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으로부터 독립한 방송이 민주주의 지켜내”
임기 3년 훌쩍 넘기고 5년 간 방문진·MBC 지켜
전두환 신군부 언론 탄압에 맞서다 쫓겨난 해직기자 출신
“윤석열 정권의 엠비시 탄압은 전두환 때 못지않아”
공영방송은 민주주의 수준 높이고 사회적 갈등 해소에 기여
권력과 언론은 항상 적정 거리 유지해야 서로 발전해
“시민사회가 공적 책임 다하는 언론은 격려하고 지원해야”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한국 사회에 언론다운 언론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땡전 뉴스(방송사 뉴스 프로그램이 전두환 당시 대통령 관련 소식으로 시작되는 것을 풍자한 말)’로 상징되는 어용 방송과 족벌 신문이 공론장을 장악한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한겨레신문이 국민주 모금을 통해 1988년 5월 창간된 배경이다. 문화방송(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가 설립된 것도 마찬가지다. 1987년 민주화운동의 영향을 받아 엠비시에 노동조합이 설립된 후 노사는 ‘방송민주화 실현’ 방안을 마련하기로 합의했다. 이때 노조 고문변호사였던 조영래(1947~1990) 변호사가 엠비시의 지배구조를 권력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공익법인을 설립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국회도 여기에 호응해 한국방송(KBS)이 보유하고 있던 엠비시 주식 70%를 공익법인에 넘기는 내용의 법을 1988년 12월 통과시켰다. 이렇게 설립된 것이 바로 방문진이다. 방문진은 단순한 대주주가 아니라 엠비시의 독립성을 지키는 든든한 울타리인 셈이다.
권태선 방문진 이사장이 윤석열 정권의 탄압에 맞서 엠비시를 지켜내야 하는 임무를 맡게 된 것은 운명인지도 모른다. 권 이사장은 1980년 전두환 신군부의 대대적인 언론 탄압으로 언론사에서 쫓겨난 해직기자 출신이다. 무자비한 폭력성을 띤 군사정권의 탄압을 견뎌냈던 그는 윤석열 정권과의 싸움이 “전두환 군사정권에 의해 강제 해직됐던 일 다음으로 어렵고 힘든 시간이었다”고 돌아봤다. 새 방문진 이사진이 구성되는 다음달 초 퇴임하는 권 이사장을 지난 18일 방문진에서 만났다.
―경찰이 최근 감사원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혐의 처분 결정을 내렸다. 무슨 사건인가?
“윤석열 정권 때인 2022년 11월 한 보수 시민 단체가 ‘방문진이 엠비시의 방만 경영을 방치했다’며 감사원에 국민감사를 신청했다. 감사원은 방문진이 관련 자료를 제때 제출하지 않아 감사를 방해했다며 나에 대한 수사 참고 자료를 송부했고,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는 이를 명분 삼아 나를 해임했다. 애초 나의 해임처분 집행 정지 재판에서부터 시작해 모두 5번의 재판에서 이미 감사방해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인데 3년이나 끌고 있다가 이제야 결정을 내린 것이다.
―감사원 감사가 탄압의 시작이었나.
“그렇지 않다. 2022년 대선 직후부터였다. 대선 직전이었던 그해 1월 <서울의 소리> 기자와 김건희씨 간 통화 내용을 엠비시 스트레이트에서 보도한 뒤 윤석열 캠프와 국민의힘 쪽에서 엄청난 압박을 가했다. ‘정권이 바뀌면 간단치 않겠다’고 예상됐다. 윤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인수위)가 방문진에 보고를 요구하며 공격을 시작했다. 방문진은 물론 방송사가 인수위에 보고한 전례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어서 못 간다고 했다. 그랬더니 ‘보고가 아니라 간담회 형식으로 하겠다’고 한발 물러서더라. 그래서 ‘무슨 얘기하는지 들어나 보자’는 취지로 방문진 사무처장을 보냈다.”
―무슨 얘기를 듣고 왔나?
“사무처장이 ‘인수위 사람들이 엠비시 민영화 얘기를 많이 했다’고 보고했다. 그래서 윤석열 정권의 목표가 엠비시 민영화인 걸 알았다. 엠비시 민영화는 이명박 정권 때 시도했던 거다. 최시중 당시 방통위원장이 ‘엠비시는 정명(正名)을 생각하라’는 말로 포문을 열었다. 엠비시의 민영화를 압박하는 발언이었다. 당시에는 민영화 추진 사실이 누설되면서 현실화되지 못했다. 이제 윤 정권이 다시 이를 추진할 모양이니 간단치 않은 싸움이 될 것 같았다.
