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수십 년 간 ‘지방 불가’ 외치다 갑자기 호남으로 간다는 반도체

조선일보 2026. 6. 25.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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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16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한미 관세협상 후속 민관 합동회의에 앞서 이재명 대통령(앞줄 가운데)과 참석자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최태원 SK그룹 회장, 이 대통령,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뒷줄 왼쪽부터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연합뉴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호남권에 수백조 원 규모의 전공정(FAB) 라인을 구축하는 방안을 정부와 조율 중이다. 수도권엔 공장 부지와 인프라가 고갈됐다는 이유다. 그러나 20여 년간 인력 확보의 한계, 협력사 생태계, 물·전기 공급 문제 등을 들어 지방 이전을 거부해 온 기업들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배경을 두고 시장의 의구심이 깊다.

반도체는 우수 인력의 집적도가 중요한 장치 산업으로, 기업들은 고급 엔지니어를 유치하려면 경기 남부가 ‘마지노선’이라 강조해 왔다. 협력사들의 촘촘한 생태계도 용인과 평택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불과 3년 전인 2023년 정부가 경남 진주를 반도체 특화 단지 공모에서 탈락시킨 명분 역시 기존 반도체 생태계와의 시너지 부족이었다. 엄격하던 산업 효율성 기준이 왜 갑자기 달라졌는지 의아하기만 하다.

해당 기업들은 수도권엔 더 이상 땅이 없다고 배경을 설명한다. 물론 그런 측면이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이번 결정이 말끔하게 설명되지는 않는다. 반도체 전공정 라인에는 기가와트(GW)급의 안정적인 전력이 필수적이다. 호남에 풍부한 태양광만으로는 전력 공급이 불안정하고 막대한 ESS(에너지 저장 장치) 비용이 뒤따른다. 용수 공급도 문제다. 영산강 수계의 한계로 충청권 대청댐 물을 끌어오겠다는 아이디어가 나오고 있으나 자칫 ‘호남 대 충청’의 지역 갈등을 촉발할 수 있다. 당장 충청권 정치인들이 반발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반도체는 호황과 불황의 골이 극명한 ‘사이클 산업’이다. 정치적 요구에 떠밀려 설비를 늘렸다가 업황이 나빠지면 천문학적인 고정비 부담과 적자는 기업의 존립을 흔들게 된다. 투자 결정의 과정과 시간표를 보면, 정책 당국의 직간접적인 관여가 없었다고 하기 어렵다. 대통령이 삼성·SK그룹 총수와 연쇄 회동한 데 이어 청와대 정책실장이 “용인은 그대로 두고 제2 클러스터를 추가하는 것”이라며 기정사실화했다. 이 자체가 기업에 상당한 압력일 것이다.

글로벌 투자자들이 가장 기피하는 불확실성이 바로 ‘정치 리스크’다. 반도체 입지가 이사회가 아닌 정치적 입김에 좌우된다는 인식이 퍼지는 순간 국가 핵심 전략 자산인 반도체는 시장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 기업의 미래를 좌우할 초대형 투자는 정치적 시간표가 아니라 오직 효율성과 산업 논리에 따라 기업이 자율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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