설은 누군가의 삶을 그려보는 일이고, 제게는 삶을 사건이 아닌 변화와 흐름으로 바라보는 방식이 맞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 소설의 출발점에는 '몸'이 놓여 있었다. 은 작가는 모친의 죽음과 화장을 지켜본 뒤로 '몸의 소멸'을 오래 생각했고, 몸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가 이번에 다룬 몸은 다만 물리적 실체보다 인생의 역사가 새겨진 매개체, '기쁨과 고통과 욕망과 상실의 부화장'이자 '사랑의 꿈과 왜곡을 간직한 도서관'(373쪽)에 조금 더 가깝다.

작가는 "몸으로 시작해 질병과 죽음, 사랑과 가족의 이야기로 흘러왔다"고 설명했다. 몸의 기쁨, 몸을 혐오하는 사춘기 등 육체로서의 몸을 더 담고 싶었지만, 글이 길어져 일단 덜어내는 쪽을 택했다고 했다. 은 작가는 "제 머릿속에는 두 자매가 성적인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있었다"며 "성에는 기쁨도 소통도 있지만, 폭력성이 너무 많다는 것을 오래 생각해 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성적인 것이 어떻게 폭력이자 통치 수단이 되는지에 대해 언젠가는 글을 쓰고 싶다"고 덧붙였다.

'시간의 감촉'을 출간한 은희경 작가가 25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인터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현 체코)의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었다. 정다빈 기자

소설에 드러난 또 다른 화두는 노년이다. 경선은 식당에서 손님 대신 노인으로 취급되는 데 불만을 터뜨린다. 어느 때는 불쑥 푸념한다. 노인이라 그런지 교정 일감으로 연애소설은 결코 들어오지 않는다는 불만이다. 은 작가는 "노년의 인물을 '노인' 대신 고유한 개인으로 보게 하고 싶었다"면서 "그러기 위해 두 노인 여성(안나·경선)을 굉장히 다르게 그리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또 "사회는 젊음에 많은 가치를 두지만, 늙음 자체도 괜찮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면서 "노년은 인간의 긴 삶 중 한 단계이고, 모든 단계가 그렇듯 이 단계에도 새로움이 있다"고 했다.

안나와 경선, 경선의 손녀 다니엘이 함께 여행을 떠난 H시의 모습은 일본 나가사키에서 따왔다. 작중에서도 환자 경선이 오랜 비행을 할 필요 없던 여행지다. 낯선 곳에서 세 사람이 즉흥적으로 시작한 '우리의 첫' 게임은 그럴듯한 거짓말 속에 이어지다가, 여태껏 공유되지 않은 비밀을 건드린다. 떨어져 산 이후 경선이 겪은 첫 슬픔, 첫 절망의 고백이다. 그 시절에 대한 해묵은 오해를 깨닫고, 안나는 '기억을 지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던 동생의 말을 생각한다. "경선이 틀렸다. '우리의 첫'에 대한 기억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가장 오래된'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최근'과 '우리의 다음'이 되기도 한다."(357쪽)

책은 안나와 경선이 앞으로 겪을 수많은 '첫'을 상상케 한다. 삶의 태도를 점검하고, 수정하고, 재정립하게 할 새로운 만남들이다. 그중 어떤 순간은 벌써 엿볼 수 있다. 한때 사랑으로부터 도망쳤던 안나는 시간이 흐른 뒤 이런 문장을 맞닥뜨린다. 상공 400m 비행기 입구에 섰던 어느 낙하산 부대원의 말이다. "우리는 비행장에 있습니다. (…) 뛰어들어야만 하고, 뛰어내리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60대 여성 둘을 내세운 이 이야기는 결국 성장소설이다.

시간의 감촉·은희경 지음·문학동네 발행·384쪽·1만8,800원

김나연 기자 is2n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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