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준칼럼] 월드컵을 교실에서 못 본다고? - 그래서, 누가 결정하는데?

고현준 2026. 6. 23.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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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이 한창이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부터 봐 온 월드컵이 40년을 돌아 다시 멕시코(미국, 캐나다 공동개최)에서 열리고 있고, TV로 보는 중계지만 열렬히 응원하고 있다. 월드컵의 모든 한국 경기는 생중계로 보거나 직관을 했었는데 그중 1994년 미국 월드컵 때를 잊지 못한다. 당시 나는 고3이었지만 학교 교실에서 학급 친구들과 볼리비아전을 함께 시청했다. 인생 첫 단체 응원이었다.

이번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한국의 첫 경기였던 체코전이 있던 날, 교실에서 월드컵을 시청하는 것을 두고 이어진 몇몇 뉴스들을 봤다.

어느 학교에서는 9개 학급 중 8개 학급은 시청을 했지만 나머지 한 학급은 그러지 못해 쉬는 시간 아이들이 까치발을 하고 복도에서 다른 반의 TV를 훔쳐봐야 했다고 한다. 수업 시간 중 진행되는 경기 시청 여부를 일관된 방침 없이 교사 자율에 맡기다 보니 학급별 '희비'가 엇갈렸던 것이다.

교실에서 무슨 일이든 생기면 따라오는 것이 일부 학부모들의 민원 제기라고 하더니 어김없었다. 학교에서의 단체 경기 시청을 두고 '애국심을 고취하고 단합력을 기르는 교육의 일환'이라는 의견과 '면학 분위기를 저해하는 시간 때우기에 불과하다'는 의견이 맞선다는데 '면학 분위기'라는 말 자체가 어이 없다. 아이들을 눈 옆에 가리개를 씌워 입시를 위해 앞만 보고 공부하는 기계를 만들 셈인가. 대체 무엇이 면학인가.

이런 어색한 장면들이 연출되는 이유가 뭘까? 결정의 부재와 책임의 부재가 뒤섞여 있는 교실의 현실이 그 이유가 아닐까 싶다. 작금의 교실은 월드컵 경기 하나를 틀어줄지 말지를 두고도 멈춰 선다. 교사들이 교장에게 지침을 요청했지만 교장은 결정하지 못했다. 수업 영상이 SNS에 오르거나 민원이 들어올 수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고 한다. 교육청도 강제하거나 금지할 법적 근거는 없다며 한발 물러섰다. 결국 판단은 일선 교사에게 떠넘겨졌고, 아홉 개 반 중 한 반의 아이들은 복도 창문 너머로 까치발을 들고 경기를 훔쳐봐야 했다.

선생이 뒤로 빠지고 교장이 망설이는 현실, 교육청은 법적 근거가 없다는 말로 빠져나가기 급하다. 그러나 이들의 모습을 비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정작 물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 선택이 됐는가?"

답은 책임의 비대칭에 있다. 결정하면 책임을 지고, 가만히 있으면 안전하다. 경기를 틀어주기로 결정한 교장은 민원과 SNS와 감사의 표적이 되지만, 결정을 교사 재량으로 미룬 교장은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다. 교육청도 마찬가지다. 지침을 내리면 그 지침의 결과를 떠안아야 하지만, 법적 근거가 없다는 말 한마디로 빠지면 그만이다. 이 구조 안에서 침묵은 무능이 아니라 합리다. 가장 안전한 선택이 가장 무책임한 선택과 정확히 겹친다.

권한을 쥔 자가 결정을 미룰 때, 그 결정은 권한이 가장 적은 자리에서 강제로 내려진다. 교장이 미룬 판단은 교사에게 떨어지고, 교사들 사이의 엇갈린 판단은 끝내 아이들 사이의 불평등으로 정리된다. 여덟 개 반이 함께 환호하는 동안 한 반의 아이들이 창밖을 훔쳐보게 만든 것은 그 한 학급 담임의 잘못이 아니라 아무도 결정하지 않은 시스템 전체의 산물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참교육'이 화제다. 누가 봐도 판타지인 웹툰 원작의 이 드라마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간명하다.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그러나 그런 일이 있으면 속 시원하겠다는 기대가 생기니까. '교권 보호국'이라는 가상의 기관에서 감독관이 파견되어 학교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한 방에 정리한다. 그것이 학폭이든 도박이든 악성 민원이든. 현실에는 없는 권한으로, 현실에는 없는 배짱으로.

'참교육'이 판타지인 진짜 이유가 여기 있다. 말이 안 되는 건 그 센 주먹이 아니라 끝까지 책임지는 사람이 있다는 설정, 그게 판타지다. 현실의 학교와 교실에서는 그러기 쉽지 않다. 오히려 그런 사람이 제일 먼저 다친다. 결정하여 책임지려는 이는 깨지고 모욕당하고 찌그러지기 십상이고, 결정적 순간을 회피하며 피해 다닌 이는 그나마 살아남는 판에서, 책임지는 사람은 버티질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사람을 드라마 안에 가둬 두고 사이다로 소비하는지도 모른다.

교권을 살리는 길은 더 센 감독관 하나 더 들이는 데 있지 않다. 선생이 혼자 떠밀리지 않게, 책임을 같이 나눠지는 구조를 만드는 데 있다. 악성 민원 앞에 선생님을 혼자 세우지 않는 학교, 결정한 사람이 손해 보지 않아도 되는 규칙. 그게 없으면 교실은 계속 멈춰 서 있을 것이다.

축구 얘기로 시작했으니 축구 얘기로 마무리한다. 목요일에 있을 월드컵 조별리그 3차전 남아공전의 선전을 기원한다.

고현준 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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