나를 해임하기 위한 빌드업의 첫 단계는 감사원 감사였다. 정권의 목표는 나와 방문진 이사 1~2명을 해임한 뒤 이사진을 보수 우위로 만들어 엠비시 사장을 교체하는 것일 터였다. 이 때부터 방문진 이사들 가운데 진보 쪽 인사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았다. 해임에 대해 소송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으니까 변호사비를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얼마를 모았나?
“1500만원 정도였던 것 같다. 실제 소송비용은 훨씬 더 많이 들었지만, 그래도 이사들이 엠비시를 함께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거라서 큰 힘이 됐다. 돈을 모을 때 ‘소송에 쓸 일이 없게 되면 나중에 임기 마치고 이 돈으로 여행을 같이 가자’고 웃으면서 말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은 여행을 갈 순 없게 됐다. 예상대로 그들이 나를 해임했으니까. 법원으로부터 해임 처분에 대한 집행정지 결정을 끌어내야 했다. 하지만 권력이 아무리 터무니없는 사유로 공영방송 임원이나 방문진 이사를 해임해도 법원은 단 한 번도 집행정지 신청을 받아준 적이 없다. 이명박 정권 때 정연주 케이비에스 사장을 해임한 이래 비슷한 사례가 잇따랐지만, 법원은 나중에 본안소송에서는 해임 처분이 위법하다는 판결을 내리면서도 집행정지 신청은 모두 기각했다. 법원이 결국 권력자에게 방송을 장악할 시간을 벌어준 셈이다. 이런 상황을 돌파하려면 법리에 뛰어나면서 공영방송의 중요성을 잘 아는 실력있는 변호사가 필요했다. 조용환 변호사가 그런 분이라고 판단해서 부탁을 했는데, 흔쾌히 들어주셨다. 조 변호사는 나와 함께 케이비에스 이사를 지낸 경험이 있어서 공영방송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결국은 법원으로부터 집행정지 결정을 받아냈는데.
“나는 재임 중 방송사에 길이 남을 2건의 집행정지 결정을 받아냈다. 하나는 2023년 나에 대한 해임 처분을 정지한 건이고, 다른 하나는 2024년 8월 ‘방문진 후임 인사 임명 처분’ 집행정지 결정이었다. 첫 번째 결정은 방통위가 2023년 8월21일 나를 해임한 것을 취소해달라는 소송과 함께 집행정지를 신청한 것이다. (권 이사장은 해임된 지 3주만인 2023년 9월11일 이사장에 복귀했다.) 처음에는 승산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까 말했듯, 법원이 이런 집행정지를 받아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 변호사가 작성한 소장을 보니, 정상적인 법원이라면 외면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임의 위법성에 대한 지적은 물론이고, 민주화의 결실로 탄생한 방문진과 공영방송 엠비시의 역사와 방송의 독립과 언론의 자유의 중요성을 설득력있게 정리했다. 이진숙 체제에서 방문진 후임 이사를 선임한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조 변호사는 이 소송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권력으로부터 독립한 방송이 갖는 중요성, 방통위 2인 체제의 문제점과 후임 선정 과정의 위법성을 꼼꼼하게 지적하고 자유민주적 질서를 지키기 위해 ‘권력으로부터 독립한 방송이 하나라도 있어야 한다’고 호소했는데, 그게 통한 것이다.
엠비시 직원들은 엠비시를 권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한 두 번의 집행정지 결정을 보면서 방문진이 엠비시를 지켜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이 두 집행정지 결정은 조 변호사의 말처럼 엠비시를 넘어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적 헌법질서인지도 모르겠다. 두 집행정지 결정은 앞으로 공영방송에 대한 정권의 부당한 간섭을 막을 수 있는 좋은 선례가 될 것이다. 공영방송 이사에 대한 해임과 임명 과정이 방통위법의 입법 정신에 맞게 적법 절차를 지키지 않으면 사법적 통제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어떤 권력도 함부로 공영방송 임원을 교체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효과를 봤다. 이진숙 체제에서 교육방송(EBS) 사장의 후임 인사를 했을 때 임기 만료된 김유열 사장이 2인 체제 의결을 문제삼아 후임 사장 임명 집행 정지 소송을 냈는데, 법원은 김 사장의 손을 들어줬다.”

―정권의 공영방송 장악 시도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고, 앞으로도 일어날 수 있지 않나?
“이번 2개 집행정지 판결을 통해 안전장치가 어느 정도 마련됐다고 생각한다. 정권이 무리하게 방송사 사장이나 이사진을 교체하려고 하면 법원이 개입할 수 있는 선례를 만든 것이다. 또 방송 3법(방송법, 방송문화진흥회법, 한국교육방송공사법) 개정으로 이사들을 추천하는 주체가 다양화됐다. 과거처럼 정권이 마음대로 경영진을 교체하거나 방송 편성에 개입할 가능성은 상당히 줄었다고 생각한다.
