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실력 노출, 더 위험해지는 세계 [노원명 에세이]

2026. 6. 21.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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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통항 재개 이틀만인 20일(현지시간)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격을 문제삼아 해협 재봉쇄를 선언했다. 가리키는 것은 이스라엘이되 실은 핵협상에서 미국의 목을 조르려는 카드다. 미국은 전쟁을 재개하든가, 이스라엘을 혼내며 이란에 '쏘리'해야 한다.

이번에 미국은 이란을 공군과 해군만으로 항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전쟁을 시작했지만 턱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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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20일 레바논 남부 공습. AFP=연합뉴스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통항 재개 이틀만인 20일(현지시간)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격을 문제삼아 해협 재봉쇄를 선언했다. 가리키는 것은 이스라엘이되 실은 핵협상에서 미국의 목을 조르려는 카드다. 미국은 전쟁을 재개하든가, 이스라엘을 혼내며 이란에 ‘쏘리’해야 한다. 지금까지 봐 온 트럼프는 후자를 선택할 인격이다. 호르무즈도, 협상의 주도권도 이란이 쥐고 있다.

미국과 이란이 체결한 종전 MOU를 놓고 미국의 항복 조인서 같다는 평가가 나왔다. 베트남전 패배 이후 미국이 이렇게 망신살 뻗쳤던 적이 없다. 비평가들은 미국의 세계 패권 종언을 침 튀겨 말한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미국은 세계 패권을 가진 적이 없다.

바다를 격하고 있는 타 대륙의 강대국을 무력으로 복속시킬 수 있는 역량이 있어야 세계 패권국이다. 최소한 공격적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에선 그렇게 본다. 그런 의미의 패권국은 지금껏 존재한 적이 없다. 이번에 미국은 이란을 공군과 해군만으로 항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전쟁을 시작했지만 턱도 없었다. 100년 전 1차대전 때나 지금이나 전쟁을 끝내는 것은 지상군이고 공습은 ‘부차적’이라는 사실이 이번 전쟁에서 재확인됐다.

미국이 지상군을 보냈다면 달랐을까. 그랬을 수도 있지만 안 그랬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은 지상군을 투입해 이들 나라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래는 못 갔고 미군은 도망치듯 철수했다. 베트남전에선 전력을 다하고도 졌다. 한국전에선 비겼다. 2차대전 때 독일을 결정적으로 항복시킨 것은 소련 육군의 존재였다. 이란은 큰 나라다. 미군이 이란을 점령하기도 어려웠겠지만 유지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의 지역 패권국일 뿐이다. 아메리카 대륙 안에선 지상군을 보내 점령할 수 있고 필요하다면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다. 미국이 같은 대륙 내 경쟁자, 혹은 타 대륙 국가의 간섭을 용인할 가능성은 없다. 미국은 또한 다른 대륙에서 지역 패권국이 등장하는 것을 막아왔다. 그렇게 함으로써 타 대륙에 미국이 영향력을 투사할 수 있다. 냉전 시대에는 소련을, 지금은 중국을 견제한다. 그러나 이들과 전쟁해서 이길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패권국은 없다.

트럼프가 이란을 건드린 것은 직전에 베네수엘라 마두로 대통령 체포 성공에 고무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만약 그렇다면 지역 패권과 세계 패권을 착각한 소치다. 마두로를 뺏긴 베네수엘라 집권층은 아무 저항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두로보다 미국이 좋아서, 혹은 베네수엘라가 약골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미국이 지리적으로 너무 가깝기 때문이다. 저항이 의미가 없을 때는 저항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국토가 넓은데다 대부분 험준한 산맥으로 이뤄져 있고 수백만 지상군을 보유한 이란은 베네수엘라와 체급이 다른 나라다. 가장 중요하게는 미국과 이란 사이에는 대양이 가로놓여 있다. 육군을 보내 점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이란을 단숨에 굴복시킬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있다. 핵을 떨어뜨리는 것인데 아다시피 불가능하다. 핵은 상대방의 핵 공격을 억지하는 용도 외에는 쓸 데가 없다. 미국의 핵 능력을 두려워하는 나라가 세계에 있는가.

이번 전쟁은 미국이 갖는 지역 패권국으로서의 한계를 입증했다. 항공모함과 스텔스기만으론 대양 건너 빈약한 무장조차 압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해협에 면한 국가는 싸구려 어뢰만으로 이 공간을 통제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이란이 할 수 있다면 예멘의 후티도 할 수 있다. 소말리아 해적이라고 못하란 법이 없다.

트럼프는 싸움꾼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실수를 했다. 이기는 싸움꾼은 자신의 깜냥을 노출하지 않는 법이다. 10대1로 싸워 이길 수 있는 거인은 12대1이 되면 어려워진다. 상대는 15명쯤 나온다. 무조건 지게 돼 있다. 미국의 실력이 이번에 다 노출됐다. 이란 정도 되는 나라를 압도할 능력이 미국에 없다는 사실 말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별 상관이 없다. 이란 전후 체급의 유라시아 지역 국가들, 특히 독재국의 야심에 불을 당길수는 있다. 북한을 포함해서.

미국이 창피당하는 것을 보고 ‘깨소금’을 외칠 사람이 많겠지만 강 건너 불로 생각하면 안 된다. 당장 바닷길 안전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2차대전 이후 세계가 누려온 항행의 자유는 미국 해군 덕분이다. 세계 곳곳에 군사기지를 두고 항공모함을 띄울 수 있는 유일한 나라가 미국이다. 역량은 그대로인데 평가가 달라졌다. ‘생각했던 것만큼 세지 않다.’

챔피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도전자 이란이 60일 후부터 호르무즈해협 통행료를 걷겠다고 한다. 이런 이란을 보고 튀르키예의 야심가 에르도안이 가만있을지 모르겠다. ‘보스포루스는 호구인가’ 하고 생각하지 않을까. 이집트는 인공구조물 수에즈 운하의 운임이 너무 싸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힐 것이다. 이외에도 미국의 해양 질서에 도전할 후보군은 많다.

미국의 위대함은 명실공히 세계 1위의 역량과 그 역량 이상을 생각하게 만드는 상상력에 의존해 왔다.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니므로 사기라기보다는 판타지이고 매력의 극대화다. 트럼프가 미국 정치 중심에 선 이후 판타지 망토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비바람에 젖고 있다. 허풍선이의 자아과시 몇번에 다 젖고 말았다.

노원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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