공영방송의 중요성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독재 국가에서는 공영방송이 정권의 앞잡이 노릇을 하기도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그 나라 민주주의 수준을 더 높인다. 북유럽 국가들을 보면 공영방송에 대한 신뢰도가 상당히 높다. 영국 비비시(BBC)도 요즘 신뢰도가 많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60% 이상 된다. 독일은 훨씬 높다. 이런 나라들은 사회적 갈등이 우리보다 덜하다.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시스템이 나름 작동하는 것이다. 공영방송이 그런 역할을 잘 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갈등은 점점 심해지는데, 이를 해결하는 시스템은 너무 약하다. 그래서 언론 지형의 균형이 중요하고, 특히 신뢰받는 공영방송의 존재가 굉장히 중요하다.”
―민주당은 어떤가?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장을 맡고 있는 최민희 의원이 지난해 엠비시에 대한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자신에 대한 보도가 마음에 안 든다고 보도본부장을 퇴장 조치한 일이 있었다. 최 위원장이 이 기사에 불만을 가질 수는 있었다고 본다. 그렇다고 보도본부장을 퇴장시키는 건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당시 국감에서 나는 정치 권력과 언론 사이에는 금도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고 최 위원장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사과했다. 나는 이것이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권력과 언론은 늘 적정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공영방송은 지금 시장에서 살아남는 것도 중요하지 않나?
“그렇다. 엠비시는 과거에 드라마로 돈을 버는 기업이었지만, 이제는 제작비를 건지느냐, 못 건지느냐를 걱정한다. 제작비가 많이 올랐기 때문이다. 방송환경의 변화로 지상파 방송의 우위가 다 사라져버렸는데, 지상파 방송 전성시대에 만들어놓은 각종 규제가 발목을 잡고 있다. 티브이 조선(TV 조선)같은 종편은 광고에 제약이 없지만, 지상파는 규제를 받지 않나. 공영방송은 더 심하다. 시장에서 똑같은 조건에서 경쟁을 하도록 해야지, 한쪽은 손발을 묶어 놓고 경쟁하라고 하면 되겠나. 엠비시는 방송발전기금도 많이 내고 있는데, 그 지원금은 한푼도 못 받고 있다.”
―애초 임기(3년)를 훌쩍 넘겨 이제 이사장을 그만두게 됐는데, 소감은?
“원래는 2024년 8월12일에 임기가 끝났는데, 이진숙 전 방통위원장(현 국민의힘 의원) 덕분에 더 일하게 됐다.(웃음) 7월에 새 이사진이 구성되면 야인이 된다. 엠비시가 나름대로 역할을 잘 하고 있으니까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2024년 8월 임기가 끝났을 때는 착잡했다. 윤석열 정권의 탄압이 계속되고 있는데, 엠비시가 잘 버텨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법원이 이진숙 체제에서 뽑은 이사들의 임명을 취소하면서 2년을 더 있다가 퇴임하게 됐다. 언론계 전반의 상황을 보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최승호 전 엠비시 사장이 서재필 언론상 수상 소감으로 ‘이제 늙은 피디가 됐는데, 지금 언론인들이 욕을 먹는 상황을 보면 내가 제대로 살아왔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할 줄 아는 게 이 일이라서 앞으로도 계속 열심히 하겠다’고 하더라. 같은 심정이다. 평생 언론인으로 살면서 언론이 민주주의와 우리 사회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살아왔는데, 시민들의 언론인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인 것 같아서 매우 속상하다. 특히 언론계 후배들이 언론인으로서 존중받는 경험을 하기가 힘든 상황이 제일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언론과 언론의 자유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버팀목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는 진실이다. 언론을 탄압한 윤석열 정권, 이명박근혜 정권에서는 민주주의도 후퇴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목격했다. 그리고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우리가 지금과 같은 언론자유를 누리는 것은 민주화를 위해 피흘린 시민들과, 해직이나 투옥같은 희생을 치르면서 언론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던 언론인들 덕분이다.
따라서 민주화운동의 결실로 태어난 한겨레나 공영방송은 우리 사회가 함께 가꾸어가야 할 소중한 존재이다. 언론이 제대로 못한다고 비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공적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언론과 언론인을 격려하고 그들의 역량을 결집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시민사회의 역할이다. 특정 보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쉽사리 지지를 철회하고 비난하는 것은 소비자의 일이지, 우리 사회에 대한 책임을 공유하는 시민의 일은 아니다. 케이비에스가 진짜 ‘국민의 방송’으로 되돌아 올 수 있도록 채근하는 일, 공적 가치에 헌신하는 매체를 구독하거나 후원하는 일, 언론 본연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애쓰는 기자들을 격려하는 일 등 시민사회가 좋은 언론을 만들고 도울 수 있는 일은 많다.”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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